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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수요일. - '또 쓰레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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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부활 제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또 쓰레기'?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상하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다 열매 맺는 줄 알았는데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가 있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한 다 열매를 맺을 것 같은데
붙어 있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몸은 수도공동체 안에 있는데,
겉에서 보면 주님 안에서 사는 것 같은데
수도복만 입고 있고 그래서 껍데기만 사는 경우입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하느님 말씀을 듣지만, 귀로만 들을 뿐 말씀을 자양분 삼지 않고
성체를 영하지만 입으로만 영할 뿐 거기서 힘을 받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말씀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열매를 맺는 살아있는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붙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도 우리 안에 머무시게 해야 합니다.
또 몸뚱이, 껍데기만 수도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 얼과 넋이 참으로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이 들어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허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무엇이 머물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십니까, 아니면 어떤 다른 잡놈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내게 한 말이나 밖의 잡다한 소리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또 주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주님의 성전 안을 거닐고 있습니까,
아니면 저잣거리나 인터넷 가상공간을 떠돌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주님 없이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노를 저었는데도 제자리를 맴돌 뿐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사실 주님 안에 머물지 않는 나와
주님 말씀이 내 안에 머물지 않는 나와
그래서 주님 없이 무엇을 하는 나는 말라버린 샘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의 오늘 말씀 나눔도 주님 말씀의 샘에서
길어 올린 말씀이 아니라 저의 건조한 생각의 나열은 아닌지,
인터넷상의 많은 말들처럼 사람들이 읽지 않고 지나쳐버리고,
그래서 아무 열매 맺지 못하는 ‘또 쓰레기’인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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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오늘 <복음>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관계’를 “붙어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세 가지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 <복음>에서 우선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 그리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제자는 예수님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된다.”(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붙어있음’ 말합니다. 곧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요, ‘상호교제’요, ‘상호 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밝히듯,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고, 참으로 신비로운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요,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공동본성”(Connaturality) 결합을 두고, 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탄하여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그리고 그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를,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곧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주님!
당신께서는 무너뜨리지만 열매를 맺어주셨고
부서뜨리지만 새싹을 틔워주셨습니다.
이토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서야, 제 자신을 건네주고서야,
당신께 머무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꽃이 지듯, 제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게 하소서.
열매가 떨어지듯, 제가 사라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는 오늘도 떨어져야 머물게 되는 이 신비로운 사랑 앞에
떨어지지 못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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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할 때가 많습니다. 내 것이 관철되었을 때 비로소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한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가 만든 ‘신념’이나‘가치체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과의‘사랑의 관계’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서 한 차원 더 높은 기도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서문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 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일깨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효과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그분과 하나가 되려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논리를 펼치지 않고 주님의 뜻을 찾으며 더 많이 사랑하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 일치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하기 때문에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다 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제가 기도할 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구하기보다 문간에 있는 것들, 곧 먹을 것과 마실 것, 부드러운 비, 드맑은 하늘, 가정과 친구, 평화와 기쁨, 무엇보다 사랑에 감사하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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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지난 2021년 10월 10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 16차 정기총회 개막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시노드는 지역별, 대륙별 논의 과정을 거쳐서 2024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시노드의 목적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것입니다. 지금 속한 한국교회와 제가 머물고 있는 미국의 이민자 교회는 장소는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미사 참례율의 감소, 냉담자의 증가, 교회와 멀어지는 청소년들, 수도자와 성직자 성소의 감소, 교회의 급격한 고령화, 가난한 이들에게 높아진 교회의 문턱, 예비신자의 감소, 열정이 식어가는 신앙’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역은 다르지만 세계 교회 역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세속주의와 물질 만능주의, 인간의 탐욕에 의한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점점 심화되는 부익부빈익빈의 문제, 전쟁과 독재로 인한 난민의 증가, 신자의 감소와 고령화로 인해서 문을 닫는 교회의 증가, 성직자들의 스캔들’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시노드 개막미사의 강론에서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가오는 사람을 조건 없이 만나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온 중풍병자를 만나셨습니다. 자비를 청하는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마귀가 들린 사람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모함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도 만나셨습니다.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도 만나셨습니다. 예리고로 가던 제자들도 만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고민하던 부자 청년도 만나셨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두 번째는 ‘경청’입니다. 마음에 방음벽을 쌓아 놓는 만남에서는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습니다. 편견을 가지는 만남에서는 문제가 해결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편견 때문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전문가라는 방음벽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권위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교회의 많은 문제들 역시 방음벽과 편견에 가로막혀서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편견과 방음벽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경청은 공감과 측은지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굳건한 믿음을 보여 주었던 백인대장과 이방인의 여인을 칭찬하시면서 “이런 믿음은 어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자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며칠 동안 먹지 못했던 굶주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면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식별’입니다.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던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으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시대의 징표에 직면했습니다. 음식 나눔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본 것처럼 이방인들의 할례에 대한 문제도 있었습니다. 오늘 교회는 첫 번째 ‘시노드’를 개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습니다. 교회는 만남, 경청, 식별의 과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입니다. 저 역시도 만남, 경청, 식별을 통해서 저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가전제품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은 결국 하느님과 소통을 통해서 풀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면서 풀어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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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혼부부가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이 싸움의 원인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바로 치약 때문이었습니다. 치약을 위에서부터 쓰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왜 아래에서부터 짜지 않느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치약을 아래에서부터 짜야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면서 따진 것입니다. 둘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한 시간 넘게 싸웠습니다.
그 뒤로 이 신혼부부는 치약 때문에 싸우는 일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했기에 한 시간 넘게 싸울 정도로 타협이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치약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남편이나 아내 쪽에서 양보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둘은 전혀 양보하지 않았지만, 각자가 만족할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싸울 일이 없어졌습니다. 답은 무엇일까요? 답은 치야 두 개를 사서 각자 쓰고 싶은 방식으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한쪽이 양보해서 어느 한쪽의 방식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했다면 어느 순간 다시 ‘치약’ 싸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를 만족하는 방식을 통해 가정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평화는 다른 의견을 하나로 모았을 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상대를 인정하고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주님께 큰 실망을 줬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틀렸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평화를 잃어버렸던 것은 “틀렸다”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틀렸다”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배신한 자신들이 “틀렸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를 간직할 수가 없어 다락방에 숨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님께서 포도나무면, 가지인 우리에게서 나오는 열매로 무엇이 나와야 할까요? 사과, 배, 귤, 바나나 같은 다른 열매가 나와야 할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포도나무이니, 우리는 포도를 열매 맺어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을 철저하게 따라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화’를 먼저 전해주신 주님의 모습을 따라, 우리 역시 이웃들과 함께하며 ‘평화’를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틀린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함께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평화롭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며 함께해야 하는 것처럼, 이웃들과 함께 사는 법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해야 진정한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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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려는 것 이상으로 더욱 곤란한 법이다(라 로슈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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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깨달음의 여정, 자아초월의 여정-
어제는 참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예전의 전형적인 5월 날씨같았습니다. 성모성월 5월에 계속되는 신록과 꽃들로 가득한 파스카의 계절입니다. 어제 코이노니아 자매회 월례 모임도 있었고 회원도 늘어 이젠 12명, 열두 사도 숫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장 행복한 분들이고 축복 받은 분들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아름다운 곳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고자 수도원 피정을 선택한 가장 아름다운 자매님들입니다.”
강론 시작전 드린 내용입니다. 미사시 입당성가는 244장을 부르도록 부탁했고 퇴장 성가 역시 244장 나머지를 부르니 너무 잘 어울렸습니다. 어제 따라, 나이에 무관하게 꽃처럼 아름다운 자매님들 모습이었습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 꾸미오며, 기쁜 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의 사랑에 있습니다. 어제 '소띠' 동갑의 12세 연상의 열심한 수녀님께 드린 덕담의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수녀님은 영원한 현역에, 영혼은 언제나 영원한 청춘이십니다. 축하드립니다.”
제가 요즘 가장 많이 용감하게 사용하는 “사랑하는”이란 말마디입니다. 메시지나 강복할 때 이름앞에 꼭 붙입니다. 이렇게 고백으로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백대로 됩니다. 우선 내 부정적이 어둔 마음이 청소되고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니 주님의 은총입니다. 새삼 사랑 역시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욕망도 아닌 사랑이요 말씀입니다. 사랑이, 말씀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랑을 추구하고 진리의 말씀을 공부합니다. “둥근 삶 둥근 마음”도 사랑이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도 사랑입니다. 이 둘은 제가 쓴 두권의 책명이기도 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세 번째의 책 제목 역시 기막힙니다.
이제 마지막 책을 낸다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가 될 것입니다. 하루하루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제 쓴 “꽃처럼, 별처럼” 짧은 시에 만족했습니다.
“꽃처럼
살라고 땅에는
꽃!
별처럼
살라고 하늘에는
별!”
“꽃처럼, 별처럼”이 상징하는 바 사랑입니다. 하늘에는 별, 땅에는 꽃, 사람에는 사랑입니다. 요즘 한국은 어디나 파스카의 기쁨 가득한 신록에 꽃세상의 천국입니다. 여기 수도원도 온갖 꽃들이 만발합니다. 파스카의 봄철에는 유독 노란꽃들이 많습니다. 노란 색깔의 파스카의 꽃들입니다. 요즘 수도원 곳곳에는 샛노란 애기똥풀꽃들이 한창입니다. 예전 써놨던 시중 ‘민들레꽃’을 ‘애기똥풀꽃’으로 ‘뒤뜰’ 마당은 ‘앞뜰’로 고쳐 쓴 시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앞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애기똥풀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꽃사랑으로 살라고 땅에는 꽃들이요, 별사랑으로 살라고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입니다. 잠깨어 밤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나설 때 맨먼저 바라보는 하늘의 별들이요, 그 다음은 하늘 배경의 언제나 거기 그 자리, 35년 동안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늘 함께 해온 사랑, 불암산佛巖山 평생 도반道伴입니다. 사랑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요, 율법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 첫마디로 참 멋집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 농사農事입니다. 주방장이 좋아야 식사食事가 좋고, 사제가 좋아야 성사聖事도 좋습니다. 이 모두에게 우선적 조건이 사랑입니다. 좋은 농부는, 좋은 주방장은, 좋은 사제는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직업중 가장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를 닮은 사람이 생명을 다루는 농부農夫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유난히 눈에 띄는 “내 안에 머무르라”는 말마디입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더 구체적으로 “내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구구절절 너무 은혜로워 생략할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참으로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 사랑의 일치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상징하는바 주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얼마나 무력한지요! 이래서 ‘1인 가구’를 보완할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의 실현이 절실합니다. 주님 사랑의 공동체에 일치가 깊을수록 생명력 왕성한 삶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 고무적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 사랑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면 하느님의 뜻대로 청하는 것이 될 것이니 모두가 응답이요 만사형통萬事亨通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열매 풍성한 삶이 우리 인생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사랑의 열매가 주님의 제자임을 확증하고, 아버지께 영광이 됨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사랑이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본질이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사도회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개종한 이방인 신자들이 유다인들처럼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가 첨예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반영합니다. 역시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점점 너그러워지고,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겸손해지고,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판단의 잣대는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도회의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일거에 해결되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니 주님 사랑 안에 머물수록 순조로운 “깨달음의 여정”에 주님을 닮아 올바른 분별입니다.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깨달음의 여정은 “자기초월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날로 깊이 머물수록 마음도 넓고 깊어져, 너그럽고, 자비롭고, 지혜롭고, 겸손하고, 자유로운 삶이겠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사랑의 일치를 깊이하는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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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0.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포도나무 보셨습니까? 제가 어릴 때 외할머니께서 포도 농장을 하셨던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포도 농장을 운영하는 농부의 목적은 포도를 많이 얻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서로 크기와 모양이 다릅니다. 어떤 가지는 탐스런 포도 알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가 하면, 잎만 무성하게 바람에 나부끼는 그런 가지도 있습니다.
농부는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나무에 붙여 둘 까닭이 없습니다. 반대로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합니다.
이상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왜 하셨을까요?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처럼, 당신을 따른답시고 일행에 속해 있으면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자들이 없잖아 있기에, 그들 들으라고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경고를 하시면서 동시에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해졌다.”라고 말씀하시며 희망을 주십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 혼자서 하는 게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있으므로 서 비로소 말은 성립됩니다. ‘말을 듣는다.’라는 것은, 말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리 오너라.’라는 말에 저리 가면 그것은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따르는 제자로 말미암아 비로소 말씀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 들은 척도 않고 딴전을 피우는데 제자들의 몸이 깨끗해지겠습니까?
“내 안에 머물러라.”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말하면 “내 말을 따라 살아가거라. 나를 따라 살아가거라.”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머물러 살면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따라 살면 행복과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갑니다.
뭐 먹을까요?
아주 원초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는
자유가 들어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선택의 기회가 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뭐 먹을까요? 라고 질문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않을까요?
자유롭게 선택하세요.
그대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그대에게 주신 것입니다.
물론!
먹지 않을 수도 있는 권리 포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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