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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15일, 백낙청을 비롯한 몇 사람이 기성 문단의 보수 이데올로기에 맞서 자본주의와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고 민족 통일을 추구하는 진보적 민족 문학을 일궈나가자는 데 뜻을 모은다. 그리고 “문학은 현실의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야 하며 현실 구성원이 처한 위기를 반영해야 하고 나아가 그 구성원 대다수의 복지를 위한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적 의식을 내세운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창간한다. 잡지의 제호인 『창작과 비평』은 백낙청이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각주1)
이상이 메마르고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나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작가와 비평가가 힘을 모으고 문인과 여타 지식인들이 힘을 나누며 대다수 민중의 가장 깊은 염원과 소수 엘리트의 가장 높은 기대에 보답하는 동시에 동양 역사의 갱생을 준비하는 작업이 이 땅의 어느 한 구석에서나 진행되어야 한다.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 비평』 창간호(1966)
맹목적인 순수 문학에 대해 강력한 비판의 자세를 취하며 나타난 〈창작과 비평〉 창간호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창작과 비평』은 맹목적인 순수 문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함께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며 등장한 이래 민족 민중 문학 노선을 견지한다. 민족 문학론, 분단 체제론, 근대 극복론으로 이어지는 ‘창비’의 문제 의식은 비단 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과학 분야에서도 당대의 문제 의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창간 때부터 창비는 참여 · 순수 논쟁과 관련해 선동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좀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할 것을 결의한다. 특히 이 잡지를 주도한 백낙청은 우리 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관행과 신비화된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창작과 비평’을 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순수주의를 고집하는 입장은 서구 예술가들의 경우와도 또 다르다. 건실한 중산 계급의 발전을 본 일 없는 한국 사회에 유럽 부르주아 시대의 예술 신조가 뿌리박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금과 옥조인 양 내세우는 것은 제대로 정리 안 된 전근대적 자세를 제대로 소화 못한 근대 서구 예술의 이론을 빌려 옹호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치, 경제 면에서 유럽 중산층의 정치, 경제 이념을 핑계로 한국의 후진적 사회 구조를 견지하려는 것과 정확히 대응되는 현상이다.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 비평』 창간호(1966)
〈창작과 비평〉 100호(1998 여름)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편집인이자 창간 주역인 백낙청을 빼놓고 창비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간호에 실린 권두 논문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에서 그는 기존의 순수 문학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문학의 현실 참여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창비의 창간 정신이자 기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 문학론을 비롯해 리얼리즘론, 분단 체제론, 사회 구성체론 등을 통해 드러난 창비의 노선은 이념에 대한 백낙청의 끊임없는 지적 탐구의 궤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중간에 잠깐 자리를 비운 적이 있을 뿐 창간 때부터 이마적까지 거의 내내 편집인의 자리를 지킨다. 그의 주요 평론이 대부분 창비 지면을 통해 발표되고, 그의 주장이 곧 창비의 목소리로 인식되는 등 창비는 백낙청 개인의 주장과 이론을 충실히 반영해왔다.
『창작과 비평』 창간호에는 백낙청의 논문을 비롯해 유종호의 평론, 이호철과 김승옥의 소설, 그리고 사르트르의 평론 「현대의 상황과 지성」 같은 몇 편의 번역문과 서평이 실린다. 창간호 이후에는 문학 작품을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경제 · 미술 · 민속 등에도 관심을 보여 계간지로서 좀더 포괄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백낙청의 의도와는 달리, 이후 실제 문학 이론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사르트르나 하우저 등의 외국 문학 이론을 차용한다든가 4·19를 서구 시민 혁명의 잣대로 분석하는 등 서구 편향적 엘리트주의가 엿보인다는 지적도 받는다.
처음 한동안 창비는 백낙청 등의 주도로 서울 공평동 태을다방 옆에 있던 조그만 출판사인 ‘문우출판사’를 빌려 일조각에서 발행한다. 그러다가 1969년 가을 · 겨울호부터 ‘창작과비평사’로 독립해 발행을 이어간다. 창비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 적지 않은 시련을 겪는다. 김지하의 시가 실린 1975년 봄호는 긴급 조치 9호에 의해 회수되며, 1977년 편역자 리영희와 발행인 백낙청 교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기도 한다. 1980년에는 내용 가운데 일부가 삭제되는 등 검열을 받다가 비상 계엄하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의해 여름호(56호) 발행 뒤 강제 폐간되기에 이른다. 이후 1985년에 부정기 간행물 1호 『창작과 비평』 57호를 내놓으나 12월 들어 불법으로 정기 간행물을 펴냈다고 해서 출판사 등록마저 취소되고 만다.
이에 1988년 작가, 교수, 언론인, 종교 지도자, 법조인 등 지식인들이 서명한 ‘창작과비평사의 등록 취소에 관한 범지식인 2853명의 건의문’이 나온다. 이와 같은 나라 안팎에서의 항의 운동과 창비 복간 지지로 1988년 봄 마침내 복간호가 빛을 본다. 그러나 시련은 이어져 1989년 겨울호에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었다는 이유로 이시영 주간 등이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는 수난을 겪는다.
1988년 봄에 나온 〈창작과 비평〉 복간호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잡지를 통해 등단한 문인으로는 소설 부문의 박태순 · 송영 · 방영웅 · 최창학 · 홍희담 · 공지영, 시 부문의 민용태 · 최민 · 김창범 · 김정환 · 김용택 · 최영미 등이 있다. 이른바 ‘창비 사단’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주요 활동 문인으로는 시 부문의 김수영 · 신동엽 · 신경림 · 고은 · 조태일 · 김지하 · 이시영 · 곽재구 · 김정환 · 김용택 · 최영미, 소설 부문의 김정한 · 이호철 · 천승세 · 서정인 · 방영웅 · 송기숙 · 박완서 · 이문구 · 현기영 · 황석영 · 윤정모 · 김영현 · 공지영 · 방현석 · 김하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창작과 비평』은 1970년에 『문학과 지성』이 창간된 뒤부터 차별화를 의식한 까닭인지 리영희 · 박현채 · 강만길 · 신용하 · 안병직 등 체제 비판적인 사회 과학 또는 인문 과학 분야의 학자들과 소설가 황석영, 시인 김지하 등의 활약이 눈부시게 펼쳐지면서 현실 참여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한다.
이윽고 창비는 식민 사관의 극복, 민족 ·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 새로운 진로의 모색에 전위 구실을 함으로써 “이론과 실천의 일체화를 내건 민주화 운동”의 상징 잡지로 자리잡는다. 뒷날 비평가 김윤식은 『창작과 비평』의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한다.
이 얄팍한 계간지 속에 70년대 문학을 폭파하고도 남는 폭약이 장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양호, 「순수 · 참여론의 대립기」 ― 『한국 현대 문학사』(현대문학, 1994) 재인용
『창작과 비평』을 말할 때 으레 따르는 것이 『문학과 지성』과의 비교다. 두 잡지는 당시 평단의 쟁점으로 떠오르곤 하던 리얼리즘론, 농민 문학론, 민족 문학론 등에서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인다. 순수 문학을 비판하는 창비의 목소리와 달리 참여에 제약을 가하는 ‘문지’의 순수 · 참여론을 비롯해, 문지의 소시민 개념에 대응해 창비의 백낙청이 「시민 문학론」을 발표하는 등 두 잡지의 논쟁은 1970년대 내내 이어진다.
두 문예지는 성향이 워낙 달라서, 창비가 민중 · 민족 · 현실의 특수성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중시했다면, 문지는 지성 · 문화 · 이론 같은 보편성을 추구했으며 개체적인 실존 의식에 관심을 보인다. 아울러 창비가 우리 문학의 주체적인 위상을 확립하고자 다소 폐쇄성이 느껴지는 태도를 취한 것과 달리, 문지는 서양의 문학 이론 등에 대해 한결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1970년대 한국 문학의 구도를 『창작과 비평』(1966) ·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4)와, 순수 문학론 · 민족 문학론에 유보적 거리를 두고 있는 『문학과 지성』(1970), 『세계의 문학』(1976)의 대립으로 폭을 넓혀 파악하는 비평가도 없지 않다. 최원식은 이 두 집단의 대립이 일종의 “생산적 긴장” 관계를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돌이켜보건대 70년대 문학은 아마도 그 가혹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30년대 문학에 버금갈 만한 창조적 재능으로 빛났으니, 두 그룹의 대립은 소모적 측면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대체로 보아서 계간지의 역할 증대 속에서 일종의 생산적 긴장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터이다.
최원식, 「80년대 문학운동의 비판적 점검」, 『생산적인 대화를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97)
1970년대에 한국 문학계의 발전을 이끈 창비와 문지는 1980년대 들머리에 나란히 폐간을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한다. 두 잡지는 특히 대립과 논쟁 속에서 우리 비평 문학의 수준을 적잖게 끌어올린다.
창비는 이마적에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창비를 만들어 이끌던 백낙청이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변화의 상징이자 신호탄인 셈이다. 이 변화는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고 소장 학자들을 편집 자문 위원으로 영입하는 등 세대 교체의 의미를 띠고 있다. 백낙청에 이어 주간 자리를 차지한 최원식은 “양심적 지식 사회와의 광범한 연대를 바탕으로 문학과 사회 양쪽에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민중적 의제(議題)의 탐구”에 힘써온 창비가 이제 사회와 자본의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의 우상에 둘러싸인 개발 독재의 망령과 시장의 우상을 섬기는 신자유주의의 대공세를 가로질러 우리 사회를 운용할 새로운 원리를 어떻게 생활 속에서 발견할 것인가. 이 젊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창비는 새 개념의 창안, 새 능력의 개발, 새로운 관계망의 구축 속에서 부단히 젊어질 것이다.
최원식, 「‘저항’에서 ‘대중 속으로’ 변신 모색」, 『중앙일보』(1999. 8. 17.)
“대중 속으로”는 변화를 위한 몸부림 속에서 창비가 새로 찾아낸 화두다. 그러나 이마적에 들어 ‘창비’는 시류를 좇아 변신한다는 비판과, 구태를 벗지 못하고 스스로 세운 틀에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1990년대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한 『소설 동의보감』 ·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등이 잇달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창비 상업주의’라는 말까지 나돌기도 한다. 이에 대해 창비측은 “창비의 상업성이야말로 창비의 실력”이라며 일반 독자의 독서 수준을 높였다는 자부심과각주2) “민중과 그만큼 함께 해왔으니 민중의 정서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독자의 견해를 함께 밝히기도 한다.각주3)
창간호 2천 부를 발행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창작과 비평』은 2만여 부를 발행하고 있다. 창비는 1996년 창간 30주년 기념호에서 폐쇄성이 느껴진다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것인지 “한결같되 날로 새로운, 나날이 새로워지되 한결같은 잡지”라는 기념사를 내놓기도 한다. 1998년 3월부터는 인터넷 사이트 창비 홈페이지 ‘Digital Changbi(http://www.changbi.co.kr)’를 개설해 정보 서비스도 하고 있다.
이상이 메마르고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나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작가와 비평가가 힘을 모으고 문인과 여타 지식인들이 힘을 나누며 대다수 민중의 가장 깊은 염원과 소수 엘리트의 가장 높은 기대에 보답하는 동시에 동양 역사의 갱생을 준비하는 작업이 이 땅의 어느 한 구석에서나 진행되어야 한다.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 비평』 창간호(1966)
맹목적인 순수 문학에 대해 강력한 비판의 자세를 취하며 나타난 〈창작과 비평〉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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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은 맹목적인 순수 문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함께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며 등장한 이래 민족 민중 문학 노선을 견지한다. 민족 문학론, 분단 체제론, 근대 극복론으로 이어지는 ‘창비’의 문제 의식은 비단 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과학 분야에서도 당대의 문제 의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창간 때부터 창비는 참여 · 순수 논쟁과 관련해 선동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좀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할 것을 결의한다. 특히 이 잡지를 주도한 백낙청은 우리 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관행과 신비화된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창작과 비평’을 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순수주의를 고집하는 입장은 서구 예술가들의 경우와도 또 다르다. 건실한 중산 계급의 발전을 본 일 없는 한국 사회에 유럽 부르주아 시대의 예술 신조가 뿌리박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금과 옥조인 양 내세우는 것은 제대로 정리 안 된 전근대적 자세를 제대로 소화 못한 근대 서구 예술의 이론을 빌려 옹호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치, 경제 면에서 유럽 중산층의 정치, 경제 이념을 핑계로 한국의 후진적 사회 구조를 견지하려는 것과 정확히 대응되는 현상이다.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 비평』 창간호(1966)
〈창작과 비평〉 100호(1998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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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이자 창간 주역인 백낙청을 빼놓고 창비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간호에 실린 권두 논문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에서 그는 기존의 순수 문학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문학의 현실 참여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창비의 창간 정신이자 기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 문학론을 비롯해 리얼리즘론, 분단 체제론, 사회 구성체론 등을 통해 드러난 창비의 노선은 이념에 대한 백낙청의 끊임없는 지적 탐구의 궤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중간에 잠깐 자리를 비운 적이 있을 뿐 창간 때부터 이마적까지 거의 내내 편집인의 자리를 지킨다. 그의 주요 평론이 대부분 창비 지면을 통해 발표되고, 그의 주장이 곧 창비의 목소리로 인식되는 등 창비는 백낙청 개인의 주장과 이론을 충실히 반영해왔다.
『창작과 비평』 창간호에는 백낙청의 논문을 비롯해 유종호의 평론, 이호철과 김승옥의 소설, 그리고 사르트르의 평론 「현대의 상황과 지성」 같은 몇 편의 번역문과 서평이 실린다. 창간호 이후에는 문학 작품을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경제 · 미술 · 민속 등에도 관심을 보여 계간지로서 좀더 포괄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백낙청의 의도와는 달리, 이후 실제 문학 이론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사르트르나 하우저 등의 외국 문학 이론을 차용한다든가 4·19를 서구 시민 혁명의 잣대로 분석하는 등 서구 편향적 엘리트주의가 엿보인다는 지적도 받는다.
처음 한동안 창비는 백낙청 등의 주도로 서울 공평동 태을다방 옆에 있던 조그만 출판사인 ‘문우출판사’를 빌려 일조각에서 발행한다. 그러다가 1969년 가을 · 겨울호부터 ‘창작과비평사’로 독립해 발행을 이어간다. 창비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 적지 않은 시련을 겪는다. 김지하의 시가 실린 1975년 봄호는 긴급 조치 9호에 의해 회수되며, 1977년 편역자 리영희와 발행인 백낙청 교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기도 한다. 1980년에는 내용 가운데 일부가 삭제되는 등 검열을 받다가 비상 계엄하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의해 여름호(56호) 발행 뒤 강제 폐간되기에 이른다. 이후 1985년에 부정기 간행물 1호 『창작과 비평』 57호를 내놓으나 12월 들어 불법으로 정기 간행물을 펴냈다고 해서 출판사 등록마저 취소되고 만다.
이에 1988년 작가, 교수, 언론인, 종교 지도자, 법조인 등 지식인들이 서명한 ‘창작과비평사의 등록 취소에 관한 범지식인 2853명의 건의문’이 나온다. 이와 같은 나라 안팎에서의 항의 운동과 창비 복간 지지로 1988년 봄 마침내 복간호가 빛을 본다. 그러나 시련은 이어져 1989년 겨울호에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었다는 이유로 이시영 주간 등이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는 수난을 겪는다.
1988년 봄에 나온 〈창작과 비평〉 복간호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잡지를 통해 등단한 문인으로는 소설 부문의 박태순 · 송영 · 방영웅 · 최창학 · 홍희담 · 공지영, 시 부문의 민용태 · 최민 · 김창범 · 김정환 · 김용택 · 최영미 등이 있다. 이른바 ‘창비 사단’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주요 활동 문인으로는 시 부문의 김수영 · 신동엽 · 신경림 · 고은 · 조태일 · 김지하 · 이시영 · 곽재구 · 김정환 · 김용택 · 최영미, 소설 부문의 김정한 · 이호철 · 천승세 · 서정인 · 방영웅 · 송기숙 · 박완서 · 이문구 · 현기영 · 황석영 · 윤정모 · 김영현 · 공지영 · 방현석 · 김하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창작과 비평』은 1970년에 『문학과 지성』이 창간된 뒤부터 차별화를 의식한 까닭인지 리영희 · 박현채 · 강만길 · 신용하 · 안병직 등 체제 비판적인 사회 과학 또는 인문 과학 분야의 학자들과 소설가 황석영, 시인 김지하 등의 활약이 눈부시게 펼쳐지면서 현실 참여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한다.
이윽고 창비는 식민 사관의 극복, 민족 ·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 새로운 진로의 모색에 전위 구실을 함으로써 “이론과 실천의 일체화를 내건 민주화 운동”의 상징 잡지로 자리잡는다. 뒷날 비평가 김윤식은 『창작과 비평』의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한다.
이 얄팍한 계간지 속에 70년대 문학을 폭파하고도 남는 폭약이 장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양호, 「순수 · 참여론의 대립기」 ― 『한국 현대 문학사』(현대문학, 1994) 재인용
『창작과 비평』을 말할 때 으레 따르는 것이 『문학과 지성』과의 비교다. 두 잡지는 당시 평단의 쟁점으로 떠오르곤 하던 리얼리즘론, 농민 문학론, 민족 문학론 등에서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인다. 순수 문학을 비판하는 창비의 목소리와 달리 참여에 제약을 가하는 ‘문지’의 순수 · 참여론을 비롯해, 문지의 소시민 개념에 대응해 창비의 백낙청이 「시민 문학론」을 발표하는 등 두 잡지의 논쟁은 1970년대 내내 이어진다.
두 문예지는 성향이 워낙 달라서, 창비가 민중 · 민족 · 현실의 특수성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중시했다면, 문지는 지성 · 문화 · 이론 같은 보편성을 추구했으며 개체적인 실존 의식에 관심을 보인다. 아울러 창비가 우리 문학의 주체적인 위상을 확립하고자 다소 폐쇄성이 느껴지는 태도를 취한 것과 달리, 문지는 서양의 문학 이론 등에 대해 한결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1970년대 한국 문학의 구도를 『창작과 비평』(1966) ·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4)와, 순수 문학론 · 민족 문학론에 유보적 거리를 두고 있는 『문학과 지성』(1970), 『세계의 문학』(1976)의 대립으로 폭을 넓혀 파악하는 비평가도 없지 않다. 최원식은 이 두 집단의 대립이 일종의 “생산적 긴장” 관계를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돌이켜보건대 70년대 문학은 아마도 그 가혹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30년대 문학에 버금갈 만한 창조적 재능으로 빛났으니, 두 그룹의 대립은 소모적 측면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대체로 보아서 계간지의 역할 증대 속에서 일종의 생산적 긴장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터이다.
최원식, 「80년대 문학운동의 비판적 점검」, 『생산적인 대화를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97)
1970년대에 한국 문학계의 발전을 이끈 창비와 문지는 1980년대 들머리에 나란히 폐간을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한다. 두 잡지는 특히 대립과 논쟁 속에서 우리 비평 문학의 수준을 적잖게 끌어올린다.
창비는 이마적에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창비를 만들어 이끌던 백낙청이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변화의 상징이자 신호탄인 셈이다. 이 변화는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고 소장 학자들을 편집 자문 위원으로 영입하는 등 세대 교체의 의미를 띠고 있다. 백낙청에 이어 주간 자리를 차지한 최원식은 “양심적 지식 사회와의 광범한 연대를 바탕으로 문학과 사회 양쪽에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민중적 의제(議題)의 탐구”에 힘써온 창비가 이제 사회와 자본의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의 우상에 둘러싸인 개발 독재의 망령과 시장의 우상을 섬기는 신자유주의의 대공세를 가로질러 우리 사회를 운용할 새로운 원리를 어떻게 생활 속에서 발견할 것인가. 이 젊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창비는 새 개념의 창안, 새 능력의 개발, 새로운 관계망의 구축 속에서 부단히 젊어질 것이다.
최원식, 「‘저항’에서 ‘대중 속으로’ 변신 모색」, 『중앙일보』(1999. 8. 17.)
“대중 속으로”는 변화를 위한 몸부림 속에서 창비가 새로 찾아낸 화두다. 그러나 이마적에 들어 ‘창비’는 시류를 좇아 변신한다는 비판과, 구태를 벗지 못하고 스스로 세운 틀에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1990년대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한 『소설 동의보감』 ·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등이 잇달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창비 상업주의’라는 말까지 나돌기도 한다. 이에 대해 창비측은 “창비의 상업성이야말로 창비의 실력”이라며 일반 독자의 독서 수준을 높였다는 자부심과각주2) “민중과 그만큼 함께 해왔으니 민중의 정서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독자의 견해를 함께 밝히기도 한다.각주3)
창간호 2천 부를 발행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창작과 비평』은 2만여 부를 발행하고 있다. 창비는 1996년 창간 30주년 기념호에서 폐쇄성이 느껴진다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것인지 “한결같되 날로 새로운, 나날이 새로워지되 한결같은 잡지”라는 기념사를 내놓기도 한다. 1998년 3월부터는 인터넷 사이트 창비 홈페이지 ‘Digital Changbi(http://www.changbi.co.kr)’를 개설해 정보 서비스도 하고 있다.
맹목적인 순수 문학에 대해 강력한 비판의 자세를 취하며 나타난 〈창작과 비평〉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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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은 맹목적인 순수 문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함께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며 등장한 이래 민족 민중 문학 노선을 견지한다. 민족 문학론, 분단 체제론, 근대 극복론으로 이어지는 ‘창비’의 문제 의식은 비단 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과학 분야에서도 당대의 문제 의식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창간 때부터 창비는 참여 · 순수 논쟁과 관련해 선동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좀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할 것을 결의한다. 특히 이 잡지를 주도한 백낙청은 우리 문학을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관행과 신비화된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창작과 비평’을 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순수주의를 고집하는 입장은 서구 예술가들의 경우와도 또 다르다. 건실한 중산 계급의 발전을 본 일 없는 한국 사회에 유럽 부르주아 시대의 예술 신조가 뿌리박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금과 옥조인 양 내세우는 것은 제대로 정리 안 된 전근대적 자세를 제대로 소화 못한 근대 서구 예술의 이론을 빌려 옹호하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이것은 정치, 경제 면에서 유럽 중산층의 정치, 경제 이념을 핑계로 한국의 후진적 사회 구조를 견지하려는 것과 정확히 대응되는 현상이다.
백낙청,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작과 비평』 창간호(1966)
〈창작과 비평〉 100호(1998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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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이자 창간 주역인 백낙청을 빼놓고 창비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간호에 실린 권두 논문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에서 그는 기존의 순수 문학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문학의 현실 참여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창비의 창간 정신이자 기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 문학론을 비롯해 리얼리즘론, 분단 체제론, 사회 구성체론 등을 통해 드러난 창비의 노선은 이념에 대한 백낙청의 끊임없는 지적 탐구의 궤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중간에 잠깐 자리를 비운 적이 있을 뿐 창간 때부터 이마적까지 거의 내내 편집인의 자리를 지킨다. 그의 주요 평론이 대부분 창비 지면을 통해 발표되고, 그의 주장이 곧 창비의 목소리로 인식되는 등 창비는 백낙청 개인의 주장과 이론을 충실히 반영해왔다.
『창작과 비평』 창간호에는 백낙청의 논문을 비롯해 유종호의 평론, 이호철과 김승옥의 소설, 그리고 사르트르의 평론 「현대의 상황과 지성」 같은 몇 편의 번역문과 서평이 실린다. 창간호 이후에는 문학 작품을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경제 · 미술 · 민속 등에도 관심을 보여 계간지로서 좀더 포괄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백낙청의 의도와는 달리, 이후 실제 문학 이론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사르트르나 하우저 등의 외국 문학 이론을 차용한다든가 4·19를 서구 시민 혁명의 잣대로 분석하는 등 서구 편향적 엘리트주의가 엿보인다는 지적도 받는다.
처음 한동안 창비는 백낙청 등의 주도로 서울 공평동 태을다방 옆에 있던 조그만 출판사인 ‘문우출판사’를 빌려 일조각에서 발행한다. 그러다가 1969년 가을 · 겨울호부터 ‘창작과비평사’로 독립해 발행을 이어간다. 창비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 적지 않은 시련을 겪는다. 김지하의 시가 실린 1975년 봄호는 긴급 조치 9호에 의해 회수되며, 1977년 편역자 리영희와 발행인 백낙청 교수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되기도 한다. 1980년에는 내용 가운데 일부가 삭제되는 등 검열을 받다가 비상 계엄하의 언론 통폐합 조치에 의해 여름호(56호) 발행 뒤 강제 폐간되기에 이른다. 이후 1985년에 부정기 간행물 1호 『창작과 비평』 57호를 내놓으나 12월 들어 불법으로 정기 간행물을 펴냈다고 해서 출판사 등록마저 취소되고 만다.
이에 1988년 작가, 교수, 언론인, 종교 지도자, 법조인 등 지식인들이 서명한 ‘창작과비평사의 등록 취소에 관한 범지식인 2853명의 건의문’이 나온다. 이와 같은 나라 안팎에서의 항의 운동과 창비 복간 지지로 1988년 봄 마침내 복간호가 빛을 본다. 그러나 시련은 이어져 1989년 겨울호에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실었다는 이유로 이시영 주간 등이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는 수난을 겪는다.
1988년 봄에 나온 〈창작과 비평〉 복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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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지를 통해 등단한 문인으로는 소설 부문의 박태순 · 송영 · 방영웅 · 최창학 · 홍희담 · 공지영, 시 부문의 민용태 · 최민 · 김창범 · 김정환 · 김용택 · 최영미 등이 있다. 이른바 ‘창비 사단’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주요 활동 문인으로는 시 부문의 김수영 · 신동엽 · 신경림 · 고은 · 조태일 · 김지하 · 이시영 · 곽재구 · 김정환 · 김용택 · 최영미, 소설 부문의 김정한 · 이호철 · 천승세 · 서정인 · 방영웅 · 송기숙 · 박완서 · 이문구 · 현기영 · 황석영 · 윤정모 · 김영현 · 공지영 · 방현석 · 김하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창작과 비평』은 1970년에 『문학과 지성』이 창간된 뒤부터 차별화를 의식한 까닭인지 리영희 · 박현채 · 강만길 · 신용하 · 안병직 등 체제 비판적인 사회 과학 또는 인문 과학 분야의 학자들과 소설가 황석영, 시인 김지하 등의 활약이 눈부시게 펼쳐지면서 현실 참여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한다.
이윽고 창비는 식민 사관의 극복, 민족 ·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 새로운 진로의 모색에 전위 구실을 함으로써 “이론과 실천의 일체화를 내건 민주화 운동”의 상징 잡지로 자리잡는다. 뒷날 비평가 김윤식은 『창작과 비평』의 영향력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로 요약한다.
이 얄팍한 계간지 속에 70년대 문학을 폭파하고도 남는 폭약이 장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양호, 「순수 · 참여론의 대립기」 ― 『한국 현대 문학사』(현대문학, 1994) 재인용
『창작과 비평』을 말할 때 으레 따르는 것이 『문학과 지성』과의 비교다. 두 잡지는 당시 평단의 쟁점으로 떠오르곤 하던 리얼리즘론, 농민 문학론, 민족 문학론 등에서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인다. 순수 문학을 비판하는 창비의 목소리와 달리 참여에 제약을 가하는 ‘문지’의 순수 · 참여론을 비롯해, 문지의 소시민 개념에 대응해 창비의 백낙청이 「시민 문학론」을 발표하는 등 두 잡지의 논쟁은 1970년대 내내 이어진다.
두 문예지는 성향이 워낙 달라서, 창비가 민중 · 민족 · 현실의 특수성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의 연대 의식을 중시했다면, 문지는 지성 · 문화 · 이론 같은 보편성을 추구했으며 개체적인 실존 의식에 관심을 보인다. 아울러 창비가 우리 문학의 주체적인 위상을 확립하고자 다소 폐쇄성이 느껴지는 태도를 취한 것과 달리, 문지는 서양의 문학 이론 등에 대해 한결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태도를 취한다. 1970년대 한국 문학의 구도를 『창작과 비평』(1966) · 자유실천문인협의회(1974)와, 순수 문학론 · 민족 문학론에 유보적 거리를 두고 있는 『문학과 지성』(1970), 『세계의 문학』(1976)의 대립으로 폭을 넓혀 파악하는 비평가도 없지 않다. 최원식은 이 두 집단의 대립이 일종의 “생산적 긴장” 관계를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돌이켜보건대 70년대 문학은 아마도 그 가혹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30년대 문학에 버금갈 만한 창조적 재능으로 빛났으니, 두 그룹의 대립은 소모적 측면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닐지라도 대체로 보아서 계간지의 역할 증대 속에서 일종의 생산적 긴장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터이다.
최원식, 「80년대 문학운동의 비판적 점검」, 『생산적인 대화를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97)
1970년대에 한국 문학계의 발전을 이끈 창비와 문지는 1980년대 들머리에 나란히 폐간을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한다. 두 잡지는 특히 대립과 논쟁 속에서 우리 비평 문학의 수준을 적잖게 끌어올린다.
창비는 이마적에 변화의 물결을 맞고 있다. 창비를 만들어 이끌던 백낙청이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변화의 상징이자 신호탄인 셈이다. 이 변화는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하고 소장 학자들을 편집 자문 위원으로 영입하는 등 세대 교체의 의미를 띠고 있다. 백낙청에 이어 주간 자리를 차지한 최원식은 “양심적 지식 사회와의 광범한 연대를 바탕으로 문학과 사회 양쪽에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할 민중적 의제(議題)의 탐구”에 힘써온 창비가 이제 사회와 자본의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의 우상에 둘러싸인 개발 독재의 망령과 시장의 우상을 섬기는 신자유주의의 대공세를 가로질러 우리 사회를 운용할 새로운 원리를 어떻게 생활 속에서 발견할 것인가. 이 젊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창비는 새 개념의 창안, 새 능력의 개발, 새로운 관계망의 구축 속에서 부단히 젊어질 것이다.
최원식, 「‘저항’에서 ‘대중 속으로’ 변신 모색」, 『중앙일보』(1999. 8. 17.)
“대중 속으로”는 변화를 위한 몸부림 속에서 창비가 새로 찾아낸 화두다. 그러나 이마적에 들어 ‘창비’는 시류를 좇아 변신한다는 비판과, 구태를 벗지 못하고 스스로 세운 틀에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1990년대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한 『소설 동의보감』 ·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 『서른, 잔치는 끝났다』 ·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등이 잇달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창비 상업주의’라는 말까지 나돌기도 한다. 이에 대해 창비측은 “창비의 상업성이야말로 창비의 실력”이라며 일반 독자의 독서 수준을 높였다는 자부심과각주2) “민중과 그만큼 함께 해왔으니 민중의 정서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독자의 견해를 함께 밝히기도 한다.각주3)
창간호 2천 부를 발행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창작과 비평』은 2만여 부를 발행하고 있다. 창비는 1996년 창간 30주년 기념호에서 폐쇄성이 느껴진다는 일각의 비판을 의식한 것인지 “한결같되 날로 새로운, 나날이 새로워지되 한결같은 잡지”라는 기념사를 내놓기도 한다. 1998년 3월부터는 인터넷 사이트 창비 홈페이지 ‘Digital Changbi(http://www.changbi.co.kr)’를 개설해 정보 서비스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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