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성삼문 선생의 유허비가 있다. 그러나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마모되어 비문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명성에 맞지 않게 썰렁할 만큼 소외되고 있다. 성삼문(成三問)은 사육신의 한 분이다. 사육신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들통나 순절한 여섯 명의 충신이다.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리는 잔혹한 고문도 굴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사육신을 보며 나에게는 역적이지만 후대에는 충신이 되겠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실지로 송시열 등이 계속해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숙종 때 관직을 되찾았으며 시호가 내려졌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낙락장송 되어서/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고려 말의 정몽주와 함께 절의의 상징으로 첫 손에 꼽히는 성삼문의 시조이다. 성삼문은 세조의 회유와 탄압에 ‘충신불사이군’이라며 죽음을 택했다. 매죽헌 성삼문(1418~1456)은 태종 18년에 아버지 도총관 성승과 어머니 박씨의 장남으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적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묻는 소리가 세 번 들렸다 하여 삼문이라 불렀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서 신숙주 등과 어학의 음운과 사성을 연구하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크게 공헌한 분이다. 노은단으로 들어선다. 노은단은 숙종 때 성삼문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노은서원이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고 인근에 성삼문의 위패를 묻은 곳이다. 대문을 밀치고 계단을 오르니 뫼처럼 둥근 봉분이 있다. 봉분은 잔디 대신 잡풀 속에 어쩌자고 닭의장풀이라고 불리며 보랏빛 꽃을 피우는 달개비에 쑥이 무성하게 자랐다. 풀숲에서 느닷없이 산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곤히 잠들었다 달아나는 쪽으로 하얀 민들레꽃이 천연덕스럽다. 봉분의 뒤쪽 담장 너머에서 훌쩍 올라온 검붉은 빛깔의 엉겅퀴꽃이 참으로 야릇하며 알쏭달쏭하다. 뻐꾹 뻐꾹 울음소리가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첫댓글 최고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