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회 제주4.3평화문학상]
영남동
한승엽
한라산 남쪽 아래 첫 마을
안개가 귀띔해준 얘기 때문에 옷깃을 여미고 있다
이윽고 무리 지어 올라오는 광기의 눈빛에도
머릿속은 말라버린 층계 밭에 갇혀 멈칫멈칫 헤매는데
악몽처럼 올레는 아찔한 소란에 어둑해지고
고막을 때리듯 문짝이 부서지더니 지붕이 활활 타올랐다
와들와들 울부짖는 불기둥, 신들린 것 같았다
기댈 벽도 없이
저절로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대물림할 수 없는 것들만 넋 나간 채 나뒹굴고
한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의 눈을 감겨주는 찰나에도
우물에 갔다는 누이도 연기처럼 돌아오지 않아
숯검정을 쓴 채 정체 모를 벽에 휩싸여
검은 하늘이 지붕이고
잃어버린 번지수가 달빛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서성거리는 우주의 끝에선
잠들지 않는 물소리가 흰 그늘로 길게 흘러가고
늑골로 빠져나간 바람까마귀가 대숲을 빙빙 돌다
기어이 지층을 깨우듯 울음을 터뜨리던
지상의 마지막 화전(火田)
거칠게 멍든 살갗이 바짝 곤두서고 있다
눈물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에
허상의 벽과 벽을 지우며
상처가 아무는 자리에 피 울음의 뿌리라도 처연히 솟아날까,
영영 폐족을 꿈꾸지 않았던 이름들
주름 깊은 웃음으로 기꺼이 밤길을 헤치고 돌아와
세상 한구석 어둠의 체위를 바꾸려고
서로 이마를 맞대 푸른 잎을 피워 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