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프카즈 일기 15 / 카라반 사라이caravan sarai
비단
비단도 외로울 때가 있다 사마르칸트에서도 쉬지 못하고 부하라에서도 잠을 설치고 셰키 칸의 궁정에서도 흥정이 안 되고 이스탄불에서도 임자를 못 만나 떠도는 날은 비단의 마음에도 슬픔이 일 때가 있다 누에의 집을 껴안고 잠 못 이루는 밤은 비단의 가슴도 눈물로 젖을 때가 있다 너무 젖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만큼 한 생이 고단한 날은 차라리 낙타의 등에 누워 쉬는 대신 자기보다 더 고달픈 낙타를 업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
15. 카라반 사라이 caravan sarai
카라반 사라이
실크로드의 길목마다 있었던 대상 숙소
사라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규모다
문물의 교역장소
식량과 물과 생필품의 중간보급소 역할도 하던 곳
휴식의 공간이자 숙소
낙타도 쉬고 낙타의 주인도 쉬어 가야 한다
여정은 너무도 머나먼 길이었기에
낙타가 하루 동안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인
대략 45킬로미터 정도마다
카라반들이 묵어갈 숙소를 마련해 두었었다
지친 카라반이 쉴 숙소와
몸을 씻을 공간과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할 수 있는
일종의 재래식 시장공간인 바자르Bazaar가 들어서 있고
낙타들의 휴식공간이 두루 구비된 곳
내가 본 카라반 사라이는 크고 아늑했다
나도 하룻밤쯤 그곳에서 묵어가고 싶었다
숙소 안을 들여다볼 때마다
내 마음은 벌써 실크로드를 누비는
길 위의 카라반이었다
페르시아 속담은 말한다
왕이 미치면
카프카즈로 전쟁하러 간다
광기의 대상이
하필이면 카프카즈인가
술탄은 마음만 먹으면 세계의 지도를
마음대로 다시 그렸던가
페르시아 제국의 위엄은 쓸 곳이 없어
마음이 동하면 전쟁도 한갓 놀이였던가
그러나 오늘은 광기에 사로잡힌 술탄도 가고 없고
카프카즈의 족속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침략자에게 함부로 내어줄 마음이 없다
실크로드는 바람에 불려 흩어졌고
길을 잃은 비단은 이제 오지 않는다
카라반 사라이는 지금은 텅 비어 있다
춤추고 노래하던 풍요의 시대는 가고 없다
카라반 사라이에는 이제
옛 실크로드의 추억의 향수를 달래려는
여행자들의 숙소로 이용될 뿐
아무리 기다려도 낙타는 오지 않는다
카라반 사라이caravan sarai는 카라반의 숙소
이 물건은 옛 물건이다
이 추억은 옛 추억이어서
다시는 꺼내서 쓸 수도 없는 아주 낡은 추억이다
카라반의 숙소는 시간의 역사 속으로 잦아들었다
나는 카라반 사라이의 내부를 들여다볼 적마다
웬일인지 비감에 잠긴다
한때 화려했던 곳
비단이 붐비고
장사꾼이 붐비고
흥청대던 이역의 문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곳
여행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하룻밤쯤 묵어가고 싶은 곳
그러나 오늘의 텅 빈 공간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역사도 저렇게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속절없는 비애에 잠긴다
아, 비단의 찬란한 기억들도 티끌 속에 묻힐 수 있다니!
그토록 떠들썩하던 풍요의 공간은
무로 돌아가 추억에서 멀리 잊혀질 수 있다니!
꿈 많은 대상隊商들과
사막을 건너던 고독한 낙타들과
낙타의 등에 실린 비단의 기억들은 모두 사라지고
카라반 사라이는 먼지 속에 천천히 풍화되고 있다
카라반 사라이는 복층건물
1층은 비단을 거래하거나 다른 물품들을 사고팔고
2층은 카라반 곧 대상隊商 숙소
외관과는 달리 안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옹색하지 않다
아래층 평지에 조성된 ‘ㄷ’자 모양의 정원은
차를 마시거나
한담을 나누면서 휴식하는 공간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행자들의 숙소나 식당으로 쓰여
시즌이 지나고 나면 쓸쓸해진다
내가 본 숙소는 적막감만 감돌았다
셰키는 코카서스산맥의 한 자락인
해발 700미터에 위치한 조그마한 한촌
오랜 옛적, 사철 노래와 춤과 술이 있었을 저 공간
밤은 짧고
흥정은 길고
인심은 너그러워
이슬람을 뛰어넘고
기독교를 뛰어넘고
토속종교를 뛰어넘으며
세상의 끝에서 찾아온 서로 다른 혈통의
종족들의 인파들로 북적거렸으리라
삶의 중심에 비단이 있어
이질적인 문화가 한데 어울려
기도를 주고받고
신을 주고받고
서로의 문화를 나누어가졌으리라
사마르칸트에서 내가 본 카라반 사라이도
부하라에서 본 카라반 사라이도
히바에서 본 카라반 사라이도
내 마음을 흔드는 인간사의 애잔한 역사가 있었다
인구는 적고
낙타는 흔하고
비단이 산을 이룬 시대의 꿈결 같던 강물의 소리여
영화의 부피가 거대했기에
사라진 꿈결은 이토록 초라하구나
세키 칸은 마음에 드는 비단을 구했을까
여염은 실크의 빛깔을 몸에 둘러봤을까
비단의 흥망을 따라 출렁이던 실크로드여
오늘은 달빛을 등에 싣고 길을 떠난
낙타 한 마리도 가고 없구나
서안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던 길이여
오늘은 그 영광의 길도
바람에 불리어서 흩어졌구나
날이 저물도록
바람 속에 서서 아무리 기다려도
내 마음의 낙타는 오지 않는구나
(이어짐)
첫댓글 실크로드 시대의 여행객을 맞이했던 카프카즈의 대 상인들의 숙소가 몇 백년이 흐른 지금도 저리 깨긋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ㅛ. 멋있어요, 1층은 상업거래 2층은 숙소 여행객의 피로까지 풀어주는 참 안식처였을 것 같네요. 문화과 과학의 발달이 이런 안식처도 역사의 뒤안길에서 잠을 자고 관광객에게 추억과 역사를 이야기 해주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