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냉장고는 배가 고파 / 이구철
날씬한 몸매를 가진 나를 사람들은 부러워하지
목은 길게 뻗어 광채가 나고
쉽게 부러지지 않는 어깨에
갈비뼈 또한 별처럼 번쩍번쩍 빛이 나지
직선으로 뻗은 다리는 힘으로 뭉쳐 있지
얼굴색은 늘 따뜻한 피가 감돌아 복숭아빛인데
목울대는 가늘어 귀뚜라미 소리로 속삭이지
육각형의 완벽한 조각남으로 믿음직스럽게 여겨
모든 여자들이 젖은 눈으로
나를 집 안 가장 안락한 자리에 모시고 있지
맨 처음엔 제 목숨처럼 사랑하여
사타구니까지 무릎을 기어서 들여다 보며
신선한 채소며 과일, 고기로
내 몸 안에 가득 채우고 또 채웠지
풍요로움에 배가 불러 허리가 꺾이지 않았어
밖으로 흘러내리는 콧소리는 굶주림을 몰랐지
언제부터인가 여자가 외출을 하기 시작했어
나를 치장하기 위한 외출이 아니라 그녀만의 방식이었어
외출이 잦을수록 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나는 점차 배가 홀쭉하고 가을 바람이 불어왔어
채소와 과일, 고기는 찾아오지 않았고
겨우 김치 조각, 멸치 볶음, 콩자반 몇 개씩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어
나는 허기가 지기 시작했고
몸이 마르고 비틀어졌어
나 너무 배가 고파 힘껏 목젖을 울렸지만
내 사타구니 밑으로 가을 바람만 줄무늬뱀처럼 굴러갔어
첫댓글 텅 빈 냉장고를 보고 배고픈 나와 동병상련을 느꼈다
어찌 냉장고와 비교 하셨는지 생각의 전환이 놀랍습니다.
배가 훌쩍한 냉장고가 좋아요.
사람도 아주 똑똑한 사람보다
조금은 수더분한 사람에게 끌리듯
냉장고 이야기를 하는 듯하면서
우리들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