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토굴에서 해인사까지
1987년 그해 겨울,
운수행각을 마친 나는
낯선 역사에서 지리산 토굴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긴 만행에 지친 탓도 있었지만,
그즈음 나의 영혼은 마치
오랜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지고,
마른풀 더미가 바람에 날려
다니는 듯이
황폐해져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리산 토굴을
떠나온 지
한 달쯤이나 되었을까?
토굴 선실에서
좌선에 들어 있던
나는
용수철이 튕겨 나오듯
문을 박차고
나와 밤기차를 탔었다
출가할 때부터 혼자만의
고요한 수행처를 꿈꿔 왔던
내게 수계는 날개를 달아 주었고.
만행 다니다 보아 두었던 움막은
어설픈 용맹심으로 가득 찬
'햇중'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계를 받고 보름 만에
행각을 시작할 만큼
방랑벽이 심했던 나는,
제도화된 교육은
애초 받을 생각도 없이
바로 하동의 지리산 자락
토굴에서 참선공부를 시작했다.
말이 토굴이지 산 속에
버려진 허름한 밤 저장창고였다.
그 토굴에서의 첫 밤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미장도 하지 않은 구멍이
숭숭 난 블록 담 중간에
조그마한 창이 하나 있었다.
그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한 폭의 밤 하늘 풍경은..
아!
생애 처음으로 나만의 회상에서
좌복을 깔고 앉았으니
그 감동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온 천하가 내 것이었고,
날이 밝기도 전에
도를 통할 것 같았다.
온 밤을 성성하게 정진한 후
멀리 첩첩한 산봉우리로
떠오르는 일출을 맞이하니.
고뇌하며 방황했던
지난날들을
모두 보상 받는 느낌이었다.
토굴 살림살이는 간단했다.
그야말로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필요한 도구들만 준비했다.
석유풍로 하나, 쌀 한 자루,
냄비 하나. 수저 한 벌,
김치 한 통
간장과 된장
작은 단지에 하나씩.
좌복 하나가 전부였다.
밥은 한 냄비 해놓았다가
배가 고파 도저히
앉아 있을 힘이 없어지면
그때 몇 숟갈 퍼먹었다.
어떤 때는 밥 한 냄비로
일주일을 먹은 적도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밥 위에 간장 한 숟갈 뿌려서,
오직 살아 남아
도를 이루기 위해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힘이 들고 서러운 생각이 들면
행자 시절 가마솥 앞에서,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외우던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을
큰 소리로 독송했다.
그러면
어느새 신심이
충만해져 기운이 펄펄 났다.
특히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혼자 감동해서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조향암혈(助響巖穴)로
위염불당(爲念佛堂)하고
애명압조(哀鳴鴨鳥)로
위환심우(爲歡心友)니라.
배슬(排膝)이 여빙(如氷)이라도
무연화심(無戀火心)하며
아장(餓腸)이 여절(如切)이라도
무구식염(無求食念)이니라.
홀지백년(忽至百年)이어늘
운하불학(云何不學)이며
일생(一生)이 기하(幾何)관대
불수방일(不修放逸)하겠는가
소리 울리는 바위굴로 염불당을 삼고.
구슬피 우는 기러기 떼는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벗으로 삼을지니라.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을지라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굶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 하여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하나니
홀연히 백년에 이르거늘
어찌하여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가 되는데
수행하지 않고 게으르단 말인가?
그렇게
시작한 토굴 생활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맨손으로 시작한
살림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조금씩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만큼
마음에 틈이 생긴 것이었다.
'한 자루의 쌀이 떨어지기 전에
불도를 이루리라' 하는
굳센 마음으로 시작했던
정진은 생각대로 잘 되질 않았다.
쌀이 떨어진 지 사흘 만에
결국 자존심을 접고
전장에서 패한
병사처럼 휘청거리며
걸망을 메고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했다.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들어오는
열 가구도 채 안 되는
촌락인데 인심은 참 좋았다.
소문은 언제 났는지
쌀이며 김치. 된장 등을 퍼 주며,
''대사님, 공부 열심히 해서
빨리 도통 하이소."라며
격려까지 해 주었다.
어떤 때는 토굴 문 앞에
쌀이며 반찬을
몰래 갖다 놓는 사람도 있었다.
삭발도 하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있으니,
어느 날은 파출소에서
누가
수상한 사람이라고
신고를 했다며
신분 조사를
하러 온 적도 있었다.
그러나
토굴생활을 시작할 때
'이 자리에서
공부하다가 죽어 버려야지' 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갔기에
그런 생활들이 전혀
불편하지 않고
행복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온몸을 던져 정진하였으나
두 번째 겨울을 지날 즈음
나는 차층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초발심의 그 사무치던
신심도 점점 퇴색되어 갔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공부가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지
거꾸로 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상기가 되어 아픈 머리는
토굴 바닥에서 뒹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온 산을 쏘다니기도 했다.
그대로
있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떠나기로 했다.
늘
그랬듯이 떠난다는 것은
내게 자유를 의미했다.
그렇게 떠돌기를 한 달.
뭔가 정리가
되는 듯하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윽고 기차가 들어왔다.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어디쯤 왔을까.
뒤척이며
창밖을 내다보려는데.
''스님. 이거 박카스
하나 드세요."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앞 자리에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이
나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야 한 겨울에다
찢어진 광목 옷 한 벌로
한 달여 동안 행각을 했으니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할머니나 드세요."
겨우 대답을 하고
다시 눈을 붙이려는데,
''아이구, 젊은 스님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습니까?" 하며
다시 말을 붙였다.
순간 어떤 느낌이랄까,
할머니를 찬찬히 바라 보니
예삿분이 아닌 것 같았다.
건네주는 음료수를 받아 마시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으니 진주까지 간다고 하셨다.
자기는 젊어서 과부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부처님 가피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며.
오랫동안 재가 불자들이 수행하는
선방에 다니면서
참선 공부도 해 왔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토굴살이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공부이야기로 이어졌다.
가만히 경청하던
보살님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님, 제가 감히 스님께
공부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선방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스님들을 지켜보니,
스님같이 계 받고 바로
토굴에 가서 공부하는 스님네 치고
제대로 공부하는 스님을 못 봤습니다.
토굴 공부는
대중처소에서
웬만큼 힘을 얻은 뒤
혼자서 더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싶을 때
선지식의
점검을 받아가며 할 일이지.
스님처럼 막 출가한 스님은
법도가 엄한 대중처소에 가서
그 속에서 부대끼고 하심하며
인욕행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보살이 주제넘게 드리는
말씀이지만
잘 새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처음 보는
아들 또래의 스님 앞에서
차근차근
나를 설득시켜
나가는 보살님을 보며.
문득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인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전율하며 법문(?)을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머 릿속에서는
벌써 힘겨웠던
토굴생활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그 보살님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스님,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성불하세요."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밤기차는 내 긴 방황을
끝내려는 듯 하동역에 도착했다.
그날,
밤기차 속에서
만난 노 보살님은
출가 뒤
방황하던 내 공부 길을
올바로
잡아준 선지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마음이 느슨해지면
그 보살님의 눈빛을
생각하며 경책을 삼고 있다.
지금 그 보살님은
어느 회상에서
정진하고 계시는지,
아직 살아 계신지 궁금하다.
결국
어설픈 신심으로 시작했던
1년 반 동안의 토굴생활은
이듬해 해인사승가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끝이 났다.
산문 밖에서는 온 나라가
88서울올림픽
열기로 떠들썩하던 때였다.
몸이 많이 상해 있던
나는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이왕
대중처소에 가서 공부를 하려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도인으로
소문난 성철스님이
계시는 해인사로 가자.
그리고 그 힘들다는
해인사승가대학에 가서
어디 한번
제대로 공부해 보자'라는
생각에 해인사로 결정했다.
사실 출가인연이
병고로 시작되어 투병 중이었던
나는 백여 명의 학인들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짜여 움직이는
단체생활을
하기에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2학년 사집반 시절이었다.
해인사는 새벽예불 후에
꼭 108 대참회문을 외며 절을 하는데.
절을 하는 중간에
왼쪽 무릎이
''뚝!" 하며 심한 통증이 왔다.
대중이 다 같이 하는 엄숙한
예불 시간이라 빠지지도 못하고
절뚝거리며 겨우 절을 마치고
궁현당 큰방으로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무릎이 붓고 아프기 시작했다.
간병실에서
며칠 쉬어도 차도가 없었다.
결국
대구 불교한방병원으로
치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
좋다는 약은 다 먹어보고
별별 치료를 다 받아
봤지만 큰 차도가 없었다.
심할 때는 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기도 힘들어,
거의 한 철 동안 후원에서
상공양을 한 적도 있었다.
몇 번이나
걸망을 쌀까도 생각 했었지만,
그때마다
지리산 토굴시절을
회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힘들게 지내던 어느 날
작정을 하고 장경각 법보전
부처님께 참배를 갔다.
그리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온몸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지극한 마음으로 108배를 올렸다.
무릎을 다친 후
처음으로 많은 절을 한 것이다.
''부처님이시여.
이 병고를 잘 견뎌서
해인사승가대학
졸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애불에 다시 한 번
꼭 참배할 수 있기를 발원하옵니다.
부디 가피를 주옵소서''
땀과 눈물로
범벅된 기도를 마치고 나니
나의 지난 업장이다
소멸되는 듯 환희심으로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 후 몸을
무리하지 않게 정진하고.
또한 도반들의 배려와
도움으로 건강도
차즘 회복되어 갔다.
4학년 대교반 가을,
나는
드디어 가야산 중턱에 있는
마애불을 거의
기다시피해서 참배를 했다.
부처님께서
나의 발원을 들어준 것이다.
가장 힘들었지만 내 생애
아름다운 추억들로 가득한 그곳.
나의 방황하던 마음을
단단히 잡아준 그곳 해인사강원,
아니 해인사승가대학.
지금 나의 수행은
그 시절의 고뇌와 선배들의 경책.
도반들의 탁마가 없었다면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가 본사는
오대산 월정사이지만,
수행자로서 뿌리내리고
튼튼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해준 곳은
가야산 해인사인 것이다.
해인사!
난 아직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