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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開拓者)★
1. 노숙 [166~170]
166
고영호가 다시 전화를 받았을 때는 다음날 오전 9시경이었다.
“마침 일성회장이 하바로프스크에 와 있으니 잘 되었다.”
사내가 한국어로 말했는데 지난번 사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긴장한 채 듣기만 하는 고영호의 귀에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일성회장이 TV 기자회견을 하는 거야. 그리고 임차지의 응찰을 포기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거다. 기한은 내일 자정까지. 만일 자정까지 발표가 나가지 않는다면 회장 딸은 제 약혼자와 함께 죽는다. 물론 경찰에 신고했을 때도.”
그리고는 미처 고영호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긴 것이다. 김명천이 내용을 전해들은 것은 그로부터 10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회장님께도 보고를 했습니다.”
고영호가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는 이 일을 전적으로 김형께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안재성과 만났을 때 그렇게 결정이 된 일이었다.
고영호와 통화를 끝낸 김명천이 옆에 서 있는 신해봉을 보았다. 그러자 신해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감찰단 장교 한 명을 정보원 이해수가 만나기로 했습니다.”
신해봉이 팔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10시에 만난다고 했으니까 곧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쪽도 전력을 다해 정보원을 가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10시 정각이 되었을 때 이해수는 주차장 입구로 들어서는 장신의 러시아인을 보았다. 모피코트인 슈바를 입고 머리에는 여우털 모자를 써서 민간인 행색이었지만 이해수의 눈에는 영락없는 군인이었다.
첫째로 걸음걸이를 바꾸기가 어렵다. 두 팔을 저으며 걷는 저 자세는 10여년 군생활에서 몸에 베어져 무의식중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해수가 기둥 옆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사내는 거침없이 다가와 앞에 섰다.
이해수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큰 키였고 체중도 30㎏은 더 나갈 것이었다.
“난 바빠. 세르넨코, 빨리 끝내자.”
주위를 둘러본 사내가 서두르듯 말했다.
“내가 너하고 이렇게 다시 마주보고 서다니, 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군.”
“쥬코프 대위, 그것은 당신의 운이 좋았기 때문이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감찰단의 장교 열 명은 불러낼 수가 있어.”
“닥쳐, 세르넨코.”
사내가 눈을 부릅떴지만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사내는 감찰단 제2편대 소속의 쥬코프 대위로 이해수와는 야전군 시절의 동료가 된다. 물론 이해수는 중사였고 쥬코프는 중위였지만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이해수가 쥬코프에게 바짝 다가가 섰다.
“대위, 이번에 감찰단에서 작전이 있었을 거야. 동양인을 습격해서 납치한 작전이었지. 난 그 정보가 필요해.”
“얼마 줄 건데?”
불쑥 쥬코프가 묻자 이해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질에 따라서 1만불까지 줄 수가 있어. 대위, 비밀은 절대 보장하지.”
“1만불은 적어. 쥬코프, 5만불을 내라.”
“글쎄, 질에 따라서 내겠다니까.”
이해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술집 외상값과 채무가 모두 합해서 1만2000불 정도이던데, 5만불이면 거금이야.”
“네 보스한테 말해. 일성그룹 회장 딸과 약혼자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다고, 그럼 5만불 가치가 넘지.”
그 순간 이해수는 숨을 들이켰고 쥬코프가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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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공명심에 희생되기 싫단 말이야. 저 좀 봅시다.”
자는 줄 알았던 이경훈이 쉰 목소리로 부르자 민경아가 머리를 돌려 이경훈을 보았다. 퀭하게 패인 두 눈에는 촛점이 잡혀져 있지 않았다. 이틀 동안 이경훈은 거의 식사를 하지 않고 우유만 마셨을 뿐이다.
“저기, 내가 오래 생각했는데.”
침대에서 상반신을 세우고 앉은 이경훈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다. 하바로프스 교외의 비어있는 기숙사 건물 3층 방안이다. 건물이 넓고 옆쪽은 역시 비어진데다 부숴져 가는 공장 본채가 있다는 것 밖에 이곳의 동서남북 위치도 알 수가 없다.
기숙사 방안은 본래 4인용이어서 침대가 4개에 면적도 좁지는 않았지만 남자와 둘이서 하루 24시간을 같이 보내려니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이경훈은 민경아보다 더 예민한 모양이었다. 발자욱 소리가 들리면 깜짝깜짝 놀랬고 수시로 시계를 보았다. 이경훈이 말을 이었다.
“저기, 민경아씨가 안세영이 아니라는 것을 저 놈들한테 알려주는 것이 낫지 않겠어요?”
눈만 깜박이며 민경아는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이경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세영이는 무사히 빠져 나간 것이 틀림없어요. 그래서.”
“내가 안세영이 아니라 일성상사 직원인 민경아라고 밝히면 놈들이 우리를 풀어줄 것 같아요?”
조금 거칠게 민경아가 묻자 이경훈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상기 되었다.
“그럼 끝까지 안세영 행세를 하고 있을 겁니까?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네.”
“내 신분을 밝혀도 놈들은 우리를 놔주지 않아요. 오리려 더 가볍게 우리 생사를 결정할 가능성이 있어요.”
“아니, 그 반대요.”
이경훈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민경아를 쏘아 보았다.
“당신을 인질로 잡은 놈들은 일성측과 거래를 하려고 들것이고 그 때는 우리가 더 위험해질 거요.”
“…....…”
“왜냐하면 일성측은 놈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당신이 안세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흥.”
쓴웃음을 지은 민경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경훈을 보았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게임은 우리가 우세하게 이끌것 같지 않아요?”
“당신 목숨이 달린 일이야.”
“내 목숨보다 당신 목숨 때문이겠지.”
“난 당신 때문에 덤으로 끼어 죽기는 싫어.”
핏발선 눈으로 민경아를 노려보던 이경훈이 벌떡 일어섰다.
“놈들한테 솔직하게 말하겠어. 당신의 어설픈 공명심에 내가 희생되기는 싫단 말이야.”
“이것 봐요.”
정색한 민경아가 따라 일어섰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문으로 다가간 이경훈이 주먹으로 두드렸기 때문이다. 철문이 빈 복도에 요란한 소음을 내며 울렸고 곧 바쁜 발자욱 소리들이 들이더니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러시아인 하나와 고려인임이 분명한 동양인 하나가 들어섰는데 물론 고려인이 한국어로 물었다. 한낮인데도 입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이것 보시오, 저 여자는 안세영이 아닙니다. 회장딸이 아니라구요. 일성의 사원이 위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경훈이 열렬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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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 미쳤나?”
했지만 고려인의 시선이 민경아에게로 옮겨졌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입니다.”
이경훈이 덧붙였다.
“저 여자가 안세영을 따로 숨겨두고 자신이 안세영 행세를 한 겁니다. 그래서 안세영에게 도망갈 기회를 준 것이지요. 이제 다 끝났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지막 말은 제 스스로에게 하는 변명이 될 것이었다. 그때 고려인이 민경아에게 다가와 섰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눈동자는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이냐?”
“당신 말대로 저 남자가 돌았어.”
민경아가 손가락 끝을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당신도 보았겠지만 저 남자는 계집애보다 더 줏대가 약해. 그래서 지금 막 머리가 돌아버린거야.”
“그래?”
“내가 안세영이 아니라면 둘 다 풀어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혼자 꿈을 꾸고 있는 것이지.”
“흐음.”
고려인의 시선이 이경훈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이경훈이 다급한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발짝 다가섰다.
“이것 보시오. 저 여자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너희들 둘은 약혼자 사이가 아니란 말이지?”
고려인이 그렇게 묻더니 지금까지 궁금한 듯 눈동자만 굴리고 있던 러시아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설명하는 도중에 러시아인이 질문을 했고 둘이서 민경아와 이경훈을 번갈아 보았다. 이윽고 이야기를 마친 고려인이 이경훈에게 물었다.
“그럼 이 여자가 안세영이 아니라면 누구야?”
“예. 일성전자의 직원 민경아입니다. 조회해 보시면 금방 밝혀질 겁니다.”
마침 잘 물어봐 주었다는 듯이 이경훈은 기운차게 대답했다.
“그럼 너는?”
고려인이 손가락으로 이경훈을 가리켰다.
“넌 안세영의 약혼자 맞아?”
“예. 그건 맞습니다.”
“너도 가짜가 아니고?”
“예. 저는 거짓말 못합니다.”
“좋아.”
다시 러시아인과 수근 대었던 고려인이 정색하고 말했다.
“확인해 보기로 하지. 만일 거짓말이면 오래 못살 줄 알아라.”
둘이 방을 나갔을 때 이경훈은 기력을 다 썼는지 침대 끝에 털석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길게 숨을 뱉았다.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해?”
웅얼거리듯 말했던 이경훈이 머리를 돌려 민경아를 보았다. 그 순간 민경아는 숨을 삼켰다. 이경훈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상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난 안세영의 약혼자가 아냐. 아니, 파혼할거야.”
이경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 파혼하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지지. 그럼 난 나갈 수 있어.”
“이경훈씨.”
자리에서 일어선 민경아가 이경훈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이경훈씨, 정신 차려요.”
“난 이경훈이 아냐.”
이경훈이 열심히 머리를 저었다.
“난 안세영이 누군지도 몰라.”
“이경훈씨,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요.”
“파혼했다고 말해줘, 제발.”
갑자기 이경훈이 민경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훌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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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를 내려놓은 이노우에 겐지는 힐끗 벽시계를 보았다. 새벽 한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성회장 안재성은 TV 회견은 커녕 연락도 해오지 않았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노우에는 모욕감까지 느끼는 중이다.
심호흡을 한 이노우에가 앞쪽에 서 있는 보좌관 사사끼에게 말했다.
“약혼자 되는 놈이 안재성의 딸이 아니라고 한다는데, 확인 해보았나?”
“그 약혼자 되는 놈은 정신착란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묶어 놓았는데 끊임없이 헛소리를 한다는데요.”
사사끼가 그늘진 표정으로 말했다.
“바지에다 대소변을 싸 놓아서 아주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에이, 병신 같은 놈.”
“그래서 화장실에 가둬 놓았습니다.”
“어쨌던 잡혀있는 여자가 안재성의 딸인지 확인하도록. 그놈은 뭐라고 했지?”
“회장 딸이 아니라 일성 사무소 직원인 민 아무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다 풀려나야 한다는 것이죠.”
“미친놈이 분명하군.”
“감찰단에서도 자료가 없어서 서울에다 연락을 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팩스로
안세영의 사진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미 놈들에게 경고를 했으니 행동으로 옮겨야겠어.”
이노우에의 표정도 어두워져 있었다. 방금 세르게이 말로비치로부터 들은 정보가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든 것이다. 일성회장 안재성이 어떤 비밀 제의를 했는지 모르지만 하바로프스크 주지사 모로토프는 이미 일성측에 시베리아를 임차해주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것이었다.
더우기 일성은 국가보안국과 연방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좋아. 그렇다면.”
결심한 듯 머리를 든 이노우에가 사사끼를 보았다.
“먼저 그 미쳤다는 놈을 처리하는 것이 낫겠다.”
“어떻게 처리 할까요?”
“아무르 강가에 버리면 금방 발견 되겠지.”
“알겠습니다.”
몸을 돌린 사사끼에게 이노우에가 덧붙여 말했다.
“그 전에 안재성에게 마지막 경고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알고 있습니다.”
사사끼가 방을 나가자 이노우에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말은 시원스럽게 했지만 꼬인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 시간에 김명천은 숙소의 방에서 부하들과 둘러 앉아 있었는데 모두 탁자위에 펴놓은 지도에 집중하고 있다. 하바로프스크 지도였다.
“출입구가 4곳이나 되니까 인원이 최소한 32명이 필요합니다.”
신해봉이 지도를 손끝으로 짚으며 말했다.
“출입구 경비에 8명, 습격조는 각각 4명씩 4개조로 16명, 지원조가 4명, 그리고 운반조가 4명입니다.”
“내가 지원조에 포함 될 테니까 33명이 되겠군.”
김명천이 말했지만 이제는 신해봉도 말리지 않았다. 작전 책임을 맡고 있는 신해봉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작전 시간은 새벽 4시, 3시까지는 현장에 도착해야 된다. 놈들도 중무장하고 있으니까 격렬한 싸움이 될 것이다.”
이해수는 류코프로부터 민경아가 갇혀있는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물론 류코프는 선금으로 거금 2만 불을 받았고 정보가 정확했다면 작전 종료 후에 다시 2만 불을 받게 될 것이었다. 벽시계를 올려다본 김명천이 회의를 끝냈다.
“자, 출동 준비해라. 3시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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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은 지금 어디 있나?”
안재성이 묻자 비서실 소속 직원은 긴장했다. 얼음장처럼 차거운 안재성의 시선이 부딪쳐온 것이다.
“예. 지금 김명천씨가 마련해준 안가에 계십니다.”
직원이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안재성은 안세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안재성은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한지 사흘째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안세영과 통화도 하지 않았다.
민경아가 대신 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언짢은 듯 이맛살을 찌푸렸을 뿐 안세영의 안부는 묻지도 않은 것이다. 안재성의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으므로 직원은 말을 이었다.
“민경아씨가 안세영씨 대역 노릇을 하고 있어서 지금 당장 출국은 어렵다고 합니다.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김명천씨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회장님.”
“당연한 일이지.”
표정 없는 얼굴로 안재성이 말하고는 머리를 돌려 옆쪽에 앉은 비서실장 박수근을 보았다.
“어떤 놈의 발상인지 알 수 없지만 날 몰라도 한참 모르는 놈이야. 내 딸을 인질로 잡고 있는 다고해도 내가 요구 조건을 들어줄 것으로 믿고 있었던 말인가?”
박수근이 시선을 내린 채 희미하게 머리만 끄덕였고 안재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더러운 놈들. 나는 그놈들의 어떤 제의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어떤 것을 희생하더라도.”
조금 전에 안세영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쪽에서 내일 아침 10시까지 일성전자가 러시아에서 철수한다는 발표를 하지 않았을 때는 안세영과 약혼자를 처형하겠다는 마지막 경고를 한 것이다.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고 다시 안재성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차라리 내 딸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 나았을 것을. 그러면 가슴이 조금 덜 불편할 텐데.”
새벽 3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방안에 둘러앉은 7,8명의 사내 중 아무도 졸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방안으로 직원 하나가 들어서더니 곧장 박수근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김명천씨 전화입니다. 사장님.”
박수근이 서둘러 전화기를 받고는 힐끗 안재성의 눈치를 보았다.
“여보세요.”
“앞으로 한 시간쯤 후에는 사건이 끝날 것입니다.”
대뜸 수화구에서 김명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긴장한 박수근이 눈만 크게 떴고 김명천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겠는데 숙소를 옮기도록 하십시오.”
“어, 어디로 말이오?”
“아무르 강가의 노보스크 호텔로 옮기시도록. 5층 전체를 비우도록 했으니까 지금 출발하시면 됩니다.”
“그, 그러면.”
“보안국의 경비 책임자한테도 연락을 해놓았고 그도 동의를 했습니다.”
김명천의 말에 박수근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미 김명천은 다 수배를 해놓았고 이쪽은 몸만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갑자기 무기력해진 박수근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알았습니다. 회장님께 보고를 하고,--”
“지금 당장.”
김명천이 짧고 단호한 목소리로 박수근의 말을 잘랐다.
“3시까지 옮기시도록. 지금 우리는 전쟁 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훈계하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박수근은 시비를 걸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