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21세기 자연의학 연구소
 
 
 
 

친구 카페

 
 
카페 게시글
..........쉬어 가는 곳 스크랩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박보희 총재)
큰 바위 얼굴 추천 0 조회 118 12.12.06 21: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요즈음 한국인이란 말은 혐오스런

낱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인은 매사에 혐의를 받고 있으며

조롱받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에서

반공주의 노선은 소멸된 지 오랩니다.

그러나 본인은 누가 뭐래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며, 자랑스러운 통일교인입니다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 때 : 1978년 3월 22일

· 곳 : 미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

미국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가 개최한 소위 '박보회 청문회' 가 미국과 한국인 그리고 세계여론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1978년 3월 22일 제1차 청문회를 시작으로 6월 20일까지 다섯 차례(세 차례는 공개, 두 차례는 비밀)에 걸쳐 열렸다.

 

청문회 증언경위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라고도 불리는 박동선 사건이 1976년 미의회 윤리위원회에서 개최한 청문회를 통해 언론의 큰 뉴스로 다뤄졌고 미국의 조야는 급작히 반한적인 외교분위기로 치달았다. 이때를 정치적 출세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국제관계소위원회 위원장인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의 주도 아래 한·미관계 조사가 시작됐다.

그들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청문회에 회부시켜서 일단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자 다음 목표로 미국에서 활동중이던 문선명 선생과 통일교회를 표적으로 삼고, 그 분의 보좌관인 본인을 동위원회에 소환시켜 청문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코리아게이트란 미 하원 윤리위원회가 주도하고 프레이저의 국제관계소위원회가 합세하여 1976년부터 2년 동안 박동선 사건을 통해 '한국 정부와 한국인이 미국 전복을 공작해 왔다. '는 날조된 음모를 도출해 내서 미국의 언론과 정계, 조야에 유포시킴으로써 미국 정계에서 암약하던 좌익세력들이 정치적 야망을 채워 보겠다는 술책에서 시작된 것이다.

박동선 사건을 통해서 '코리아 킬러'로 이름을 얻기 시작한 프레이저는 당시 미국 종교계에 '미국은 건국정신과 도덕성회복운동을 통해 각성해야 한다.'며 전국적인 기독교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있던 한국인 문선명 선생과 통일교회를 2차 표적으로 삼고 음모를 진행시키게 된 것이다.

"코리아 킬러로 콧대 높은 프레이저 위원회가 박보회 씨를 증인으로 청문회에 소환한 것이 실수였다. 박 써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하의 달변으로 프레이저 위원회의 취약점과 프레이저 위원장의 허점을 여지없이 공박, 안하무인격인 그의 콧대를 눌러 주었다. "

이 글의 내용은 국내 어느 신문의 기자가 청문회를 취재하고 쓴 보도 내용이었다.

본인을 상대로 한 다섯 차례의 청문회가 미국과 미국의 한 정치 야망가의 배신적 행위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를 사게 됐고, 본인의 진실한 증언으로 흑백이 밝혀지면서 프레이저의 정치적 몰락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사실 프레이저 위원장과 본인의 청문회 공방은 마치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같이 시작과 결과가 극명하게 나타남으로써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 편이 승리한다는 역사적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본 위원회는 한·미 문화재단과 그 산하 단체인 자유아시아방송의 박보희 총재가 미국 정부와 여론에 영향을 끼치고자 한국 정부의 지령 하에 미국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실이 있는가를 알고자 출두시켰지만 일차 거절함으로써 오늘 법적인 절차를 밟아 소환을 시킨 것입니다. 박보회 총재는 손을 드시오. 본 위원회와 하나님 앞에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서약하겠습니까?"

"예 , 그렇습니다. "

1970년대 미국과 한국 사이에 불행했던 한 정치적 사건은 이러한 연유와 배경 속에서 시작됐고, 그 상처 또한 깊어서 오랫동안 치유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됐다. 특히 가슴 아픈 것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되면서 문선명 선생께서 1984년에는 탈세혐의로 1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댄버리 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코리아게이트로 시작되어 본인에 대한 청문회사건이 일어난 지도 벌써 16년 여가 지났다. 이제 역사적인 사명감에 그 청문회 증언내용 전부와 경과를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들 앞에 내 놓게 됐다. 이 증언 내용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제1차 증언, 막이 열리다

존경하는 위원장, 하원의원, 그리고 신사숙녀 여러분!

본인은 오늘 국제관계소위원회의 조사를 왜 반대해 왔는가를 밝히려 합니다. 본인은 아무것도 숨기려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떠한 폭로를 두려워 해서도 아닙니다. 본인은 다만 이 국제관계소위원회의 조사의 동기와 진행, 그리고 근본 목적 자체가 정당하지 못하며, 공정과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반대했습니다.

부당한 이 소위원회의 조사가 전 세계의 수 많은 무죄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피해를 생각할 때 본인은 이 조사를 적극 반대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이 조사에 대한 본인의 거부는 무엇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은 이 조사를 위해서 처음에는 전폭적으로 협조를 했었습니다. 이 조사의 초기에 본인은 분명히 자진해서 한미문화자유재단과 자유아시아방송(ROFA), 그리고 통일교회에 대한 자료를 위원장에게 제출한 바 있습니다.

 

프레이저 위원회의 부당성

1976년 6월 9일, 본인은 자진해서 위원장 귀하에게 면담을 청하고 많은 자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귀하의 사무실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했습니다.

그때 귀하의 보좌관 리처드 마우지 씨가 임석했고, 본인의 분명한 기억으로는 귀하와 마우지 보좌관이 본인과의 대화 내용 전부를 기록했습니다. 본인은 귀하를 협조하기 위해 소명자료도 제출했습니다.

또한 본인은 소위 '박동선(朴東宣)사건'에 말려들게 되었을 때 자진해서 법무성의 공안국을 방문하여 폴 미첼 검사와 만났습니다.

우리는 솔직하고 숨김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본인은 자발적으로 본인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것으로써 본인의 입장은 완전히 해명되었고 그 후로는 그들로부터 아무 연락도 받은 바 없습니다.

1976년 10뭘 29일, 워싱턴 포스트 지는 '박동선사건'을 처음으로 폭로하면서, 미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계획으로 한국의 청와대에서 중요 정책회의가 열렸을 때 본인이 그 회의에 참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본인은 영국의 런던에서 이 뉴스를 들었습니다. 본인은 즉시 다른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이틀 후인 1976년 11월 1일,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본인의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본인은 그 사건을 외면하는 것보다 오히려 직면하는 것이 바른 태도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어떤 오보나 혐의를 회피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정정당당하게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본인은 본인이 행한 모든 일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본인은 본인의 생애에 걸쳐 해 왔던 모든 일에 대해서 긍지와 자락을 느끼고 열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이 위원회의 조사에 반대하는 이유는 이 조사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동기가 불순하고 진실하지 못한 조사가 진행된다면 맡은 죄 없는 사람들, 특히 본인이 존경하는 종교지도자 문선명 목사와 전세계 통일교회 신자들이 부당한 피해를 받게 되므로 본인은 이 조사를 적극 반대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공개청문회 서두에서 귀하나 위원회의 여러분들이 행한 본 조사가 이미 얼마나 많은 무죄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 왔는가를 밝히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 본인은 먼저 그 동안 본인이 걸어온 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본인의 생애

인간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반드시 행동 이전에 동기가 있습니다.

인식하는 결과가 있기에 앞서 반드시 보이지 않는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과법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모든 행위도 이 법칙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본인이 행한 모든 일에도 반드시 동기가 있었습니다.

본인은 귀하에게 본인이 행하여 온 일의 동기에 대하여 밝히려 합니다. 이것은 귀하가 본인을 이해하는 데 지극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결국 본인의 생애에 대한 간단한 간증이 되겠습니다.

1950년 6월 1일, 본인은 미국의 웨스트 포인트와 맞먹는 한국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4년 동안의 교육과 훈련을 마치면 장차 한국 육군의 장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본인의 나이는 20세였고 아직 미혼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사관생도로서 장차 장군이 되겠다는 회망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5일 만에 그 꿈은 사라졌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사관생도들은 M-1 소총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모른 채 전쟁터의 한복판에 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북괴군은 한국을 침략했고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그 홍수와 같은 침략을 막기 위해 최초의 일선 군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3백30명의 동기생들은 불과 3일간의 전투 끝에 3분의 2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2백20명이 전사했습니다.

얼마 후 우리들은 부산으로 파송되어 8주간의 짧은 훈련을 받고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고, 소대장으로 또다시 전선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의 소대장들은 소모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고, 동부전선 최전방에서 처음 일주일 동안의 전투에서 나의 또 많은 동기들을 잃었습니다.

1951년 봄에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했습니다. 그들은 소위 춘계공세를 감행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 사단은 일격에 적군에게 분쇄되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사단 전투부대의 대부분이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못 가졌고 적은 우리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본인은 몇 사람의 전우와 합께 적의 점령지대 속에 숨어 있으면서 최후의 날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도 없이 산속에 숨어 있으면서 여러날 동안 아무 정보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본인은 적군의 긴 대열이 북으로 후퇴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부상을 당하여 쩔룩거렸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음을 느꼈습니다. 그때서야 본인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적군이 후퇴하고 이틀 후에 남쪽에서 굴러오는 탱크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적군을 북으로 몰아내는 미 제3사단의 반격부대였습니다. 드디어 미군이 우리를 반겨 주었을 때 본인은 감격하여 그들의 탱크에 키스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을 살려 주셨던 것입니다. 본인은 하나님에게 감사했고 생명을 구해 준 미군에게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본인이 미 합중국과 관계를 맺게 된 첫 인연이었습니다.

미국은 본인의 생명을 구해 준 구주(救主)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 위대한 미국과 미 국민들에게 대한 본인의 존경과 사랑은 깊어졌습니다. 본인은 언제든지 생명을 구해 준 미국에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1961년 본인은 워싱턴 주재 한국 대사관의 무관보좌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본인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본인은 '미국에 보내는 찬사'라는 글을 쳤습니다. 마침 그 원고를 1961년부터 보존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자리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을 참고자료로 이 위원회에 제출하고 싶습니다. 그 중 일부분을 낭독하겠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 나는 한 사람의 군인으로 미국의 형제들과 함께 한국의 산악지대에서 무서운 전투를 경험했다. 나는 그 전투 중에 수많은 미국의 무명용사들이 싸우다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몸이 적군의 포탄에 살 한 점도 남김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모지의 무명용사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하나님만이 그 이름을 아시는 명예로운 무명용사가 여기에 잠들어 있노라.' 그 중 한 묘비에는 '한국전쟁'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비문 앞에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그대의 죽음을 내가 목격 했을는지도 모른다. ' 나는 나도 모르게 무명용사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를 올렸다. 3만 명 이상의 미국 군인들이 나의 조국에서 죽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들의 영웅적 행동은 하나님께서만이 아실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은 단순한 동맹국이 아니다. 미국은 우리와 피로 얽혀진 위대한 형제국이다. "

이 글은 미국에 대한 본인의 생생한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1950년에 그러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미국은 본인의 형제국이요 제2의 조국입니다. 물른 현재 본인은 한국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미국에 영주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자녀들 중 네 자녀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그들은 이 나라의 시민입니다.

본인은 한국을 위해서 충성을 바치고 있지만 본인의 생명은 미국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에 대한 본인의 충성은 조국 대한민국을 위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한국 동란 중 본인은 구사일생으로 절체절명이라고 생각했던 경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인가 할 일을 주시려고 천명으로 살려 준 것이다. '라고 가슴 깊이 깨달은 바 있습니다. 이러한 생사관에서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처음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렸고 종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진리를 찾기 5년, 드디어 1957년 문선명 목사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본인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천명으로 살려 주신 참뜻을 알았습니다. 본인은 문선명 목사의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과 인류와 조국을 위해 하나님께 빛진 이 생명을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본인은 문선명 목사의 한 작은 제자로서 일하여 왔습니다.

문선명 목사는 본인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베풀어 주셨고 생의 목적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 때문에 본인의 가슴에는 하나님이 실재하게 되었고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조국에 대하여 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목사의 가르침을 우리는 단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류를 위한 '사랑과 회생'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목사를 통해서 미국에 대한 본인의 사랑이 강하고 깊어졌으며, 본인의 사랑이 국경을 초월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은 문천명 목사에게서 미국이 현재의 세계적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임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 미국을 위한 본인의 충성은 절대적이고 순수한 것이 되었으며, 이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고 싶은 본인의 소망은 문자 그대로 불타는 정열과 같습니다.

위원장! 본인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하나님과 인류, 그리고 본인이 사랑하는 두 나라, 한국과 미국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이런 강한 봉사정신으로부터 한미문화자유재단의 씨가 움터 나왔고, 자유아시아방송이 시작되었고, 리틀엔젤스가 설립되었으며, 또한 아동구호기금이 설치됐는가 하면 학교들이 건립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 강한 심정에서 본인은 문선명 목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설교해 왔습니다.

본인은 순수하고 정직한 양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본인은 맡은 과오를 범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잘못된 판단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많이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인의 모든 행동은 봉사와 사랑이 동기가 되어 이루어졌으며, 특히 미국에 어떤 해를 끼치거나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또한 본인은 미국뿐만 아니라 어떤 나라의 법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본인은 오늘 위엄있는 미의회 국제관계소위원회에 출두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증인으로 여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경멸받는 한 정보부의 앞잡이로, 한 외국정부의 주구(走拘)로 지탄받아 여기에 서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거짓말입니다 본인은 그런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웨 본인은 까닭없이 여기에 소환되어야 합니까? 그 이유를 본인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생명과 명예에 대한 손상

그 이유는 본인이 한국인이요, 문선명 목사의 제자이며, 통일교회의 한 신도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한국인'이란 말은 혐오스런 낱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인은 매사에 협의를 받고 있으며 조롱받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에서는 실질적으로 반공주의 노선은 소멸된 지 오랩니다. 그런데 본인은 그런 못마땅한 것들을 몽땅 독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미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바보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인은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다.

본인은 누가 뭐라 하여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며, 자랑스러운 통일교인이며 , 또 철저한 반공주의자입니다.

본인은 일생 동안 이 길을 갈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길을 막지못할 것입니다. 본인은 오늘 아침 이증언에 나오기 전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 소위원회에 의하여 괴롭힘을 당하고, 박해받은 2년 동안의 고난 속에서도 평온한 마음을 갖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본인 개인은 하나님과 함께 평화를 느끼고 있지만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당한 피해는 마음 아픈 일입니다. 너무도 많은 정당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지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얼마나 박해를 받아 왔는가를 귀하에게 밝히려 합니다.

약 2년 동안 이 국제관계소위원회는 공식적으로는 한국 중앙정보부의 미국 내 활동을 조사해 왔습니다. 그 2년 동안에 이 소위원회는 미국의 의회가 문선명 목사의 통일교회를 조사 중에 있다는 인상을 전세계에 암시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지는 1977년 3월 19일자 기사에서 분명히, 프레이저 소위원회가 '장차 한국 정부와 문선명 목사의 통일교회와의 관계를 조사할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 고 보도했습니다.

이 소위원회는 조사기간에 사실무근한 주장들을 증거자료로 받아들였는데, 아무 죄가 없는 문선명 목사와 통일교회에 대한 허위정보를 언론에 흘려서 보도된 기사를 새로운 증거로 삼기도 했습니다. 이 소위원회는 편파적인 입장에서 공공연하게 편견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차별 대우를 받았고 세계적인 사업들이 부당한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 위원회 때문에 통일교회는 재판도 받지 않고 전세계인들로부터 저주받고, 심판받고, 비난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중앙정보부와는 아무 관련도 없고, 그릇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이 소위뭔회는 사실무근한 혐의를 씌워 괴롭혀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귀하는 또 이 위원회가 앞으로도 미국 헌법 제1 수정 조항(종교의 자유를 선언한 헌법 조항)에 있는 개인적인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소위원회가 통일교회에 대한 허위 날조된 혐의를 공개했고, 지상을 통해 보도했기 때문에, 거짓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본인은 한국 정보부 요원의 혐의자가 아니라 이미 한국 정보부 요원으로 기정 사실화 되고 말았습니다.

귀하는 아마도 한국 문제를 다룬 '미·일 의원정책연구 간담회' 에서 제프리 스타인 박사가 한 연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귀하가 그 회의의 멤버였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학자마저도 말하기를, "전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말에 의하면, 박보회는 문선명 목사의 오른팔이며 동시에 한국 정보부원이다. "라고 했습니다.

귀하는 김형욱 씨가 증언하는 가운데, 본인이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이 아니다. '라고 말한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귀하는 그 스타면 박사의 말을 정정하려고 생각해 본 일이 있었습니까? 전세계인들은, 이미 본인이 한국 중앙정보부의 앞잡이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위원회가 주장한 것을 근거로 말하는 것입니다. 귀하는 이 위원회의 주장 때문에 통일교회 신자들이 명예를 훼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실상 본인은 이 위원회의 희생물이 되고 있습니다 본인의 가족도 같은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본인의 어린아이들은 학교에서 조롱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본인의 집은 한 폭도에 의하여 계란세례를 받았고, 많은 협박전화가 우리 가정의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본인은 한 번 재판을 받은 일 없이 명예와 생계를 파괴당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찾아오신 한 분, 그 분의 고귀한 사업이 방해받고 있습니다. 문선명 목사는 과거 수년 동안 미국의 주요 도시와 50개 주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본인은 그 분이 하신 일이 이 나라의 어떤 종교지도자들보다 훌륭하다고 믿습니다. 그 분은 타락한'수많은 미국의 청년들에게 도덕과 생명의 부활을 주셨습니다. 문선명 목사는 그들의 희망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분이 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은 귀하가 유포하는 사실무근한, 그리고 부당한 비난으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손상은 미국에서만도 막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충격은 미국에만 한정돼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뉴스는 전세계에 퍼져 나갑니다.

세계 1백27개 국에 있는 문선명 목사의 신도들과 선교사들은 그릇된 주장에 의하여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무니(Moonie)'라고 알려진 전세계의 수백만 신도들이 한국 정보부의 앞잡이라고 저주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종교적 신념을 전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거리에서 가정에서 우리 신도들은 날마타 그러한 경멸의 조소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거리의 군중들은 때로는 그들을 불러 세워, "야! 무니야! 한국 정보부의 개들아, 돈은 얼마나 받느냐!" 이런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핍박 속에서도 통일교회가 번성하고 팽창일로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의미합니다. 귀하의 비밀공작은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하가 위원회에서 추진하는 이 조사가 우리 신도들에게 말할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이는 마치 발을

쇠사슬에 묶인 채 헤엄치게 하려는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그 쇠사슬을 푸는 것은 이 위원회만이 가능합니다. 정직하고 공평하고 객관성 있고 신중하게 남의 생명을 대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신문에 게재된 그룻된 주장을 시정 함으로써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원회는 전혀 그럴 의사가 없습니다.

최근에 크리스틴 코스트라고 하는 프랑스 출신 통일교회 젊은 여신도가 뉴욕에서 살해됐습니다. 물론 이 소위원회가 직접이든 간접이든 간에 그 살인에 책임져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인은 미국과 전세계에서 그와 비슷한 사태가 빛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귀하의 근거 없는 혐의로 말미암아 아주 위험스런 여론이 형성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전세계의 통일교인들은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문선명 목사께서는 그 주변에 절박한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분과 가족들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문명이 발달되었다

고 말하는 이 나라에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통일교인들을 비웃고 죄를 뒤집어 쐬우려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많은 무죄한 사람과 생명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리라는 것을 귀하는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여하튼 본인이 걱정하는 것은 이 위원회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고 천국과 정의의 도래를 지연시킨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총탄도 쏘지 않고, 한 방울의 피도 흘림 없이, 이 위원회는 하나님과 위대한 나라 미국에서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역사는 기록할 것입니다.

 

통일교회 명성 파괴

며칠 전, 1978년 3월 15일은 통일교회에서는 가장 비참한 날이었습니다. 1970년 서울에서 워싱턴에 보고된 미확인 정보 보고를 이 위원회가 무책임하게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그 신문 보도를 읽고 아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용은 통일교회가 한국 정부의 정치도구로서 전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씨에 의하여 1961년에 창설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원장! 귀하는 이것이 전혀 근거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가슴 속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문선명 목사는 한국 중앙정보부가 창설되기 약 25년 전인 1936년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가 통일교회의 영적(영적)인 출발이었습니다 통일교회가 서울에서 창립된 것은 1954년 5월 1일, 문선명 목사에 의해서였습니다. 그것은 1961년 박정회 대통령과 김종필 씨가 정권을 잡기 7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본인은 1957년에 통일교회에 입교했습니다. 우리는 1958년, 일본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 교회 초창기 신도들은 오랫동안 박해 속에서 고생을 했고 희생을 당했습니다 1959년, 미국에서 선교사가 왔을 때는 한국에 군사정권도 들어서지 않았고 김종필 씨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초창기의 우리 신도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이외에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고생했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들의 신앙심에 큰 모욕이 될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프레드릭 손탁 박사는 최근 감리교 출판사인 '어빙턴 프레스'를 통하여 통일 교회를 깊이 연구한 책을 냈습니다. 그는 우리 교회가 창설된 진실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문선명 목사와 통일교회' 라는 저서 중에서 몇 가지를 인용하겠습니다 손탁 박사는 1954년에 있었던 통일교회 창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내가 여행하면서 면접하고 연구한 일들을 놓고 나는 이러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운동은 순수한 영적인 바탁 위에 이루어져 있다. (159p참조) 그리고 나는 한국 방문을 통해서 문선명 목사가 교회 창설을 위하여 부당한 구금과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78P 참조)"

본인은 귀하에게 참고가 되도록 이 책을 한 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본인은 이 소위원회가 작성한 서류에, 왜 손탁 박사의 연구가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왜 다른 한국인과 미국인의 증언이 미 중앙정보국의 미확인 보고와 경하여 채택되지 않았는가? 본인은 이 위원회의 주장을 거짓으로 규정할 수 있는 증거가 미 중앙정보국 안에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그와 같은 정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귀하는 김종필 씨가 통일교회의 창시자라고 하는 보도가 얼마나 엉터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기독교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caesar)에 의해서 창설됐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귀하가 한번 상상을 해 보기 바랍니다. 미 중앙정보국장이었던 월리엄 콜비 씨나 리처드 헬럼스 씨가 미국의 외교정책을 위한 도구로서 종교를 하나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 신도들은 '콜비스트' 혹은 '헬럼니스트'라고 불리어지지 않을런지요?

이 세계의 어느 누가 한국의 정보부장이나 미국의 정보국이 통일교회와 같은 교회를 설립했다고 믿겠습니까? 나는 귀하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귀하가 얼마나 무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를 폭로할 뿐입니다.

왜 귀하는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지도 않고 그런 거짓을 전세계에 발표하는 것입니까? 귀하는 이 거짓말이 통일교회와 그 신도 각 사람에게 얼마나 큰 손해를 입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보십시오.

귀하가 이 자료를 공개한 그 다음날 워싱턴 스타 지는 '문선명 교회는 한국 정부의 정치도구, 1961년 정보부장이 창설'이라고 대서 특필했고 전세계 신문들이 이 기사를 1면에 보도했습니다. 단 하나 1978년 3월 16일 워싱턴 포스트 지만 비교적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사를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보고서는 미확인된 것이었고, 사실 문선명 목사와 그의 교회는 박 대통령 정권 이전인 1954년에 설립된 것으로, 이는 한국 정보부가 창설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본인은 워싱턴 포스트 지의 정확한 보도를 신뢰합니다. 그러나 다음은 리처드 핼로런 기자에 의해 보도된 1978년 3월 16일자 뉴욕 타임스 지의 기사입니다.

"통일교회는 한국 정보부의 정치도구-문선명 목사가 한국 로비 활동에 관계된 서류를 국회가 공개-금일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가 문선명 목사의 통일교회는 1961년에 정치도구로 한국 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씨에 의해 설립됐다는 미 중앙정보국의 정보 보고를 공개했다."

한번도 문선명 목사에 대해 정확한 보도를 한 바 없는 뉴욕 타임스 지같은 신문들이 얼싸 좋다! 하고 거짓말을 큰 기사로써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뉴욕 타임스는 세계적으로 언론계의 성경인 양 인용됩니다. 세계의 모든 신문들은 뉴욕 타임스가 보도하기를, 하면서 그 거짓 기사를 전재하는 것입니다.

위원장! 이 위원회 때문에 우리들은 얼마나 더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위원장께서 왜 우리들을 이렇게 괴롭히는지를 밝혀 주십시오. 1978년 3월 15일, 이 위원회가 얼마나 해로운 일을 했는지 귀하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미국 의회의 명분으로 통일교회를 한국 정보부의 도구라고 규정했습니다. 만일 순수한 종교단체가 대중의 눈에, 한국 정보부나 또 다른 정보기관의 도구로 비쳐진다면 그것은 그 단체에 최악의 타격인 것입니다. 귀하는 우리에게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3월 15일, 귀하는 문선명 목사의 이름과 통일교회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문선명 목사와 본인은 예수께서 기도하셨듯이 기도했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 진정 우리들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한 주일이 지난 오늘, 본인은 문선명 목사의 이름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부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때가 실제적으로 좋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부활절이 며칠 뒤로 다가오니까요.

그러나 2천 년 전 예수께서는 뉴욕 타임스 지와 같은 신문과 상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문선명 목사의 이름을 부활시키는 우리들의 일은 더욱 어려움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아침에 문선명 목사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는 뉴욕 타임스 지와 같은 신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원장! 통일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입니다. 문선명 목사는 다만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선택된 분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부활뒤에 더 흥하셨듯이, 또 기독교가 더 강해 졌듯이, 통일교회도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통일교는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고, 하나님과 그의 진리는 영원할 것이며, 아무도 통일교회의 전진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문선명 목사가 표적

1977년 4월 14일, 이 위원회의 공개각서를 보면, 이 위원회의 주된 조사목적은 문선명 목사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 위원회는 모든 혐의를 문선명 목사 한 분께 집중시켰습니다.

혐의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각서는 다른 사람 이름을 빼고 문선명 목사를 끌어들여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혐의가 궁극적으로 문선명 목사를 비난하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책임한 기록을 볼 때, 이 위원회는 문선명 목사와 사실 아무런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조사의 초점을 이 결백한 하나님의 사자에게 집중시키려 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본인은 통일교회 신도의 한 사람으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 종교지도자에게 이와 같은 결례를 하는 데 대하여 분개해 마지 않습니다.

미국법은 모든 추기경들의 행동이나 가톨릭 신자의 행동에 대하여 교황 자신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선명 목사께서는 16세 때에 하나님의 성스러운 부르심에 깨달음을 얻은 분입니다. 그 분은 진리를 찾기 위해 전 생애를 바쳐 피땀 흘리며 수고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악명 높은 북한 집단수용소의 악랄한 고문에 몇 번이고 회생되었을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현대의 예언자로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잃어가고 있는 국가와 인류들에게 진리를 설파하고 계신 분이며, 사실은 오랫동안 자신의 조국 한국 정부로부터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문선명 목사는 1971년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미국에 오셨고, 이 나라 국민들의 심령에 불을 붙였으며,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당당히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이신 문선명 목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바라심같이 미국이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기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 가운데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 위대한 한분과 그 분의 말씀에 거부반응을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뜻있는 미국인들은 이 선지자를 받아들였습니다. 문선명목사께서는 이 나라에 진리의 선풍을 일으켰고, 미국 안에 회망의 새 불빛을 밝혔습니다. 많은 저명한 신학자들도, 손탁 박사가 기술했듯이 통일교회에 대하여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생애 동안에 한 새로운 종교운동의 생성과 진통을 통한 성장을 보아 왔고 또 그 성숙을 보게 될 것이다. "

이와 같은 문선명 목사가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이라 믿어집니까?

이런 분이 어떤 정부의 고용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느 정부도 이 분을 고용할 수 없습니다 벌써 하나성이 고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한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에이전트(Agent)란 말을 꼭 쓰고 싶으면 내가 도와 주겠소. 당신은 문선명목사를 하나님의 에이전트라고 부를 수 있소."

 

통일교회는 정치단체인가

이 위원회는 통일교회와 문선명 목사를 고의적으로 한국 정보부와 연결시켜서 통일교회가 건실한 종교단체인 것을 부인하려고 실제로 애쓰고 있습니다. 귀하는 통일교회를 단순한 하나의 정치단체로 격하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귀하가 이 통일교회가 정치단체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교회나 종교단체들도 정치단체라고 규정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통일교회는 로마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유대교와 아무것도 다른 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기록을 본다면, 사실 통일교회는 다른 미국의 종교단체에 비하여 가장 비정치적입니다. 귀하가 통일교회를 정치적이라서 조사해야 한다면, 귀하가 속해 있는 '유나이티드 처치 오브 크라이스트(United Church of Christs)'부터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하의 교회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또 사실상 베트민정권을 지원해 왔던 까닭입니다.

또 한국 정부와 통일교회와의 관계를 조사하기에 앞서 귀하는 이스라엘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대교 단체를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티칸과 관계 있는 로마 가톨릭, 또 영국과 관계가 있는 성공회도, 더 나아가서 아랍국가와 관계가 있는 무슬림 단체, 인도와 관계있는 힌두교 단체도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1960년대의 인권운동에는 거의 모든 교회가 정치무대에 가담했습니다. 니콜라스 본 호프만 씨는 1977년 4월 9일 시카고 트리분지에 1960년대의 종교풍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60년대에는 가톨릭과 장로교·성공회 등 모든 단체들은 거액의 자금을 인권운동에 투입하여 지원했다 그때 교회는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절규가 있었지만. 그들은 도의적 정의에 도취되어 정치활동을 통하여 그들의 신념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 교회들은 통일교회가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습니까? 귀하는 아마도 한 교회를 다른 교회와 차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귀하는 어찌하여 통일교회만을 특별 케이스로 만들려합니까? 통일교회가 미국 종교가 아닌 한국에서 온 종교이기 때문입니까?

이와 같은 차별대우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이는 정부가 교회를 조사하는 하나의 위험한 선례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귀하는 값싼 애국의 미명 하에 미헌법에 규정한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고 있습니다. 장래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위험은 통일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권리가 국회 조사라는 얄팍하게 위장된 복수심으로 공공연히 침해를 받는다면 이와 같은 위험은 모든 종교에 위해(危害)가 될 것입니다.

 

한국방위와 본인의 활동

지금까지 본인은 문선명 목사와 통일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이 증언을 했으며, 다음은 한국의 방위와 한미문화자유재단에서의 본인 활동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위원장! 여기 극동지역의 조그마한 지도 한 장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본인은 이 지도가 본인의 생각을 명확히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붉은 색은 공산주의 국가를 가리키고 빨간 점은 밀도 높은 공산주의 국가의 인구 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반도는 소련과 광대한 중국대륙에 접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절반은 가장 악랄한 공산주의 집단인 김일성이 점거하고 있습니다.

이 반도의 외곽에는 일본열도가 있습니다.

귀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은 자위능력이 없습니다. 일본 국회에는 공산당의 세력이 막강합니다. 북한 공산주의 추종집단도 일본에는 대단히 강합니다. 3천5백만의 인구를 가진 작은 남한은 막강한 공산주의 세력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이 지도를 작성한 후 저의 집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물어 보았습니다. "너희들이 이 상황에서 푸른 점인 서울에서 산다면 어떻게 느끼겠니?" 이구동성의 대답은 "두려워요(Scared)!"였습니다. 이 두렵다는 말이 바로 정확히 대한민국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입니다. 우리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야욕을 경계합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두려워 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생명을 바쳐 이 사태를 막으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귀하에게 짤막한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본인은 미국에서 한국어를 잘 공부한 미국인 린 더플러 양을 비서로 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국 사람들의 미국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어떠한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다음의 이야기를 본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한국에 있을 때, 어느 날 다른 미국 친구와 같이 한국의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일곱 살과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키가 큰 두 미국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작은 아이가 약간 두려워 하는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 작은 아이는 "양코배기 온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큰 아이는 자신있는 말투로 동생에게 "무서워 할 것 없어, 양코배기는 좋은 사람이야. 그 사람들이 없으면 우리는 죽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한국의 시골에 사는 일곱 살 먹은 아이의 증언입니다.

더플러 양은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그 어린아이들은 그녀가 한국 말을 전혀 모르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본인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은 작은 일이 어떤 거창한 이야기보다 더 한국 사람들의 대미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본인은 이와 같은 감정이 일곱 살이든 일곱 살이든 모든 한국인의 공통된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미국인들이 '양키 고 홈(Yankeegohome)'이라는 구호를 듣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한국뿐일 것입니다.

1960년도, 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났을 때 전 서울시가 혼란했지만 맥아더 장군의 동상 앞에는 항상 꽃이 놓여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와 같은 분노의 폭발이 절대로 반미감정으로 표현돼서는 안된다고 주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군 철수가 결정되었을 때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미국의 관심과 우정을 잡아보려고 모두 나섰습니다. 실제로 정부뿐만 아니라 미국과 연결이 있는 민간인들도 여러 가지 홍보활동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본인은 오래 전부터 한국과 미국의 유대강화와 친선이 세계평화의 열쇠가 된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일을 하기 위하여 1964년에 한미문화자유재단을 창설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꾸준히 그 목적을 추구해 왔습니다.

1970년, 미군 철수 문제가 본격화하자, 본인은 순수한 애국심에서 이때야말로 한미친선에 최선을 다할 때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우정과 친선을 증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한미문화자유재단의 목적이 그것이며, 리틀엔젤스 사업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본인은 진심으로 미국과 한국의 국민이 좀더 가까워지고, 좀더 협조적이며, 좀더 깊은 우정을 갖게 되기를 열망해 왔습니다. 위원장! 이것이 죄입니까? 이것이 잘못입니까?

본인은 한국의 어진이 민족예술단 리틀엔젤스를 열한 번이나 미국에 데려 왔습니다 이 사업은 두 나라의 우의를 증진시키는데 대표적인 가장 아름다운 예일 것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에 대하여 가장 날카로운 비 판자였던 풀브라이트 전 상원의원도 두 번이나 리틀엔젤스 공연을 보러 케네디센터에 왔으며, 그의 마음은 녹아졌습니다. 1976년 한 상원의원은 이렇게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리틀엔젤스의 공연은 정말 훌릅하고 감동적 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어 전 미국 국민이 보지 못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나는 당신과 한국과 그리고 이 훌륭한 공연을 가능케 한 모든 사람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국무성의 한 고위 관리도 다음과 같이 써 왔습니다. "국무성과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본인은 당신이 이렇게 흘릉한 리틀엔젤스를 독립 2백주년 축하 선물로 미국에 데려 온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한 미국 장관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하나님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라는 노래를 그렇게 완전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본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국의 어린이들이 미국의 한 애국적인 노래를 그렇게 즐점게 불러 주는 것을 보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많은 합창단의 노래를 감상할 기회를 가졌지만 리틀엔젤스의 노래를 듣게 된 것은 본인의 생애에 큰 행운이었습니다 "

호주의 한 연예 관계자는 1972년, 리틀엔젤스의 제1차 호주공연이 끝난 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본인은 세계 여러 나라의 평화와 우의를 증진시키는 데 있어서 최선의 방법은 리틀앤젤스로 하여금 그들의 평화의 메시지를 땅끝까지 전달케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호주 주재 미국 대사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본인의 생각으로는 리틀엔젤스의 공연은 그 동안 한국 대사관이 해온 어떤 일보다도 호주와 한국의 우의를 증진하는 데 더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공연이 미국 재단에 의하여 주선된 것이라면 본인은 당신의 재단에서 미국을 위하여서도 리틀엔젤스와 같은 단체를 주선할 수 있는지 묻고자 합니다."

1971년, 리틀엔젤스는 영국 여왕 어전공연에 초청받았었습니다.

영국 왕실 의전사상 유례없이 기뻐하신 여왕에서는 전 단원을 리셉션에 초대해 주었습니다. 리틀엔젤스는 세계무대에서 1천6백여 회의 공연을 해 왔고, 2백여 회의 텔레비전 출연으로 수억의 세계인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며, 30개 국 국가원수를 접견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ROFA)도 같은 뜻에서 창립된 것입니다. 세계공통의 자유정신을 토대로 친선과 우정을 증진시키며, 방송을 통해서 '죽의 장막' 뒤에서 신음하는 수억의 국민들에게 무엇인가 봉사하고 싶은 뜻에서 운영된 것입니다 시작할 때부터 자유아시아방송은 어느 정부의 지원 없이 다만 정신적인 협조 가운데 자유를 위한 시민의 방송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에서도 이 자유아시아방송을 위하여 '진리의 가교' 라는 표어를 주었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공산주의 밑에서 신음하는 퍼압박 민족에게 자유 세계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한국과 필리핀, 라오스 그리고 함락 전의 사이공에서 방송시설을 빌려 방송해 왔었습니다.

미국이 최초로 사람을 달에 착륙시켰을 때 자유아시아방송은 '죽의 장막' 뒤의 국민들이 인류의 역사적인 성취를 알아야만 한다고 확신하고 특별방송을 내 보냈으며, 베트남전쟁에서 미군 포로와 실종자 귀환문제가 한창일 때 자유아시아방송은 전쟁포로에 대한 북베트남의 비인도적인 대우에 대하여 전 세계적인 여론항의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3백25회의 특별 프로그램을 북베트남에 방송함으로써, 전세계 인류의 분노를 반영시켰습니다. 많은 상원의원들, 하원의원들 그리고 정부 민간의 지도자들이, 또한 포로와 실종자 가족들이 직접 자유아시아방송의 마이크 앞에서 그들의 분노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근대의 역사에 기록될 인도주의적 운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포로와 실종자 가족들로부터 깊은 감사를 받아 왔습니다. 이와 칼은 우리의 목적을 이해한 한국 정부와 국민은 이 자유아시아방송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진실성을 믿고 우리의 목표가 미국과 한국을 위해서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말한 지원이란 재정적인 것이나 통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과 정신적 지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유아시아방송은 미 국무성의 방해가 없었던들, 금일에까지 세계적인 사업으로 번영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1971년 자유아시아 방송과 본인에게는 지옥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국무성의 계속적인 요청에 의하여 미 법무성이 전면적인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서면으로 본인을 법정에 불러냈고 동시에 국세청도 전면 조사에 나섰습니다.

위원장!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미 연방수사국과 미 국세청 두 기관의 전면조사를 받고 살아남을 자는 얼을 것입니다. 또 국무성과 법무성의 막강한 압력을 받고 살아남을 자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본인에게 아무리 작더라도 불법적인 일이 있었다면, 본인은 1971년의 그 시련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에게 신앙심이 얼었다면 이와 같은 심판 기간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후 1년여의 조사 끝에 그들은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본인의 무죄함은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본인은 법 무성으로부터 결백하다는 사실을 증명받았습니다. 국세청은 아무것도 부정한 혐의를 캐내지 못하고 한미문화자유재단의 무혐의 증명서한을 보내 왔습니다.

"1971년 9월 29일.

당신의 활동을 검토하고 재정관계 서류를 조사해 본바 당기관은 당신의 연방 면세혜택이 정당함을 알게 되었고, 당신의 조사관계 보고가 이상 없음을 통고하는 바입니다."

-국세청 지방국장-

1972년 3월 16일. 법무장관 서리 리처드 를라인디엔스트(Richard Kleindienst)는 국무성의 존슨(Johnson)차관에게 재단 조사에 관한 최종적인 편지를 썼습니다.

"귀하는 연방수사국이 자유아시아방송이라는 기관에 대하여 전면 조사를 실시함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기관에 대한 연방수사국의 조사는 완결됐습니다. 중앙정보국과 국무성, 그리고 연방수사국의 정보를 기초로 조사해 본바, 자유아시아방송을 외국의 정보기관으로 규정할 만한 증거가 충분치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적용하려는 사기에 의한 범법이나 우편부정 등 그 밖의 어느 범법에도 저촉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더 이상 이 일에 대하여서는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

-법무장관 서 리 '리처드 클라인디 엔스트'-

이 사건은 종결됐습니다. 본인과 한미문화자유재단은 최악의 시련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위원장! 귀하는 오늘 다시 묵은 자료를 되셉고 있습니다. 이미 낡은 모자같이 되어버린 일들을 가지고 새로운 중상적 사건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불쌍한 한국 사람이 한 건의 잘못이나, 불법적인 행위나, 혹은 사소한 금액의 부정이라도 저질렀다면 아마 본인은 오늘 감옥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전면적 폭격 밑에서 살아남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법무성과 연방수사국의 조사는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복된 일입니다. 그들은 본인의 무죄하고 결백함을 온 천하에 드러냈고, 오늘 귀하의 조사가 어리석고 가소로운 시도임을 폭로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해 보아도 귀하는 수세미에서 피를 뽑지는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귀하는 이 이상 더 어떤 괴로움과 박해를 주려는 것입니까? 귀하의 행동은 극악한 인권의 탄압입니다. 확실히 인권을 부르짖는 '카터' 대통령의 양식은 이와 같은 귀하의 무고한 사람에 대한 인권탄압을 묵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박대통령정부에 대한 본인의 의견

본인은 끝으로 박정회 대통령 정부에 대해 본인의 소신을 밝히려 합니다. 1961년, 본인이 무관보좌관이 되어 이 나라에서 근무한 것은 박대통령 정부가 임명한 것이 아님을 몇 번이고 명백히 했습니다. 본인은 박대통령 정부 이전인 장면정권에 의하여 임명받았습니다. 1961년,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때 본인은 '워싱턴'에 있었습니다.

그 소식이 들려 왔을 때 본인은 즉시 '뉴욕 타임스' 지에 편지를 썼습니다. 동 신문은 고맙게도 한국의 군사혁명에 관한 본인의 편지를 게재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1961년 7월 1일자 '편집자에게' 라는 난에 실려졌습니다. 그때의 편지 한 구절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의 정권을 옹호하며 한 육군장교는 군사혁명이 조국을 공산주의로부터 구했다고 선언-

한국의 경우, 군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는 공산주의의 간접침략에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무력을 통한 공산당 지배의 위험이 목전에 다다랐기 때문에 군은 행동으로써 희망없는 상태에서 조국을 구한 것이다. 본인은 한국의 군사혁명이 정상적인 민주주의 절차에 부합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군사혁명이 붕괴 직전에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출 소생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라 확신한다."

이 편지는 본인의 굳은 소신에서 쓴 것이지 '뉴욕 타임스' 지에 편지를 쓰는 것이 무관으로서의 의무나 책임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약 16년, 본인의 소신에는 변함의 없습니다. 본인은 16년 전 본인이 그만한 통찰력과 신념을 가졌던 것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나라와 국민들은 이미 오래 전에 북괴의 손에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본인은 한국에서 살았고, 나라를 위하여 싸웠기 때문에, 1961년의 혼란되고 통제불능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한국과 한국인을 공산주의자들에게 점령당하는 것으로부터 구출해 준 박정희각하께 많은 빛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978년 2월 27일, '워싱턴 포스트' 지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남한 경제력이 북한의 경제력을 압도하다-미국 정보 보고에 의하면 남한은 지난 10년 동안 경제분야에서 북한을 압도해 왔다.

만약 서울측의 수출고가 계속 증가되고 한반도에서 대규모 전쟁만 없다면, 한국은 1980년대에는 경제력이 북한의 거의 3배가 될 것이라고 미 정보국은 예측했다. 몇몇 미국 관측자들은, 남한의 경제 성장의 힘은 서울측의 자주국방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위원장! 이와 같은 사실들은 미국 사람들에게 확실히 잘 알려져있지 않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몇 년 뒤에는 북괴가 남한을 침략할 계획조차 못할 것입니다. 남한과 북괴의 경제력과 국력이 그만큼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국이 충분히 자체를 방위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위험이 전혀 없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국은 이 목표에 크게 성공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오랫동안 한국을 지키고 원조한 그 보람이 이제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위원장! 귀하가 공산당이 아닐진대 어찌하여 남한의 성공을 파괴하려고 하고 북괴에 이로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본인은 공산주의가 하나님과 인류의 적이라고 보는 종교인으로서, 그리고 한국을 신앙의 조국으로 믿고 있는 통일교인으로서 무엇보다도 박 대통령의 업적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인은 이와 같은 지도자를 한국에 내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요,

축복이라 확신합니다. 본인은 신앙의 조국 한국이 또 하나의 월남이 되는 것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혹자는 본인을 한국정부의 호의를 얻으려고 좋게 말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손탁'박사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통일교회가 미국에서 물의를 빛고 있다는 부정적인 여론에 박대통령 정부는 통일교회와 관계가 없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때로는 과격한 반응을 보였으며, 교인들의 여권발급도 곤란을 받은 바 있다.

통일교회가 박대통령 정부의 비밀계획에 연계되었다는 것은 믿기어렵다."

문선명 목사나 통일교회는 충분히 한국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에 설 수도 있으나 문선명 목사는 언제나 우리의 신앙의 원칙을 고수하라고 주장하십니다.

"우리들은 어느 정권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한국을 지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뺏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적 신념이다. "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기독교인이라면 왜 한국정부에 반대하지 않느냐,"하고 묻습니다. 본인은 대답하기를,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한국정부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종교의 자유가 대한민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윈스턴 처칠'경은 말하기를, "완전한 정부는 없으며 민주주의도 불완전하다. 그러나 아직 인류는 그보다 더 좋은 제도를 고안하지 못한 까닭에 민주주의를 택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현 미국정부가 완전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최선의 것을 선택하고 또 더 잘되도록 일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우리들은 박정회 대통령이나 김일성 중에서 택일해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한국(남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면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사실 북괴정권 밑에는 다른 어떤 자유도 없습니다. 남한과 북괴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인권의 귀중함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들의 책임이나 미국의 책임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설혹 우리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들은 충실하게 신앙의 원칙을 고수할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정부에 대한 본인의 입장이며 통일교회의 입장입니다.

위원장! 본인은 결론적으로 최후의 탄원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인이 말씀드린 것이 귀하의 평온을 깨뜨린 것이라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인 개인으로는 귀하에게 적대시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다음에 본인이 귀하를 뵙게 될 때는 아마도 귀하는 미국의 상원의원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인의 탄원은 국제관계소위원회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탄원은 미래를 향한 '비전(Vision)'을 가지고 장차 이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가 될 한 인간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잠시동안 이 조사에 대하여 잊어버립시다. 한국 정보부도 잠시 잊어버립시다. 자유아시아방송도 잠시 잊어버리고, 미국과 한국 두 나라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한미관계는 특별한 운명입니다. 미국이 1945년, 외국 제국주의 압제로부터 이 조그마한 반도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1948년, 새로운 독립국가로 탄생시켰습니다. 1950년,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하여 북괴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위하는 데 앞장 섰습니다. 3년 동안에 미국은 3만여 명의 용감한 군인들을 잃었으며 수만 명의 군인들이 부상했습니다.

미국은 15개 국의 다른 나라들도 초청하여 유엔의 깃발 아래 이조그만 극동의 한반도를 방위하게 했습니다. 1945년부터 미국은 한반도에 전쟁수행과 평화적인 목적을 위하여 1천6백억 달러를 퍼부었습니다

진정 이런 관계는 특별한 운명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도 이와 같은 운명을 계획적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며, 다만 하나님의 뜻에서, 또 예정된 하나님의 섭리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 미국은 월남에서 큰 비극을 겪었습니다. 미국은 월남전쟁에서 전투 그리고 비 전투요원을 합하여 5만 6천5백71명이 희생됐습니다. 그리고 30만 3천6백50명이 부상했습니다. 엄청나게도 2천억 달러가 넘는 돈이 월남에 퍼부어졌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미국의 회생은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불행한 전쟁은 미국역사상 최초로 미국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다릅니다. 한국은 전쟁의 황패 속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 10여 년 동안에 호전적인 적을 눈앞에 두고 번영된 국가 건설에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불과 10여 년 동안에 수출고는 3천만 달러에서 1백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3천5백만 인구를 가진 한국은 세계에서 뛰어난 공업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대한 신념에 차 있습니다.

미국이 낳아 준 30살의 한국은 강력하고 자립하는 나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와 같은 미국과 더룰어 세계의 책임을 나누어 지려는 결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튼튼하게 자라서 마음 속으로부터 낳아 준 은인에게 감사를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또 하나의 가공할 국제공산세력은 한국을 제2의 월남으로 전락시키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대한이 패퇴하기를 바라는 세계공산주의가 있습니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님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여 한국의 적화가 일어나게 하려고 합니다.

전 주 월남 미국대사 '그래함 마틴'씨는 월남전쟁 시대의 반전지도자들의 활약과 음모를 폭로하는 의회 증언에서 이들 공산세력들이 월남함락 이전에 벌써 다음의 목표는 한국이라고 세계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이들 세력들이 성공한다면 한국은 제2의 월남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은 미국과 세계의 비극의 날이 될 것입니다.

물론 한국은 미국의 도움 없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적은 김일성 괴로뿐만 아니라 소련도 중공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한국이 없이는 미국도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자유세계의 장래에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이 제2의 월남이 된다면, 다음 제3의 월남은 틀림없이 일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제4의 월남은 어디있겠습니까?

둘째, 양단된 한국은 세계 분쟁의 축소판입니다. 한국에 일어나는 일은 궁극에는 세계적인 규모로 다시 일어납니다. 미국의 운명과 한국의 운명은 상호 교합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확신하건대 한미양국은 상대국이 없이 서로 생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 말을 하는 것은 다만 한국을 구하기 위한 아전인수격인 발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아는 데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신 말씀 같이 하나님의 뜻은 이 땅 위에 천국을 이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을 공산주의 가운데 이룩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열쇠를 쥔 나라입니다. 한국의 적화는 곧 세계의 적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과 미국이 하나가 되어 공산주의를 이겨주기 바라고 계십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에 의해 넘어지면 공쪽에 가서는 미국도 공산주의앞에 넘어집니다. 한국의 방어는 곧 미국의 방어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없이 미국만 생존할 수 없습니다.

위원장! 이 위원회의 한미관계 조사는 마치 양쪽에 날이 있는 칼과 같습니다. 이 조사는 한미간의 관계를 위하여 크게 공헌할 수도 있고 크게 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조사를 통해서 말할 수 없이 좋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양국정부나 국민들은 다같이 더욱 현명해질 것입니다. 이와같은 상호이해의 교훈 가운데 양국 관계는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그 반면 이 조사는 우리의 공동의 적들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조사는 잘못하면 두 나라의 관계를 영원히 불구로 만들지도 모르며 한 발짝 더 가까이 제2의 월남으로 밀어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하는 이 양면에 날이 선 칼을 쥐고 있습니다. 미래의 역사는 귀하께서 이 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기록할 것입니다.

위원장! 한국의 속담에 교각살우(발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인다)란 말이 있습니다. 또 미국에는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는 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이 격언들은 오늘 이 소위원회의 부당한 조사를 경고하는 데 아주 적절한 격언들입니다. 귀하는 활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원장! 귀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미 두나라의 운명을 해치지 마십시오. 귀하는 전투에 이기고 전쟁에 지지 말고 전투에도 이기고 전쟁에도 이기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귀하는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위원장! 본인의 증언을 청취해 주신 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본인은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하려 합니다.

<미하원 프레이저 위원회 1차 증언>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