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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석산[禪石山] 742m 경북 성주 / 칠곡
산줄기 : 금오영암지맥
들머리 : 월향면 인촌리 선석사입구
위 치 경북 성주군 / 칠곡군
높 이 742m
#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하늘방울과 19왕자의 태가 묻힌 천하명당... 선석산(742m)~영암산(782m) 성주-칠곡
구미 금오산에 오르면 남쪽으로 가야산 조망이 좋다. 또 바로 앞에 두 봉우리가 솟아 있는 하나의 산줄기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 산줄기 오른편(서편) 봉우리가 영암산이고, 왼편(동편) 봉우리가 선석산이다.
금오산에 오를 때마다 좋아 보이는 그 산에 오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졸작 <조망의 즐거움>을 쓰면서 금오산 편에 그 산이름도 지도에서 찾아 영암산과 누진산으로 적어 놓았었다. 그러나 누진산은 잘못된 이름이고, 바른 이름은 선석산이다.
송춘상씨의 주선으로 지난 해 성탄절을 앞둔 어느날 칠불산악회 김기호 회장을 비롯한 회원 8명과 신거리고개에서 영암산에 올라 선석산을 거쳐 선석사로 내려서는 산행을 하게 됐다. 과연 영암산과 선석산은 좋았다. 두 산이 이웃해 있으면서도 산세와 모습은 전혀 달랐다.
영암산 등성이는 바위로 되어 있고 날카로운 곳도 많았으며 비탈은 몹시 가팔랐다. 꽤 어려운 곳도 있고 벼랑에 가까운 바위벽을 줄을 타고 오르내리는 곳도 있다. 아슬아슬하고 아기자기해서 산행의 맛을 한껏 즐길 수 있으며, 경관과 조망 모두 좋았다.
영암산은 바위봉우리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도에는 남북으로 놓여진 영암산의 머리 부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봉우리에 영암산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성주 사람들은 가장 남쪽 봉우리를 영암산으로 알고 있고, 거기에 표석까지 세워 놓았다. 사실 지도에 영암산이라 표기되어 있는 북봉은 나무가 많은 흙으로 된 봉우리로 별다른 특색이 없다.
반면 남쪽 봉우리는 사방이 바위절벽으로 된 바위봉우리로 경관도 좋고 조망도 좋다. 또 성주쪽에서 보면 이 남봉이 방울처럼 보여 산이름은 예서 얻은 것이다. 성주 초전면쪽에서 북봉(지도에 영암산이라 표기된 봉우리)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편의상 지도에 영암산이라 표기된 봉우리를 상봉이라 하고, 방울처럼 보이고 표석도 세워져 있는 남봉을 주봉이라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 상봉(북봉)에서 주봉까지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편으로 바위벼랑을 이루고 있다.
영암산과 선석산의 이름, 그리고 선석사
반면 선석산은 바위가 없으며 등성이가 넓고 번번하여 밭을 일구어도 될 정도다. 따라서 선석산은 숲이 좋고 비탈이 가파르지 않아 산길이 산책길처럼 순하다. 고스락은 둘레에 큰 나무들이 많아 조망이 좋지 않다. 이 선석산 아래에 옛절 선석사가 있고, 육관도사가 우리나라 30대 명당이라 했다는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이 있다.
영암산의 한자는 방울이라는 뜻의 령(鈴) 자로 되어 있다. 그래서 '방울바위 산'이 된다. 처음에는 방울이나 종과 관계 있는 전설, 또는 방울이나 종 모양의 바위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러나 송춘상 대장은 성주쪽에서 보면 방울 모양으로 보여 옛날부터 '방울바위산' 이라 했다는 것이다. 영암산의 이름은 이처럼 그 유래가 분명했다.
산을 좋아해서 많이 찾아다니고 있고 관심도 많아 산의 역사나 이름을 연구하고 있는 송씨는 선석산에 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석산으로 되어있는 이 산이름이 어쩐 일인지 1993년 지도에 '서진산'으로 표기됐고, 1996년 지도에는 어이없게도 '누(루)진산'으로 바뀌었다 한다.
지금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이름으로 되돌아가 선석산으로 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성주목에는 봉선, 고요, 좌선의 뜻으로 쓰이는 선(禪) 자와 돌이라는 석(石) 자를 써서 선석산으로 되어 있고, '주 북쪽 28리에 있다. 세조의 태를 봉안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전에는 이름도 붙어 있지 않던 지형도에 1993년 느닷없이 짐승이나 새가 '산다', '깃들다', '쉬다'의 뜻이 있는 서(棲) 자와 '누르다', '지키다', '메우다'의 뜻이 있는 진(鎭) 자로 바뀌어 서진산으로 표기되어 나왔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더 우스운 것은 1996년 지형도에는 위의 서진산의 '서' 자가 '다락' 이라는 뜻의 루(樓) 자로 바뀌어 '누진산'으로 되었다. 이때에 나온 지도를 보고 '조망의 즐거움' 금오산 편에 필자도 '누진산'으로 쓰는 잘못을 저질렀다. 아마 지도를 만들면서 나무 목(木) 오른쪽의 아내의 뜻이 처(妻) 방을 무식의 탓으로 별이름의 루(樓) 방으로 잘못 쓰지 않았나 추측된다.
비슷한 예로 운장산과 대둔산 사이에 있는 선야봉(仙冶峰)을 '불리다'는 뜻의 야(冶) 자를 점 하나를 더 찍어 '다스리다' 라는 뜻의 치(治)로 만들어 선치봉으로 틀리게 한 것도 있다.
선석산의 이름은 선석사에서 유래한다. 의상대사가 신라 효소왕 1년(692년)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신광사라 했는데, 신라 화엄10찰의 하나로 이름난 절이었다. 그때의 절은 지금의 절 서쪽에 있었다 한다.
공민왕 10년(1361년) 나옹대사가 주지로 오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겼다. 이때 절터를 판판하게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왔다 해서 절이름을 터를 닦는다는 뜻의 선(禪) 자와 돌 석(石) 자를 써서 선석사라 했다 한다. 그때 발견된 바위는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그 일부가 땅 위에 내밀어져 있다.
신거리고개에서 시작, 두 산 이어
영암산과 선석산 산행을 위해 우리는 신거리고개에 있는 성모의 집 노인전문병원 앞에 모였다. 김영훈 차장과 대전에서 합류해 영암산 산자락에 도착한 우리는 세 사람이었으나 성주에서는 칠불산악회 회원 아홉 사람이 나와 주었다.
김기호 회장을 비롯해 칠불산악회의 송춘상 산악대장, 회원 이용태, 이옥준, 배재동, 김광석, 이경동, 김정연, 우경환씨 등 아홉 사람 모두가 거의 검은 등산복 차림에다 몸집들이 커서 호랑이 사냥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든든했다.
칠불산악회의 '칠불' 이라는 이름은 이제까지 가야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알려진 종전의 가야산 상봉보다 그 옆 성주땅의 칠불봉이 더 높은 봉인 것으로 밝혀져 그 이름을 따서 성주의 상징으로 '칠불'을 썼다고 설명해 주었다.
산길은 성모의집 마당 위쪽에서 바로 오른편(남쪽)의 산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다. 산에 들어서면 위아래로 연이어 있는 묘를 지나 작은 등성이로 올라선다. 이 작은 등성이는 영암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지능선으로 신거리고개를 지나게 되어 있다.
바위봉우리로 된 영암산의 머리에 다가갈수록 등성이에 바위가 많아지고 왼편으로는 벼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로 북쪽에 있는 금오산은 내내 잘 보이고, 남쪽으로 초전면 일대의 참외단지 비닐하우스가 넓은 호수처럼 보였다. 밤에 이 비닐하우스에 불을 밝힌 광경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참으로 장관이라 한다.
동쪽으로 올라챘던 등성이는 턱 위 영암산의 어깨부분에 이르러 제법 넓은 평지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영암산의 세 바위봉우리가 잘 올려다보인다. 이 턱에서 한참 더 오르면 영암산 머리를 이루고 있는 가장 북쪽의 상봉에 올라선다. 상봉에 서면 비로소 구미 일대와 낙동강 줄기가 보인다. 주봉으로 향하는 산줄기는 상봉에서 직각으로 틀어 남쪽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부터 고스락까지는 세 개의 바위봉우리가 줄지어 있고, 바위벼랑 등이 험하며 날카롭다. 우뚝 솟은 바위봉우리와 바위봉우리 사이는 마치 세워놓은 손가락 사이처럼 되어 있다. 그 손가락 사이처럼 된 바위 사이를 지나려면 바위절벽에 매달리고 더위잡으며 오르내려야 한다.
바위로 된 주봉의 고스락은 별로 넓지 않다. 남쪽으로 한 단 아래에 판판하지는 않으나 큰 바위가 있다. 이 고스락 일대는 사방이 바위 낭떠러지여서 시원하고 조망이 좋다. 가야산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왼편으로 의상봉, 오도산이 보이며, 오른편으로 돌아가며 덕유산, 민주지산, 황학산, 대둔산, 계룡산, 서대산, 속리산이 보이고, 금오산 오른편으로 천생산, 유학산, 가산, 팔공산, 비슬산 등이 조망된다. 그 날은 지리산이 보이지 않아 서운했다.
가야산과의 사이에 온통 비닐로 덮힌 초전면의 넓은 뜰은 보이나 성주읍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 비닐하우스 단지는 단일 면적으로는 세계 최대여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 한다. 또 이 비닐하우스 단지에서는 95%가 참외, 5%가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며, 전국 참외 생산량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한다. 이 단지에서는 순수 우량 품종의 참외를 생산하기 위하여 비닐하우스 안에 벌통을 놓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영암산에서 동쪽의 선석산으로 건너가자면 세 가지 특이한 점을 보고 또 알게 되었다. 첫째는 영암산과 선석산 사이 동북쪽 북삼읍 방향으로 터진 넓은 골짜기다. 골짜기라 말은 했지만 접시처럼 생겼고, 너무도 넓어 골짜기라 하기가 망설여질 정도다.
다음은 선석산쪽 잘록이로 내려가는 길에 까마득한 바위벼랑이 두 곳이나 있다는 점이다. 넓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꼭대기에서 내려서면 곧 수십 길 바위벼랑 위에 서게 된다. 바위벼랑 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선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가야 할 일에 겁부터 낸다. 달리 돌아갈 길도 없다.
그러나 이곳에는 밧줄도 매어져 있고, 직벽도 아닌 데다 발 디딜 곳도 있어서 산행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도 내려갈 수는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바위벼랑이 이어 나타난다. 이곳은 위의 벼랑보다 더 어렵기는 하지만 다행히 쉽게 돌아내려갈 수 있는 길이 오른편에 있다.
이렇게 잘록이로 내려서면 이번엔 영암산과는 전혀 다른 지형의 선석산 산길이 나타난다. 선석산쪽 등성이는 바위도 거의 없고 둥글고 넓으며 가파르지 않아 산행이 쉽다. 그저 흙으로 된 숲속의 편안한 길이 순하게 이어진다.
안내를 위해 며칠 전 이곳을 답사했다는 송춘상 대장은 영암산을 오르며 힘들어하는 우리들에게 선석산은 힘들지 않고 쉽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우리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위로의 말로 들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두 산의 높이는 비슷했으나 선석산은 오르는 데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처럼 두 산 사이의 넓은 골짜기 위의 잘록이, 영암산의 기암괴봉과 바위벼랑, 선석산의 부드럽고 넉넉한 산세를 거치며 나아갔다. 우리가 가는 이 산길은 성주군과 칠곡군의 경계다. 칠곡쪽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쪽에서 올라오는 산길이 여러 갈래 보인다. 특히 영암산과 선석산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잘록이(넓은 골짜기의 고갯마루)에는 보손동(칠곡 북삼읍)에서 올라오는 제법 큰 길이 보인다.
힘들이지 않고 선석산 고스락에 올라서게 된 때문인지 고스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나무에 가려 조망도 시원찮고 맨땅에 나무들이 어지럽게 눕혀져 있어 어수선한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칠곡산악회가 세운 1m 남짓의 돌표석에 '누진산' 이라 잘못된 한자가 버젓이 써있어 어이없었다.
선석사로 하산하는 길은 그대로 성주와 칠곡의 경계로 되어있는 산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 산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칠곡땅으로 들어서서 약목면과 기산면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 나아가다 비룡산을 일구는 것이라고 송춘상씨는 설명해주었다.
이 산줄기에 선석사 골짜기와 그 양편의 산줄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좋은 바위가 있다. 여기서 또 송춘상씨는 선석사와 왕자의 태실 등 산세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선석사 골짜기 양편의 산줄기는 여자의 양다리이며 왕자들의 태실이 있는 골짜기 가운데의 작은 동산은 여자의 음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관지사는 왕자의 태실자리를 우리나라 30대 명당의 하나라고 했다 한다.
바위가 솟아있고 가파른 곳도 일부 있으나 별다른 점 없이 길은 등성이를 따라간다. 이 등성이 길은 동쪽으로 내달리는 군계를 떠나 선석사로 뻗어내린 산줄기로 옮겨진다. 송춘상씨의 설명대로라면 여체의 왼쪽(앞을 향해) 다리에 해당되는 줄기다. 오른편 골짜기 막바지에 있는 중암암이 내려다보인다. 이 산줄기는 선석사까지 뻗친다.
그러나 길은 끝까지 산줄기를 따르지 않고 중간에서 슬그머니 오른편 선석사 골짜기로 내려선다. 중암암 아래가 되고 선석사 바로 위가 되는 곳이다. 골짜기가 넓다. 선석사는 대웅전을 비롯해서 명부전, 칠성각, 산왕각, 요사채, 범종각 등이 있고, 선석사의 이름을 낳게 한 선석의 일부가 대웅전 앞뜰에 뾰족하게 나와 있다.
이날은 마침 동짓날이어서 우리 12명 일행 모두가 팥죽 공양을 받았다. 산행 중에 김밥은 먹었으나 출출하던 판이라 팥죽이 무척 맛이 있었다. 절 아래에서 개울을 건너면 태실의 널따란 주차장이 나온다. 이창우 성주군수가 주차장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단호하면서도 인자한 모습이다.
왕자 태실이 있는 동산은 소나무숲으로 덮여 있다. 이 동산의 머리에 세종대왕 18왕자와 단종의 태를 묻었던 태실 19좌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주차장에서 태실까지는 긴 돌계단이다. 태실에 관한 설명도 듣고, 이 군수와 기념사진도 찍고 모든 산행을 마쳤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
조선조는 왕과 왕자의 수가 많은 만큼 그들의 태를 묻었던 태실도 많다. 그러나 19기를 한데 모은 태실은 여기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밖에 없다. 이 태실은 그 자리와 방식이 특이하고 전해지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태를 묻은 석물 시설로, 조정의 관상감에서 장소를 물색하고 안태사로 하여금 태를 묻게 했다 한다.
조선조에서는 풍수지리설의 위력이 컸던 때문에 왕실의 태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믿고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다. 여기 태실은 1438년(세종 20년)에서 1442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수양대군(세조)을 비롯해 적서 18왕자와 왕손 단종의 태까지 19기의 태실을 안장한 곳이다.
뒤에 수양대군의 폭거에 불복한 동생들인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를 산 아래 버렸으나, 1975년 기단석을 찾아 복원해서 현재 기단석만 남아있다(사적 제444호).
이 태실은 태실의 의궤에 따라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속에 분청사기로 된 태호를 넣고, 그 위에 기단석 중동석 개첨석을 덮었다. 대군과 단종의 태실, 그리고 단순한 군의 태실이 구분되어 있다.
원래 이 태실 자리는 고려 말 문신이며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유명한 이장경의 묘지였다. 이장경은 그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고, 손자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큰 벼슬을 하고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조선조 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도 그의 후손이며, 이직의 손자 이정녕은 당시 세종의 누이동생의 남편(부마)이었다. 세종은 안태사의 말을 듣고 자기의 매제 이정녕을 파면까지 하며 이장경의 묘자리를 빼앗아 태실로 만들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태사가 태실을 앉힐 명당을 찾아 여기 인촌리에 들어서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비를 피하려고 근처의 재실에 들어갔다. 그 재실이 이장경의 재실이었고, 안태사는 이장경의 묘가 명당임을 알아보고 세종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정녕은 묘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 보고를 무시한 죄로 파면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장경의 후손들에게도 과실은 있었다 한다. 이장경의 묘터를 잡아준 스님은 이장경의 후손들에게 '아무리 후손들이 잘 되더라도 여기에 묘각을 세우거나 재실을 만드는 등 묘의 치장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한다. 그러나 많은 후손들이 영달하자 교만해져서 그 스님의 당부를 잊고 재실을 짓고 묘를 치장했던 것이다. 재실을 짓지 않았다면 안태사가 그 재실에서 비를 피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이장경의 묘터를 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산행길잡이
두 산 한데 묶어 산행해야 제 맛
영암산과 선석산의 산행은 따로따로 할 수도 있지만 두 산을 묶어서 하는 것이 좋다. 산 자체로 볼 때에는 영암산이 좋으나 영암산만 산행하면 산행시간이 짧고 선석산이 안고 있는 세종대왕 왕자 태실이나 선석사를 볼 수 없다. 또 선석산 하나만 오른다면 선석사와 왕자태실은 둘러볼 수 있으나 흙산으로 너무 단조롭고 산행의 맛이 적다. 따라서 영암산과 선석산을 함께 산행하고 선석사와 왕자 태실을 둘러보는 것이 산행의 맛도 좋고 뜻도 있다.
그러나 두 산이 성주군과 칠곡군 경계에 있어 산길은 양편이 모두 있지만, 아무래도 칠곡쪽에서는 두 산을 모두 오르기는 어렵다.
산행들머리는 신거리고개, 선석사, 보손동(칠곡군 북삼읍) 등 크게 세 갈래라 할 수 있다. 신거리고개(김천시 남면 월명리, 월명 성모의집)는 성주군과 김천시 경계가 되는 고개다. 월명 성모의집은 신거리고개에서 조금 북쪽 월명리쪽(김천시 남면)에 있다. 월명 성모의집에서 산등성이~턱~상봉~주봉~잘록이(영암산과 선석산 사이)~선석산~선석사를 거쳐 왕자태실로 내려서는 데 약 4시간이 소요된다. 이 코스를 역으로 산행해도 된다.
4번 국도변의 보손동(칠곡군 북삼읍) 들머리에서 보손동~보손동 골짜기를 통해 잘록이(영암산과 선석산 사이)로 올라서는 데 약 2시간이 걸린다. 또는 보손동에서 등선이길을 이용해 곧장 선석산으로 올라서는 데에도 약 2시간이 걸린다. 보손동 길은 잘록이나 선석산까지 멀고, 영암산이나 선석산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흠이 있다. 칠곡이나 약목 북삼 주민들이 여가를 이용해 어느 하나를 산행할 때 이용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교통
영암산이나 선석산에 오르려면 성주, 왜관, 김천 세 곳 중에서 접근하기 가장 쉬운 곳을 골라 거쳐야 한다.
성주에서 김천으로 통하는 905번 지방도에 올라서 김천쪽으로 가면 바로 오른편으로 인촌리 들어가는 샛길이 나온다. 선석사는 인촌리에 있다. 선석사 아래에 저수지 공사가 한창이다.
성주에서 하루 4회(10:00, 12:00, 17:00, 19:40) 선석 마을까지 군내버스가 다니고 있다. 선석 마을에서 성주로 나오는 버스 시각은 성주 발 버스시각에 30분을 더하면 된다.
신거리고개(월명 성모의집)로 가려면 이렇게 코스를 잡는다. 성주에서 김천으로 905번 지방도는 부상리(김천시 남면)에서 왜관~김천을 잇는 4번 국도에 합류한다. 김천~성주 사이를 오가는 버스가 거의 매 시간(하루 12회) 다니고 있다. 성모의집 앞 도로변에 정류장이 있다.
보손동은 왜관 또는 약목에서 김천을 오가는 버스(완행 시외버스 또는 군내버스)가 하루 18회나 있다. 4번 국도변 보손동 들머리에서 내리고 타면 된다. 글쓴이:김홍주 소산산행문화연구소 소장
참고:월간<산> 200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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