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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선____
추사, 추상주의의 시조
오강석
■감응의 메커니즘
“사랑이란 절망의 빛, 간절한 언약마저 버리고…”
헌법재판소장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선고가 3월 13일 이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던 무렵. 한 방송사에서 <팬텀싱어>라는 프로그램의 1차 결선을 진행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하는 남성4중창 열창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클래식, 팝페라, 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크로스오버 음악을 선보이는 출연자들 중 한국어 노래를 부른 것은 조용필의 <슬픈 베아트리체>를 부른 한 팀뿐. 대부분의 참가팀들이 이태리 노래를 원어로 불렀고, 1등을 한 것도 그중 한 팀이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카메라는 열광하는 객석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관객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대부분은 이태리어를 전혀 또는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다. 관객들은 가사의 의미도 모르는 노래를 들으며 기립박수를 보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추사의 글씨를 보며 감탄을 연발하던 서예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 저 선, 흐르는…” 2015년에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길 행로를 조사하다 인촌 김성수 집안의 재실에서 추사의 주련을 발견했을 때였다. 글씨를 해독하기가 어려워 유명 서예가에게 보였다. 여러 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고 심사위원을 역임한 서예가인 그 분은 획의 조형에 감탄을 연발하면서도 정작 글씨를 제대로 읽어내지는 못했다. 8언절구로 된 9개의 주련을 해독하기 위해 한 분의 한문학 교수와 세 분의 서예가들이 문맥을 유추해 글자를 해독해야 했던 일이 새롭다. 추상성과 모호성은 모든 예술 작품의 특성이다. <팬텀싱어>의 관객은 텍스트의의 모호성을 클래식한 육성의 추상적 감응을 통해 극복하며 감동에 이르고, 주련 앞에 선 서예가는 붓의 궤적이 만들어내는 텍스트의 모호성을 추상적 조형미로 재구성하며 찬탄하고 있었다.
■이미지에 담은 메시지
유홍준은 『완당평전』에서 추사체의 특성을 ‘괴怪’라고 규정했다. 한자를 변형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글씨를 썼는가 하면 당시에는 사용하지 않던 고자를 섞어 쓰거나 같은 작품에 예서 행서 전서를 혼용하여 글씨가 괴기하게 보인다는 뜻이다. ‘괴’는 ‘모르겠다’의 다른 표현이다. 추사의 경우, 그것은 전문가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사는 당대 조선과 청나라를 망라해 최고의 명필로 꼽혔다. 우주의 기운이라도 받은 것일까? 나는 2년 가까이 ‘괴’에 매달린 끝에 마침내 그 비밀을 풀 수 있었다. 추사는 문자를 조형언어로 환치해 내놓았던 것. 추사의 텍스트는 메시지와 이미지가 상호 간섭하며 보완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명쾌하게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추사체를 ‘그림 같은 글씨’라 부르며 ‘괴’ 근처를 서성이다 돌아선 것은 필획만 보고 조형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자는 태생적으로 추상이미지이다. 지금 사용되는 한자는 초기의 이미지가 사용 과정에서 기록 편의를 위해 변형, 생략된 형태이다. 추사는 원초적 상형성의 경계를 넘나들며 변형과 혼용을 적절히 활용했다. 아래 왼쪽은 추사의 ‘그림 같은 글씨’를 말할 때 흔히 예로 드는 ‘대나무 화로가 있는 방’이라는 뜻의 죽로지실竹爐之室의 ‘집 실室’자이고 왼쪽은 ‘화로와 차의 향기가 있는 방’이라는 뜻의 일로향실一爐香室에 쓴 같은 글자이다.
죽로지실의 ‘실’을 보면 글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담한 정원과 팔각창이 있는 화려한 집의 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반면에 초가집인 일지암에 걸기 위해 쓴 일로향실의 ‘실’은 훨씬 소박한 모습이다. 지난 해 여름, 추사가 제주도 유배길에 차의 명인인 초의선사와 밤새워 담론을 나누었던 일지암에서 일로향실의 ‘실’자와 초가지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조화가 참으로 절묘했다. 그것은 차라리 그림이었다.
죽로지실과 일로향실에는 모두 ‘화로 로爐’자가 쓰였다.
왼쪽 위에 조그맣게 배치한 ‘불 화火’를 보면 한겨울 방 안에서 차가운 손을 녹이기 위해 난로 속에 묻어둔 숯불을 그린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계산무진谿山無盡은 네 개의 글자가 상호 교감하는 구도이다. 그 중 ‘시내 계谿’(아래 왼쪽)를 분리하여 감상해보자. 대상의 의미구조를 평면에 재현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연상시키는 선들이 문자추상 초기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
주자학을 깊이 이어온 집이라는 뜻의 신안구가新案舊家에는 없는 글자를 창안해서 쓰고 있다. ‘새 신新’의 ‘나무 목木’자리에 ‘아닐 미未’자를 쓴 것이다.(위 오른쪽) 주자 사당에 걸었던 신안구가 편액이다. ‘마땅히 새로워야 할 곳이 새롭지 못하다’는 일갈일까? 고등학교 한자 시험에 이런 답안을 썼다면 당연히 X를 받을 것이다. 위에 열거한 추사의 글씨들은 새로운 표현양식의 발원을 위한 워밍업에 해당한다.
■문자 추상의 시조가 된 코끼리
사진의 발명은 예기치 못한 여러 변화를 유발했다. 석기시대 암각화 이후 지속되어온 미적 고정관념을 혁파하는 동인이 된 것도 그 하나이다. 사진 이전의 미술은 대상의 완벽한 모방을 지고의 가치로 여겼다. 모방에 관한한 사진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사실적 표현을 추구하게 되었으니 사진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화가들은 지금도 대상의 모방에 열중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단 한사람 예외가 있다. 추사다. 인촌 집안의 재실에서 발견된 추사의 주련 중에 ‘마법일폭위사진魔法一幅爲寫眞’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림실력이 대상을 마술처럼 똑같이 그릴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똑같이 그리는 수준에 이르러 ‘똑같지 않게’ 그리고 쓰기 시작한 것이야말로 추사의 진정한 위대성이 아닐까?
1908년, 칸딘스키는 자신의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서다 색채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거꾸로 놓인 자신의 그림이었다. ‘형태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 칸딘스키는 이 발견을 3단계로 정리했다. 첫 단계는 그림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느낌, 즉 인상이다. 두 번째 단계는 대상이 의식작용을 유발하는 즉흥. 세 번째는 대상의 조형적 구성이 그림으로 완성되는 단계다. 비슷한 시기에 그림 속 사물의 형태를 단순화시켜 가다 종내 수직과 수평의 선만 남겨놓은 화가가 등장했다. 몬드리안이다. 그는 수평선은 사물을, 수직선은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고 주장하며 추상 이론의 체계를 세우는 주춧돌을 놓았다. 20세기 초중반 문화 예술계의 대표적 지성들이 다투어 의미를 부여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데 힘입어 추상주의는 현대미술의 주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석기시대 동굴벽화에서 고전주의까지 이어온 모방의 리얼리티로부터 탈출을 시도한지 불과 100여 년 만에 형태를 거부하는 내재적 리얼리티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진에 대한 반동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림은 ‘보는’ 것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추상적 사고는 장르를 초월해 인류의 예술 영역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돠었다.
서양미술사를 일별하려는 것도 아닌데 왜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을 언급하는가. 굽어진 세계미술사의 가지 하나를 곧게 펴놓으려는 것이다. 추상주의가 칸딘스키보다 60여 년 전에 조선의 제주도에서 추사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요약하면 칸딘스키의 색의 덩어리로 된 추상, 몬드리안의 수직과 수평의 선으로 이루어진 추상 이전에 조선의 추사가 글씨로 추상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증거를 제시하겠다. 바로 아래 그림이다. 현대미술은 이런 작품을 ‘문자 추상이라 부른다. 동양의 초서체처럼 휘갈겨 쓴 모습의 타시즘 추상화도 있지만 그것은 한참 뒤에 나타난 유형이므로 오컴의 ‘면도날 이론’을 적용해 잔가지를 제거하고 본론으로 치고 들어가자.
“바닷가 개펄 위에 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곤륜산에서 코끼리를 타니 백로가 고삐를 끄는 구나” 9세기 초에 대흥사의 설암스님이 남긴 게송이다. 아래쪽에 그려 넣은 ‘코끼리 상象’자를 보자. 누가 이 그림을 ‘상象’이라 읽을 수 있겠는가. ‘그려 넣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썼다’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추사는 긴 코를 말아 올리고 기둥 같은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코끼리 한 마리를 주변의 단정한 행서체 글자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곧추세워놓았다.
여러분의 눈에는 글씨로 보이는지? 그림으로 보이는 지? 19세기 중반의 조선과 청나라,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없었다. 추사가 설암의 게송을 쓰다가 상象자에 이르러 문득 이런 그림을 그리겠다는 발상을 한 것이다. 반면 ‘불이선란도’의 경우는 그림을 먼저 그리고 뒤에 글을 썼다. 추사는 갑자기 창작욕이 솟구쳐 난蘭을 그렸다. 그 뒤 난을 그리게 된 과정, 그린 방법, 그림을 제자에게 준다는 등의 이야기로 여백을 채우고, 십여 개나 되는 낙관을 찍었다. 마치고 보니 난과 글씨와 낙관이 여백과 상통하며 개별 문자의 형상을 해체하고 그림과 문자의 군집이라는 반추상 조형언어로 환치되어 있었다. 추사는 그 결과에 대단히 만족하여 “난을 그리지 않은지 20년 만에 뜻하지 않게 내면의 참모습이 드러났다. 문을 닫고 마음 깊은 곳을 찾아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의 불이선이구나(不作蘭花二十年偶然寫出性中天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라고 스스로 감탄하고 있다. 추사가 생각하는 글씨와 그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불이선란도’에 대한 해설을 더 들어보자. “화품으로 말하면 형태를 그린 것이 아니며, 화법을 따르는 것 자체를 꺼렸다. 필획은 예서 쓰는 법으로 했다”고 말한다. 추사 이전에도 ‘글씨와 그림은 근원이 같다’는 개념이 있었다. 추사는 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구체적 제작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추사는 불이선란도를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그리지 않고, 예서를 쓰듯 했다고 말한다. 제주도 유배지에서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난을 칠 때는 그리지 말고 예서를 쓰듯 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말이다. 글씨를 그리고 그림을 쓰는 것이야말로 문자추상의 전형적인 기법이다. 추사의 사의적서화개념은 한 세기 뒤에 파리에 등장한 설암 게송의 코끼리처럼 문자 이미지로 구성된 추상 작품과 불이선란도 풍의 쓰기와 드로잉을 결합한 추상 작품들과 궤를 같이한다. 추사는 불이선란도를 설명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문자추상의 시조임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추사의 작품에서 ‘시내 계’, ‘집 실’, ‘코끼리 상’자를 프린해서 한자를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글씨인지 그림인지 물었다. 반응은 대체로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부인이 화가라는 프랑스인 앙드레 까스딸랑은 파리의 화랑에서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국내에도 이응노, 남관을 비롯한 다수의 문자추상 화가들이 있고, 2016년에는 이응노미술관에서 문자추상전이 열리기도 했다. 문자 꼴라주와 한자, 한글, 알파벳, 갑골문자를 조형적으로 재구성해 추상이미지화한 이응노의 동양 문자추상과 프랑스 추상미술의 거장인 앙리 미쇼, 조르주 노엘의 서양 문자추상과의 연관성을 탐색한 전시였다. 앙리 미쇼와 조르주 노엘은 1950~60년대에 파리 폴 파게티 화랑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문자와 기호, 쓰기와 드로잉을 결합한 문자추상 작품으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화가들로서 모두 추사의 한 세기 후배들이다. 추사의 코끼리나 불이선란도가 문자추상 작품임이 분명할진대 그 시작이 칸딘스키보다 빠르다면 추상주의의 근원을 추사에서부터 풀어나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우연히 거꾸로 놓인 그림을 발견한 것과 글씨를 쓰다가 돌연 글씨대신 그림을 그려 넣은 행위의 무게 중심은 아무래도 후자로 기울지 않겠는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 발명의 공이 80년이나 늦은 구텐베르크에게 돌아갔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이 땅의 미술사가들이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해주실 것을 기대한다. 교회는 1992년에 코페르니쿠스를 복권시켰고, 그의 조국 폴란드는 2010년에 장례를 치러주었다. 사후 467년 만에. 유리 가가린이 우주에서 태양계의 행성인 지구의 위상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온 해로부터 따져도 49년 년 뒤의 일이다. 너무 늦기 전에 발상을 전환해 주시기를.
■두 한국인
세계 미술사에 기록될 두 명의 한국인을 찾는다면 문자추상의 시조인 추사와 비디오아트를 창안한 백남준일 것이다. 백남준은 해외에서 활동하며 스스로 자신의 위상을 확고히 정립했으므로 논외로 하자. 추사는 스물네 살에 북경에 다녀온 것이 외국행의 전부여서 제주도 유배시절에 ‘문자추상’을 창안하고도 이를 세상에 알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추사는 유학자, 불학자, 실학자, 금석학자, 정치가, 시인, 서예가이자 화가였다. 조선왕조 로열패밀리의 일원으로 당상관 벼슬을 역임했지만 정쟁의 와중에 두 번이나 유배를 가야 했고, 유배생활 중에도 청나라 학예가들로부터 끊임없이 신학문을 유입했으며, 벼루 10개의 밑창을 뚫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침이 심했던 삶의 노정에서 체득한 사고의 스펙트럼이 문자추상이라는 초유의 발상을 가능케 했으리라.
말년에 추사는 고흐의 자화상에 비견할만한 흐트러진 모습의 자화상을 그리고 머리에 “내가 나라고 해도 나이고, 아니라고 해도 나이다.”라고 썼다. 미술사가들 중에는 추사가 문자추상의 시조가 아니라거나 문자추상이 추상주의의 시초가 아니라고 하는 이도 있겠으나 아무도 코끼리를 그리고, 불이선란도를 쓴 것이 추사가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추사 사후 160년이 되었다. 그의 글씨 또는 그림들을 ‘괴’라는 감옥에서 석방하고 세계미술사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주자.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직 고개를 젓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전위음악가이자 세계 최초의 비디오아티스트인 백남준을 증언대에 모시고 딱 한 마디만 듣겠다. “예술은 고등사기다.”
오강석 / 200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추사 평전 『길에게 길을 묻다』 소설집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여행기 『아, 사하라』, 『다시 가 본 베트남』 사진집 『20세기의 증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