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우민 사야도의 생애 (Shew Oo Min Sayadaw, 1913~2002) 1950년도 미얀마를 중심으로 남방불교권과 세계 여러 나라에 위빠사 나 수행법을 전하신 공로가 가장 크신 분이 마하시사야도임은 누구나 다 아는 바다. 마하시사야도 다음으로 미얀마 승단과 신도들로부터 존경과 찬탄을 받 으신 분이 바로 신 꼬살라(Shin Kosala) 쉐우민 사야도 이시다. 쉐우민 사 야도는 1913년 9월15일 양곤의 동쪽 해안에 있는 몬주(Mon state) 짜익 또군(Kyait Hto township)의 묵카무(Mukkhamu)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 홉 살에 고향에 있는 만짜웅 수도원에서 난다야 큰스님을 계사로 신 꼬 살라(Shin kosala)라는 사미계명을 받았다. 1933년 4월5일 바고의 냐웅 레이삔 수도원에서 아리야 사야도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사야도께서는 경율론 삼장과 주석서등을 몬주의 만짜웅수도원 밧단따 (大德)난디야 사야도, 양곤의 메다니 수도원 알라라 악가마하 빤디따, 바고의 와잉또야 수도원 께사라 사야도, 몬주의 레이삔또야 수도원 빤닌다 사야도께 배웠다. 사야도께서는 마하시 사야도가 양곤 마하시센터 원장으로 부임하신후 수행에 자질이 있는 법랍 10~15년 이상된 비구스님을 선별하여 수행지 도자로 가르치실 때, 가장 상수 비구였다. 그리고 마하시 사야도를 만나 기전 에야와디의 짜이랏군(Kyait Latt Township) 빳치라마 수도원의 아쪼 사야도로부터 수행을 배웠다. 그후 마하시 사야도의 지도하에 위빠사나 수행의 깊은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청정한 계행과 헌신적 수행에 마하 시 사야도로부터 요즈음 세상 보기드문 모범 수행자라는 칭찬을 받았다 고 한다. 1951년부터 10년간 마하시 센터의 인터뷰직책을 맡아 성공적 으로 많은 수행자들을 지도 하였다. 사야도께서는 1960년 노우스 오깔라빠군(North Okkalapa Quarter)에 한필지 땅을 헌납받아 수도원을 짓고 그 이름을 쉐우민 또야(황금동 굴 숲)라 했다. 1961년 7월15일 마하시 센타를 떠나 40여년간 숲속 쉐우민 또야에서 수행자들을 지도하며 은거하였다. 수행을 더욱 깊게 하기 위해서 많은 숲속의 수도원에서 집중수행을 하였으며 심화된 영적 깨달음의 세계는 사야도가 언제나 고요와 평화속에서도 번뜩이는 섬광같이 지혜가 함께 하였다. 쉐우민 또야에서 수행하거나 방문했던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은 청정과 평화 지혜의 빛 자체라는 말을 남겼다. 사야도는 시골 여러 수도원 건립에 지원을 아끼지 아니했으며 강원과 선원, 양로원에 의약, 식량, 생필품을 계속 보냈다. 교육여건이 어려운 시골에 20여개의 도서관을 설립하였고 어린이들을 위한 정기 집중수련 을 개최하게 했다. 1990년 양곤 밍갈라돈구의 빠따미야 뉴타운에 쉐우민 담마수카 명상 센타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사야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평등히 대 하였고 명성이나 재산에는 관심을 갖으신적이 없이 생을 마치는 날까지 청정하고 겸손한 수행자로 일관하셨다. 사야도의 수행과 덕화는 미얀마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알려지면서 말년에는 많은 외국인 수행자들 이 운집했다. 사야도가 속해있는 쉐진종단(Shew kyin sect)로 부터 랏따뉴마하나야까 사야도(Ratta ū Maha Nayaka Sayadaw)라는 호칭을 수여받았다. 이는 본 종단의 가치와 열망에 대한 감사와 청정한 계행 지키신 분에 대한 존경 의 표시였다. 사야도는 스승으로서 지계청정(持戒淸淨),자비보시(慈悲 布施), 상수지혜(常修知慧)를 실천하신 우리들의 사표로 세납 90, 법랍 70년을 한결같이 부처님 법대로 여일하게 사시다가 2002년 11월 20일 열반에 드셨다. 큰 스승은 가셨지만 그분의 고결한 수행과 자비의 향기 는 우리들의 가슴에 남을 것이며, 수행자의 올바른 길을 반조해 볼 수 있 는 각성의 거울로 우리를 비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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