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요? 분명 이성이라 해도 자신의 어머니나 누이를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글쎄, 여성이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성이라 해도 매일 보는 사람들이고 대부분 함께 살아가고 있기에 이성이라는 감정을 가질 계기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보고 싶다거나 그립다는 감정이 나타날 리가 없습니다. 늘 곁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한번 본 여성이 자꾸 눈에 아른거립니다. 왜 그러지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왜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걸까요? 보고 싶어지고 그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만날 기회를 만들려고 애씁니다. 말을 걸어볼 틈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왜 하필 그 사람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이 선뜻 나옵니까?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기는 수십 년 함께 살아온 부부라 할지라도 똑같이 답은 찾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냥 좋았던 것이지요. 소개를 받는다든지 하면 사전에 상대방의 간단한 배경이라도 알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잘 맞을지 계산(?)도 해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어쩌다 들이 마주하는 자리가 있을 때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우러나는 감정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합니까?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고 그냥 겉모습만 본 상태입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내면에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낮에 본 그 모습이 밤에 자기 전에도 자꾸 떠오릅니다. 왜 이러지? 자기도 잘 모릅니다.
단순히 일시적 감정으로 끝난다면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이 점차 자신의 일상을 삼켜갑니다. 생각이 나는데 억제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좀 엉뚱한 짓거리도 해댑니다. 나아가 상대방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애씁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는 겁니다.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고 당황하게 몰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사전에 계산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밀어붙이는 거죠. 결국 상대방에게 뜻하지 않은 폐를 끼치거나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제공해줄 수도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스토커로 고발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는 짓을 보다가 그의 진심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함부로 대할 수도 없습니다.
‘아저씨, 나 좋아해요?’ 그렇다고 답하기도 곤란하고 또 안 그렇다고 하자니 그것도 아닌 듯하고 오히려 당황합니다. 그런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당해보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여자를 통해서 욕구 해소를 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은 처음입니다. 도무지 주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없던 일로 때려치우지도 못합니다. 마음이 자꾸 향하고 있고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여자 주위를 배회합니다. 때로는 선물 공세도 펴고 여자가 필요하다 싶은 일을 처리해주려 합니다. 어떻게든 여자에게 도움이 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띕니다. 결국 진심이 통합니다. 그리고 여자가 품에 안깁니다. 그 때의 기분을 경험해보았습니까? 아는 사람만 압니다.
나이는 들었는데 소위 철없는 남자입니다. 형네 집에 얹혀살면서 아버지의 근심이고 형의 골칫덩이입니다. 다만 형수는 그래도 도련님이라고 잘 모십니다. 그리고 여고생 조카에게는 종종 용돈이 제공되는 훌륭한 후원자입니다. 그런 ‘태일’이 하는 일이란 시장바닥 돌아다니며 돈을 걷어 고리대금업자에게 바치는 일수 수금책입니다. 힘으로 한 가닥 하는 건달? 아니면 폭력배입니다. 인간관계로는 힘으로만 맺어온 사람이니 감정을 다루는데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평범한 사람조차 사랑의 게임에는 갈피를 잡기 어려운데 태일에게는 힘으로도 되지 않는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래도 결국 진심이 통하였고 수협의 창구직원인 ‘호정’이를 얻습니다.
여자 하나 얻는 것이 세상 다 얻은 기분입니다. 해본 사람은 압니다. 문제는 함께 살아갈 집을 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큰돈이 필요하지요. 따로 직업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는 것이 폭력세계일 뿐입니다. 결국 상사로 모시는 고금리대출업자와 도박판을 털기로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용당한 사실만 알게 됩니다. 망신창이가 되어서 죄수가 됩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돈을 기다리던 호정은 실망만 안고 헤어질 결심을 합니다. 자기 버릇 개 주랴 싶었겠지요. 태일이 옥중생활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시한부라는 것입니다. 왜 때때로 몸이 이상반응을 하는지 몰랐다가 병원진단을 받을 기회가 생겨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수한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 어느 쪽이 바람직할까요? 우리는 대부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게 편합니다. 세상 떠나는 날을 알고 산다면 유익한 점이 있습니까? 자칫 개판치거나 불안 속에 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의 수명이 곧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한 철학자는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마지막 배려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신뢰를 떨어뜨려 미워진 사람이지만 그런 사정을 알게 된 호정이 마지막 가는 길 짧은 시간 간병해줍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랑해서, 잘 해주고 싶어서 일어난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아픈 마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Man In Love)를 보았습니다. 2014년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