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태실이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산 2번지, 명봉사 뒷산에서 발견되었다.
지난해 가을 예천군이 발굴한 사도세자의 태실지는 현재 파란색의 비닐 거적으로 덮여 있다.
예천군 상리면 도촌리에서 충북 단양을 잇는 927번 도로를 따라 명봉리 산 2번지에 이르면 신라고찰 명봉사의 일주문이 한적한 길을 지킨다.
겨울이라 더 좁아진 계곡과 잎을 떨군 나목들이 산사의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일주문에서 북쪽 명봉산 방향으로 1㎞ 정도 오르면 마치 한 마리의 봉황이 깃을 내리고 둥지에 앉은 듯한 무량수전을 만난다.
무량수전에서 다시 오른쪽 내원암 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서면 이내 깊숙한 외길을 만난다.
외길은 이내 가파른 산세로 이어지며 부드러운 토질의 작은 산봉우리에 이른다.
무량수전에서 5~600m 남짓한 거리다.
◆ 명봉산 자락에 남은 경모궁 태실터
소백산맥의 한 봉우리인 원각봉(965m)에서 남쪽으로 뻗은 지맥에 형성된 명봉산, 명봉산 자락에 마치 분봉처럼 4면이 모두 경사진 산봉우리(621m)에 사도세자의 태실이 자리 잡고 있다.
널찍한 광주리 한가운데 원뿔모양의 돌 하나를 얹어 놓은 듯한 형상이 모체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세상에 나온 문과 같다 할까. 용이 솟아오르는 형국의 산세라고 말할까. 산봉우리 정상에 서서 등을 명봉산으로 돌리면 앞뒤 좌우의 산들이 큼직한 울타리처럼 푸근하게 감싸 안아주면서 시원스럽다.
분명히 산이지만 정상은 평평한 마당 같다.
동행한 예천군 학예사 이재완씨가 거적을 걷어 보이면서 ‘경모궁 태실지’라고 일러준다.
사도세자의 탯줄이 묻힌 태봉이다.
소백산이 태백산을 만나 궁합을 이루어내는 산경, 양백지역의 품 넓은 산자락에는 길지가 많기로 알려져 있다.
그 산자락, 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명봉산이 명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남쪽으로 넉넉하게 뻗어내리는 끝단에 명봉사가 있고 중간에 볼록 솟아오른 작은 산봉우리가 사도세자의 태실이다.
또한 태실에서 같은 지맥을 따라 남쪽 명봉사 방향으로 100m 지점에 이르면 문종대왕(세종의 맏아들)의 탯줄이 묻혀 있었던 곳이 나온다.
명봉산 태실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는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에서 1735년(영조11년)년 정월에 태어나 불꽃 같은 삶을 살다 영면했다.
사도세자는 두 살 때 세자로 책봉되고 열다섯이 되자 연로한 부왕을 대신하여 13년 동안이나 왕좌를 지키지만 신은 그에게 제왕적 역량을 다 펼쳐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당쟁의 소용돌이에 28세의 꽃다운 목숨을 내놓게 된 슬픈 이야기의 왕세자가 되고 만 것이다.
첫 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오랫동안 우울함을 벗어나지 못하던 영조는 42세의 늦은 나이에 사도세자를 얻자 왕의 기쁨은 오롯이 그에게 옮겨졌다.
세자에 대한 사랑과 기대감이 컸던 만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난 사도세자를 위하여 영조는 스스로 찬시를 짓고 새긴 집복헌 유감시 현판을 만들어 걸기도 한다.
원문을 의역해 본다.
‘집이여, 작은 나라가 되리니
서기어린 큰 기운 곳곳에서 멀리 퍼지는구나
문 안으로 비춰드는 햇살에 서로를 축하하니
집복당이여, 비로소 그 이름과 상응하는구나‘
사도세자는 영민하게 태어나고 태 또한 명당에 모셔졌건만 그 비운의 실마리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태실도 그의 생애만큼이나 수난에 수난을 거듭하다 이제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사도세자의 호칭은 영조가 붙인 ‘사도세자’ 이외에도 신주를 모신 사당의 이름을 따서 불린 경모궁과 추존한 시
호 장헌이 있다.
정조의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다 1899년 고종 때에 장조, 장종으로 다시 추존되었다.
◆ 태실비가 명봉사 사적비로 둔갑
사도세자는 정월에 태어났으나 태는 석 달 뒤인 4월에 묻힌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아들 정조(1785년·정조9년)가 ‘경모궁태실’ 비를 비롯한 석물을 가봉하였고 장조태봉도까지 그려둔다.
이후 1930년, 일제는 우리나라 전역의 태실을 발굴하고 태가 든 태 항아리를 서삼릉으로 옮겨 통합 관리하기에 이른다.
경모궁 태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도세자의 태실에는 태실비 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이씨 왕조도 존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더군다나 태실이 이관된 상황이었으니 경모궁 태실은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 밖으로부터 멀어지고 방치되면서 주변의 산과 다름 없이 변모해 버린 것이다.
인적이 드문 심산유곡에 내버려진 태실비를 어느 날 명봉사 관계자들이 좋은 석질을 아껴 재활용하게 된다.
지난 1940년 태실 남쪽 200여 미터 아래에 위치한 명봉사로 옮겨진 태실비는 명봉사 사적비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명봉사 무량수전 옆에는 오래된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인 문종대왕 태실비이고 나머지 하나가 명봉사 사적비이다.
사적비의 전면은 ‘소백산명봉사사적비명’이라 새겨져 있고 배면에는 건립연대로 보이는 ‘소화십오년경진오월일퇴정사 불기이천구백육십칠년창사후일천영육십육년야’를 각석하고 있다.
명봉사 사적비는 거북형상의 대석과 우상석, 균형잡힌 비신과 용무늬를 새긴 개첨석(머릿돌)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석질과 빛깔이 부드러운 화강암석으로 되어 있으며 다듬어낸 모양이 준수하다.
대석의 거북머리 위에는 왕자를 선명하게 음각하고 몸체의 삼면에는 사람인을 양각하고 있다.
거북의 뒤는 문고리 문양이 연결되도록 양각한 긴 거북꼬리가 인상적이다.
비의 전체 높이는 2.4m 정도이다.
얼른 보아 눈에 띄는 것이 비면의 색깔로 옆에 위치한 문종대왕 태실비와 견주어 보면 사적비가 훨씬 희고 부드러워 보인다.
쓰다듬어 보면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매끄럽다.
정날로 정교하게 쪼은 것과 다르게 기계로 깎고 밀은 매끈한 느낌을 갖는다.
대석과 비신과 개첨석이 모두 같은 돌인데도 비신의 표면이 유독 반질거리는 것으로 보아 불과 수십 년 내에 누군가가 손을 댄 것으로 감지된다.
또한 비신의 윗부분을 둘러쓴 개첨석 밑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깎아 낸 흔적이 선명하다.
이렇게 사도세자의 태실비석은 비면에 새겨진 글을 따라 명봉사의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태를 묻고 복을 기다리다
민가에서는 주로 태를 태워서 처리하는 소태 풍습이 이어져 왔다.
더러는 깨끗이 말려서(건태) 버리거나 물에 침수시켜 없애는 수중태의 처리 방식도 있다.
신생아의 몸을 뒤따라 나온 태는 조심스럽게 잘려져 맑은 빛이 감도는 비단에 받아 양지바른 마당 가운데로 옮긴다.
마당에는 미리 준비해 둔 황금빛 왕겨더미가 기다리고 있다.
비단으로 감싸진 태가 갓 찧어 낸 왕겨더미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져 불을 지피면 태가 서서히 타들어간다.
왕겻불은 미열을 뿜어내면서 서너 시간 천천히 태를 태운다.
타고 남은 회빛 잿가루를 쓸어담은 아낙은 집 앞 개울의 가장 윗목에서 재를 헹궈 떠내려 보낸다.
그렇게 태운 태재를 맑은 물에 띄워 보내면서 아기의 건강한 성장과 총명을 축원하고 다산을 빌었다.
이와는 비교해 왕실이나 상류층은 태를 태 항아리에 넣어 매장하는 장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소태나 건태에 비하여 장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가 요구된다.
태를 묻을 길지를 찾아내야 하고 안태에 필요한 의례는 물론 석함과 태항아리, 태지석 등의 소품을 정성껏 마련해야 한다.
또한 태를 묻고 난 다음에는 옥신과 난간석 등 석물을 설치하여야 하고 태의 주인공이 세자가 된다거나 왕에 오르게 되면 태실의 품격을 높이는 태실 정비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마치 후손들이 잘되면 조상을 추증하여 품계를 높이는 문화가 있듯이 태 본인의 신분이 변화함에 따라 태를 관리하는 격조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고유히 내려오는 문화적 관습으로 우리 민족은 육신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절대윤리를 가졌다.
수도승들은 입산하여 처음 자르는 머리카락을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신체 일부로 여긴 것이다.
탯줄 또한 타고난 육신의 한 부분이기에 손상치 않는 것이 근본이라고 여겼다.
생명선인 태는 모체와 새로운 생명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탯줄을 떼야 비로소 독립된 개체의 생명체가 되는 것이다.
가교이자 육신의 한 부분인 태를 신성하게 여긴 나머지 명당을 찾아 태를 묻고 그 태의 주인공에게 발복하도록 기원하여 온 것이다.
이러한 탯줄에 대한 매장 습속은 동양에서도 보기 드문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음택은 후손이 조상의 주검을 묻고 후대에 발복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면 태실은 양택이다.
부모가 태를 묻고 태의 주인공에게 발복토록 기원해 주는 것이다.
1봉 1실의 장태 문화는 예천 땅을 귀하게 여기는가 보다.
예천에는 250여 년이 지나도록 회자되는 비운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태실과 문종대왕 태실, 용문산 주변의 태실 등 다섯 곳의 태실 터가 있다.
경모궁태실터를 중심으로 일련의 태실이야기가 새롭게 조명된다면 사도세자는 비록 단명하였지만 이야기를 지닌 왕자로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