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빗줄기는 제법 굵었다. 며칠동안 불편하고 심약한 마음이 더 내려앉는 듯 했다. 내안의 통증은 늘 그랬다. 미지근한 원인들과 뚜렷한 해결도 없는 것들로 늘 상처받는다는 느낌...그래서 혼자 곧잘 침울해지고 무언가 자꾸 놓아버리고 싶은, 일종의 페시미즘의 휴유증을 자주 앓곤 하는것이다.
비는 오후가 되어도 그칠줄 모르고 내렸다. 창문에 부딪치는 비의 음파는 그대로 마음 깊숙히 끊임없는 파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 파문은 물음표대신 내멋대로 결론내리고 만 못나고 불안전한 수많은 느낌표의 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까지 연소되지 못하고 꺼져버린 생나무의 매운 연기처럼 아려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온종일 비가 내리는 날이면 더욱.
그때 문자 하나가 떴다. '어떻게 지내니' 화곡동 친구었다. 몇 번 만나자고 그동안 문자가 서 너번 왔는데도 나는 나의 변함없는 계절의 연인과, 더 없이 하찮은 일들에 얽매이다 보니 매 번 약속을 못하고 지내온 터였다. 그러기전, 사실 이렇게 비가 오는날에는 속수무책으로 어딘가에 눌러앉아 뜻없는 술이라도 마셨으면 했다. 그 무료하고 멀뚱멀뚱 맑은 날들에 대한 참 해괴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
오늘따라 버스가 오래오래 돌아갔으면 했다. 차들이 물밀듯이 밀려 천천히 천천히 갔으면 했다. 달이 겨울나무의 우듬지를 한참씩 생각에 잠기다 지나가는 것처럼...도착지가 더 멀리 있었으면 했다. 비감옥에 묻혀 온전히 쓸쓸한 꿈결에 있었으면 했다. 빗줄기는 점점 사선으로 눕고 끌어당기듯 그녀의 집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를 불안케 했던 며칠전의 일들이 빨판처럼 나에게 달라붙어 생각의 늪속에서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불현듯 우두컨한 생각 하나에 사로잡히고 말았다.'사랑은 감기기운'같은거라고...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도 그집, 그러니까 내 친구가 좋아하는 족발집에는 사람들이 몇몇 줄지어 서 있었다. 적당한 양을 골라 사고 소주도 샀다. 그녀의 골방을 생각하며... 가게 뒷편에 한 평남짓한 골방은 나에게는 지상에서 몇 안되는 더 없이 친절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작은 티브이와 역시 작은 냉장고 오랜친구를 닮은 라디오와 앉은뱅이 탁자...그리고 무엇보다 커피포트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이다.
손님이 있었다. 나는 곧장 그녀의 골방으로 들어가 종이컵을 꺼내 술을 따랐다. 그리고 한 잔 마시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손님은 의외로 말이 많았다. 다시 두 잔을 비울즈음 그녀가 돌아와 화들짝 웃는다. 친구는 잘 웃는다. 우울하다면서도 나보다 더 잘 웃는다. 온종일 가게에 있다보면 정말 미칠것 같다고 나에게 하소연하면서도 정작 만나면 나보다 더 평온하고 온화한 표정으로 함빡 웃음을 보여주곤한다. 행복했다. 때때로 거칠게 뻗어 자라나는 나의 페시미즘이 그녀로 하여금 치유제를 바른듯 잠시 멈추곤 하는것이다. 그렇게 저물녁 어둠침한 골방에서 술잔을 나누는데 나처럼 흔들리는 여자 하나 더 있다고 전화가 왔다. 그렇게 셋이서 빗줄기만큼이나 수다를 떨고 노래방을 향해 갔다. 문화일까? 나는 노래방에 갈때마다 '문화일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고보면 나도 좀 피곤한 스타일의 여자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난 노래를 못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감정을 최대한 살려서 성심성의껏 부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래면서 이내 웃음도 피식 나오는 것이다. 두 친구가 살려놓은 분위기를 고의반 타의반 쿡쿡 눌렀다. 다른것도 그렇지만 우리셋은 늘 궁짝이 잘 맞다. 항상 좋은쪽으로 결론을 맺고, 더군다나 두 친구는 나보다 훨씬 건전하고 성실한 친구들인데도, 엉뚱하고 다소 괴짜성향 기질이 있는 내 기분을 십분 헤아려져준다는 것에 대해 나는 눈물나게 고마운 것이다.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불렀던가. 모든것은 언젠가는 떠난다고 생각하면 특별히 슬플일도 아니건만...떠난다는 것은 다른 길목에서보자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이겠지만, 한용운님의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라는 구절을 읽을때마다 가슴 한 쪽이 움푹 페이는 듯한 통증을 앓는것을 보면 이론과 실체의 거리는 너무 멀다는 생각만 든다.
나는 때때로 흔들린다. 수많은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듯. 갈대가 바람결에 쉼없이 흔들리는 것은 꺾이지 않기위함이라고 누군가가 그랬던가. 흔들림으로 더 굳건한 대지의 약속을 나는 믿고 싶은 것일까. 흔들림으로 나 아직 그대의 젊은 연인은 아닐까하는, 흔들림으로 그대에게 기댈 수 있는 푸르디 푸른 초하, 그 연두빛 그늘은 아닐까하는, 그래 흔들린다는 것은 아직 내게 그리운 것들이 많다는 것이리라. 그렇게 흔들리는 오후를 보내고 돌아올즈음 비는 멈췄다. 불빛사이로 젖은 도로가 번뜩이며 흐르는 커다란 강물같았다.
2009.6.20
첫댓글 서지숙님의 고독한 성향이 이리 좋은 글을 낳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같기도, 시 같기도 한 글, 이런 글이 정말 좋은 수필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주자주 좀 올려주세요, 제 블로그로 모셔 갑니다.
너무 과찬이세요........뵌지가 꽤 되었는데 잘 지내시죠?! 언제 좋은날 뵙고 싶네요. 댓글 감사드리며 모란님의 차분한 수필선 항상 기대하며 잘 읽겠습니다.
비가오면 인간은 서정적인 또다른 영혼이 된다고 하지요 ... 과연 중년의 고갯을 넘어간 여인의 그 흔들림은 얼마나 진동이 갈햐ㅏㄹ까 ... 우습잖은 생각을 해보지만 표현할 수 없는 고개 끄덕임 .. 참으로 오랜만에 빗물에 젖은 철지난 낙엽잎이 호소하는 듯한 침묵의 속삼임 가슴에 잘 담아 봅니다 ^^*
로버트 프로스트는 ' 가슴이 뭉클하고 뭔가 뜨거운것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를때 글을 쓴다'라고 했답니다. 저는 흐린날이나 비오는 날이 좀 그런것 같아요. 말씀처럼 누구나 서정적인 면면들이 저처럼 그런가 봅니다. 어쩌면 서로상맥하는 뜻이기도 한 것 같아요. 비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나면 순수해지는 마음들이 되는걸 보면........그래서 뭉클해지고 목울대가 먹먹해지겠죠^^ 댓글 감사합니다.
계속 흔들거림으로 사는 나에게는 큰 위안이되는 글입니다 도시의 커다란 강물속에서 세월을 마시고 싶은 날이네요 비오는 날 곡주 한잔 합시다 ~~건강하시구요
비 오는 날이면 술맛이 더........^^ 감사합니다.
정작 흔들리지 않는 건 바람 뿐, 나도 이 순간 족발 먹고 싶은 생각에 흔들리고 있다오 흔들리지 않는 것 죽은 사람 뿐
네 흔들리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것이 아닐거에요. 7월도 아름다우시길...........
비가오는 日曜日에 등산도 못가고 시간이 자유로와 들린곳 ... 美貌길래 흔들리는 午後가 되엇을듯 싶네요 .. 오늘 소주 한잔이 생각나네
감사합니다 비룡님...우기라 산행은 당분간 삼가해야할 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간결체로 수필을 잘 쓰시는군요. 이야기를 이끌어가시는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시적이고 사색하시는 분위기가 펄학적이기도 하네요,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마음의 소리를 잘 감상했습니다.
선생님의 과분한 댓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감사드리며 雨中에도 두루 평안하시고 건안하시길 빕니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