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동 李圭東(1889~1950)】
"만주국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 주살 거사에 참여"
1889년 3월 26일 충청남도 보령군(保寧郡) 남포면(藍浦面) 창리(倉里)에서 부친 이희영(李曦榮)의 5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이명으로 이관일(李貫一, 李寬一)을 사용하였다.
부친은 신민회(新民會) 강원도 대표 주진수(朱鎭洙) 등과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 과정에서 1911년 11월경 만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이후 1913년에서 1915년 사이 세 차례에 걸쳐 일가가 만주로 이주하였다.
1915년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신흥학교(新興學校) 제3기를 졸업하였으며, 박명진(朴明鎭)·이동산(李東山) 등과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에는 대한혁명군(大韓革命軍) 제1대대 제1중대장으로 환런현(桓仁縣) 지역에서 복무한 후,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 계몽대장에 임명되었고, 교성대(敎成隊) 부감(副監)과 교원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에 지린성(吉林省) 용지현(永吉縣) 은가촌(殷家村)에서 신안촌농장(新安村農場)을 설립하여 벼농사를 지었다. 같은 해 3월 22일 하이룽현(海龍縣)에서 죄민들을 대사탄(大沙灘) 학교에 모아 독립선언축하식을 개최하고 주도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1919년 9월 15일 선양성(瀋陽城) 내 소남문(小南門) 뒤에 있는 천성여관(天成旅館)에서 전성인(田誠忍)이 폭탄을 제조하다가 폭사하고, 9월 20일 선양역 구내에 폭탄 8개가 버려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용의자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수배되었다.
1921년 영길주민회(永吉住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24년에는 신안촌농장 내에 신창학교[(新昌學校), 일명 길흥학교(吉興學校)]를 개설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 혁신농우단(革新農友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도 주력하였다.
1928년 5월 정의부(正義府)의 주도하에 참의부(參議府)와 신민부(新民府)가 참여하는 3부통합회의가 전개되자, 김동삼(金東三)의 결정에 따라 신안촌을 회의 장소로 제공하였다.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이청천(李靑天)·이웅(李雄)·고할신(高轄信) 등과 정의부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전민족유일당협의파(全民族唯一黨協議會派)에 속해 신광청년회(新光靑年會)·납법청년회(拉法靑年會)·무본청년회(撫本靑年會) 등 18개 단체대표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9년 정의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산업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신안촌농장이 홍수 등으로 피해를 입자, 멀지 않은 용지현 동상수하자(東晌水河子)로 근거지를 옮겨 3·1농장과 계림학교(鷄林學校)를 설립하였다.
1933년 남자현(南慈賢)에게 숙식 등의 편의를 제공하며,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주살하기 위한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남자현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같은 해 3월 김동삼의 장남 김정묵(金定黙)과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중국 관내지역으로 피신하였다가 1934년 7월 만주로 돌아왔다. 1935년 봄에는 지린성 용지현 화가촌(花家村)에 정착하여, 1937년 조카 이종대(李鍾垈)와 영신농장(永新農場)을 설립하였으며, 영신농업학교(永新農業學校)를 개설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0년에는 농장에 원동기를 보급하여 정미업을 시작하는 등 농장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1944년 5월 15일 영신농업학교의 안세영(安世榮)·신현대(申鉉大)·이군일(李君一, 신화균申化均]) 등 교사 4명과 학생 14명이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일제 헌병대에 붙잡혔다. 이른바 ‘영신농업학교 5.15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옥고를 겪던 중 광복이 되어 풀려났다.
1945년 8월 24일 지린에서 열린 조선인대회(朝鮮人大會)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어 사회를 맡았고, 이어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동포들의 신변 보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귀국하여, 이후 동북한국교민회연합회장과 중국귀환동포호조동맹이사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