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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유신 말기. 그 때의 암흑을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중학생인 나조차 질식할 것 같았던 그 때의 거짓과 침묵의 비릿한 냄새가 지금도 코끝에 남아있는 것 같다. 물론 착각일 것이다. 나의 기억속의 냄새는 80년대의 것일 수도 있고, 실은 2016년 지금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1979년 10월 26일 라디오에서 하루 종일 흘러나오던, 슬픔을 강요하던 장송곡의 기억과 1978년의 기억은 색깔이 같다. 암흑. 암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김민기는 촛불을 들었다. 노래굿 ‘공장의 불빛.’ 공장의 불빛은 21편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는 음악극으로,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친구 송창식의 원효로 스튜디오에서 비밀리에 카세트로 녹음한 비합법음반이었다. 녹음 상태는 조악했지만 조원익, 이호준, 배수연 등 당대 최고의 세션맨들이 참가했다. 동일방직 노동자의 투쟁을 배경으로 한 이 노래굿은, 유신의 어둠을 뚫고 수천 개의 테이프로 복제되어 퍼져 나갔다. 1978년은 바로 동일방직 노동자들에게 똥물로 테러를 한 그 해이기도 하다. 동일방직은 모든 노동자들이었고, 모든 민중이 동일방직이었다. 1979년 2월 이 노래굿은 고 박형규 목사의 서울제일교회에서 채희완의 안무로 무대에 올려졌다. 이제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무대를 볼 수 있다. 야근, 공장의불빛, 두어라가자 등 많은 명곡들이 담겨있지만, 역시 ‘이세상 어딘가에’를 빼놓을 수 없다. 그 후 39년이나 흘렀지만 그의 노래는 시대를 초월한 울림이 있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뿐 84년 김민기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1집을 제작하고 91년에는 ‘겨레의 노래’를 총감독했다. 극단 학전도 개관했다. 93년 [김민기 전집]을 엮어 내면서 마지막 노래 ‘봉우리’를 발표하면서 그는 과거의 자신과 선을 그었다.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열심히 오르려고 했지만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이었다고. Bob Dylan의 ‘My Back Pages’처럼 김민기도 ‘봉우리’ 노래를 통해서 자기비판의 선에 섰지만, 나는 오히려 그 노래가 반가웠다.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계속 가리키고 있다면 “혹시라도 어쩌다가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