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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지 중 한 곳인 변산 부안 내소사를 향해 간다. 내가 가려는 내소사는 변산반도 안 쪽 내변산 자락에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 땅에 변산이라는 산이 있어 변한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옛 삼한 가운데 하나였던 변한의 이름은 바로 이 변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이중환이 쓴 <택리지>는 "노령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와서 서해 가운데에 쑥 들어갔다. 서남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산 안에는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라고 적고 있다. 부안 변산반도는 그렇게 호남정맥에서 갈라져나온 하나의 산줄기가 서해로 튕겨 나온 듯한 지세로 반도의 서쪽 변방을 지키고 있다. 그 안쪽을 내변산이라 부르고 바깥쪽을 외변산이라 부른다. 이중환도 부안을 땅이 비옥하고 경치가 좋아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고 했지만 조선 중기의 풍수학자인 남사고 역시 부안의 변산을 십승지지의 하나로 보았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봉우리들이 백여 리를 빙 둘러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쌓이고, 바위와 골짜기가 깊숙하여 궁실과 배의 재목은 고려 때부터 모두 여기(변산)에서 얻어갔다"고 하였다.
![]() 부안은 앞치마처럼 두르고 있는 너른 들판, 적당히 높은 산과 바다가 오손도손 등을 기대고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최근 이 산과 들과 바다가 누리던 오랜 평화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인간의 탐욕은 이 평화를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새만금 방조제를 쌓으므로써 이곳의 산과 들과 바다를 갈등이 내연하는 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점심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간에 부안읍에 닿았다. 읍내를 지나쳐 곧장 30번 국도로 들어섰다. 멀리 새만금 방조제가 바라다 보인다. 그러나 무심한 자동차는 그저 제 갈길을 가느라 분주할 뿐이다. 자동차가 지닌 미덕 가운데 하나는 헛눈을 팔지 않는다는 점이다. 해안일주도로를 따라간다. 해창 쉼터를 지나고 변산 해수욕장을 지나서 숨가쁘게 달려가다가 문득 하나의 표지석에 눈길이 머문다. 월명암. 저녁놀이 아름답다는 절집이다. 내소사 가는 길을 잠시 접고 이곳부터 들르기로 한다.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 또한 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별미가 아니던가. 남여치에서 차를 내려 쌍선봉을 바라보고 산을 올라간다. 월명암은 변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쌍선봉(雙仙峰:498m) 턱 아래에 있다. ![]() 올망졸망한 추억을 매달고 핀 정금나무 꽃 산길을 걷다가 낯 익은 나무들을 발견하고 발길을 멈춘다. 진달래과에 속하는 정금나무다. 그러고 보니 산 길섶이 온통 정금나무 천지다. 마침 나무들은 작은 종모양의 앙증맞은 꽃을 주저리 주저리 달고 서 있다. 정금나무 꽃들을 바라보노라니 내 마음은 어느덧 코 흘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난 한몫 단단히 하는 나뭇꾼이었다. 학교가 파하고나면 5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여름에는 퇴비를 장만하기 위해 풀을 베오고, 가을이나 겨울에는 땔나무를 하러 가야했다. 가을에는 소나무 밑에 수북히 떨어진 잎들을 갈퀴로 긁어 가리나무 짐을 져내려야 했고, 눈 내린 겨울에는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마른 삭정이를 베어 한 동으로 묶어 지게에 지고 눈덮힌 산길을 넘어지고 미끄러지면서 내려오곤 했다. 마땅하게 땔나무 할만한 나무가 없는 봄철에는 할 수 없이 무겁디 무거운 생솔가지를 묶어 내려오기도 했다. 그럴 때 등에 진 나뭇짐이 무거워 기다시피 산길을 내려와야 했다. 그때 산에서 만나는 가장 흔한 나무가 정금나무였다. 봄에는 종같이 생긴 꽃을 따 쪽쪽 빨아먹으면 달착지근한 맛이 났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정금 열매를 따먹을 때면 약간 새콤하면서도 달았다. 한 개 한 개 열매를 따먹다가 지치면 가지 채 통 째로 베어서 나뭇단 속에 꽂고 돌아와 쪽마루에 걸터앉아 따먹기도 했다. 정금나무는 그렇게 내 어린시절의 으뜸가는 주전부리였다. 정금나무 어린 잎은 봄에도 약간 붉은 빛이 도는데 가을철이면 더욱 짙은 적색으로 변한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6-8mm 정도이며 백분으로 덮이며 9월에 흑자색으로 익는다. 꽃은 6-7월에 피고 새가지 끝에 총상으로 달려 처지며 나무의 높이는 2-3m에 이른다. 충남 부여 이남의 높지도 낮지도 앉은 산기슭에서 자생한다. 길이 너무 넓으면 아늑한 맛을 잃기 십상이다. 그러나 쌍선봉으로 으로는 산길은 호젓해서 마음이 덩달아 침잠해진다. 걷기에 호락호락한 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파른 길도 아니다. 싱그러운 풀냄새가 앞장서 걷고 나는 그저 걸음만 걸음만 뒤따라갈 뿐이다. 정금나무 꽃을 바라보며 이 길 끝까지 가면 아름다운 그 시절에 가 닿을 수 있을까.
![]() ![]() 허공의 달처럼 쌍선봉에 걸린 암자 월명암 마침내 월명암에 도착했다. 월명암은 해발 400여 미터 정도의 높이에 쌍선봉에 걸린 달처럼 둥실 떠 있었다. 400년 전 부안의 기생 이매창은 '월명암에 올라서'라는 한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築蘭若倚半空(축란약의반공) 하늘에 기대어 절간을 지었기에 一聲淸磬徹蒼穹 (일성청경철창궁)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었네 (후략) _ 이매창 한시 「登月明庵」일부 추측컨대 매창이 살았던 그 시대에 이곳까지 올라온다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창은 '하늘에 기대어 절을 지었다'고 감탄했으리라. 매창이 월명암에 올라 시를 짓던 계절은 어느 계절이었을까. 그의 애인이었던 유희경과 동행했을까, 아니면 혼자 왔을까. 부설거사와 <팔죽시> 월명암은 신라 신문왕 12년(692) 부설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가 중건했다. 월명암을 개창한 부설거사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은 ‘부설전’이라는 고소설에 상세히 전해진다. 경주에서 출생한 부설은 법우인 영조, ·영희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나 변산(엣이름은 능가산)에 들어서 묘적암을 세우고 수도에만 정진했다. 후제 이들은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오대산으로 길을 떠나는데, 부설원(정읍군 칠보면)에 이르렀을 때 부설은 묘화라는 아가씨를 만난게 된다. 이 운명적 만남을 뿌리치지 못한 부설은 결혼을 하고 환속하게 된다. 부설거사는 아들 등운과 월명이란 딸을 두었는데 말년이 되자 변산에 등운암과 과 월명암이란 두 암자를 지어서 하나씩 맡겼다. 겉으로 보면 부설과 묘화 부부는 여느 속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수도승보다 더 치열하게 수도에 정진했다. 그 결과 부설거사는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에 들었다" 는 <유마힐 소설경>으로 널리 알려진 인도의 유마힐 거사, 중국의 방거사 등과 더불어 3대거사로 일컬어진다. 월명암을 중건한 진묵대사도 많은 이적을 남겼다. 진묵은 조선 중기 호남의 대표적인 선승이었는데, 어느 날 탁발을 나갔다가 매운탕 한 솥을 얻어 마셨다. 그런 다음 진묵은 물가에 가서 토해냈는데 탕 속에 들어 있던 죽은 물고기들이 전부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 월명암의 낙조가 아름답다지만 갈 길 바쁜 나그네의 허리춤을 붙들어매지는 못하는 법이다. 오던 길을 되돌아 다시 남여치로 향한다. 오르막 길에서 수종이 다른 두 나무가 합쳐진 연리목을 만났다. 가지가 합쳐지면 연리지요, 줄기가 합쳐지면 연리목이다. 저 연리목이 혹 부설거사와 묘화 아가씨의 화신은 아닐런지. 너를 따라 묻히고 싶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열 길 땅속에 들 한 길 사람 속에 들어 너를 따라 들어 외롭던 꼬리뼈와 어깨뼈에서 흰 꽃가루가 피어날 즈음이면 말갛게 일어나 너를 위해 한 아궁이를 지펴 밥 냄새를 피우고 그믈은 달빛 한 동이에 삼베옷을 빨고 한 종지 치자 향으로 몸단장을 하고 살을 벗은 네 왼팔뼈를 베개 삼아 아직 따뜻한 네 그림자를 이불 삼아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오래된 잠을 자고 싶어 남아도는 네 슬픔과 내 슬픔이 한 그루 된 연리지 첫 움으로 피어날 때까지 그렇게 한없이 누워 정끝별 시 '연리지' 전문 내 가을에 다시 여기에 오리라. 그리고 정금나무 까만 열매를 따먹으며 낙조대에 올라 불타는 저녁놀을 바라보리라. 헛된 다짐을 남기고 남여치로 가는 길을 서두른다. 내가 넘어간 길을 곧 쌍선봉 넘어가는 태양이 뒤따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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