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소리
추석을 일주일 앞둔 때 뜬금없이 삼짇날과 중양절을 떠올려 본다. 음력은 대개 양력보다 한 달 정도 뒤늦게 따라온다. 예외적으로 윤달이 든 해는 추석과 설 명절이 양력과 시차가 조금 더 벌어질 수도 있다. 음력 3월 3일은 삼짇날로 대개 4월 5일 식목일 전후로 그때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왔다. 양력으로 시월 중순이면 음력 9월 9일 중양절 무렵 식구를 불린 제비들은 떠났다.
봄날이면 여느 집 가리지 않고 처마 밑에 제비가 진흙과 지푸라기를 물어와 둥지를 틀었다. 제비는 민가와 가까운 재실 기와집 처마 밑이나 높은 학교 지붕 밑에도 둥지를 틀었다. 한 쌍의 제비는 네댓 개 알을 품어 새끼를 까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새끼를 다 키우면 비좁은 둥지를 떠났다. 여름 내내 들판의 애벌레나 곤충을 잡아먹다 추위가 오기 전 어김없이 남쪽으로 떠났다.
지난날 그 많던 제비를 볼 수 없는지 오래다. 시골은 물론이고 도시 근교도 마찬가지다. 이맘때면 시골 전깃줄엔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제비가 새카맣게 줄지어 앉아 있을 때다. 제비는 고사하고 벼 낱알을 까먹어 대던 참새조차 보기 어려워졌다. 대신 덩치 큰 멧돼지가 시골은 물론 도심 주택가까지 출몰해 주민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그새 달라진 생태계 변화는 더 있다.
내 어릴 적 봄날이면 수많은 종다리가 보리밭에 둥지를 틀었다. 보리 잎줄기를 맞잡아 당겨 둥지를 트는 습성을 가진 종다리다. 보리밭에 둥지를 튼 종다리는 새끼를 까 식구를 불리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종다리가 보리이삭을 따 먹지는 않았다. 보리밭에 둥지를 틀어도 어디론가 날아가 새끼가 먹을 애벌레를 물어와 식구를 불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면 둥지에서 떠났다.
요즘 시골에선 대부분의 보리밭이 사라졌다. 아주 드물게 보긴 해도 농민들은 일손도 부족하고 수익성이 없기에 경작을 기피한다. 전북 김제 만경 들녘에선 보리를 심어 지평선 축제를 열기는 하나 아주 제한된 지역 행사에 그친다. 밀밭은 더 드물어 우리 밀은 구경하기 힘들다. 보리밭이나 밀밭이 없다보니 봄날이면 그렇게 조잘대고 날아오르던 텃새 종다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봄날이면 내 어릴 적 흔하게 본 처마 밑 제비였고 보리밭 종다리였다. 환경오염과 생태계 변화로 이들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선중기 문신 남구만이 남긴 시조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렀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은 언제 갈려 하느냐.”가 있다. 여기 나온 ‘노고지리’가 종다리로 달리 종달새로 불리는 우리 주변에 흔한 텃새였다.
제비와 노고지리가 둥지를 틀었던 건너편 계절이다. 이제 여름 한철 귀를 따갑게 울어댄 매미도 자취를 감추었다. 수컷매미는 몸통 양편 얇은 진동막에서 낮이나 밤이나 쉬지 않고 소리를 내었다. 몇날 며칠이고 진동막을 떨면서 빈 통을 증폭 공명시켜 암컷을 유혹하였다. 수컷매미 소리는 색소폰처럼 얇은 막이 떨리면서 생기는 진동음이다. 수컷은 연주자고 암컷은 감상자다.
그렇게 뜨거웠던 뙤약볕도 수그러졌다. 처서와 백로가 지나고 추석이 가까워진다. 추분이 지나면 한로다. 도심에 살지만 가을이 이슥해짐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귀뚜라미소리다. 요즘 귀뚜라미는 그 울음소리가 더 세차고 또렷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콘크리트 벽면 틈새에서도 밤새도록 울어댄다. 귀뚜라미는 낮에는 숨죽여 지내다 밤이 되면 옥타브가 높아진다.
요즘 저녁 식후 반송공원으로 나가면 귀뚜라미소리가 청아하다. 창원천변 산책로나 교통문화연수원 주변이다. 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 가는 길에서도 들린다. 의창도서관 뒤 솔숲이나 용지호숫가 산책길도 마찬가지다. 수컷은 자신의 몸통에 날개를 비벼 바이올린 켜듯 소리를 낸다. 암컷은 음치지만 청음 능력은 대단해 건강하고 멋진 녀석을 고르려고 풀숲에서 숨죽여 귀 기울인다. 13.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