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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공의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의 충만으로 바리새인의 외식과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진리와 불의는 충돌하며
진실과 거짓은 서로 대적하며 갈등합니다.
메시야 시대 바리새인은
히스몬 왕조가 낳은 유대교의 정통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의 전통, 그 자체인 바리새인은
유대교의 중심이요, 종교적 기득권을 누리는 여호와 신앙, 그 전가의 보검이었습니다.
메시야 이전의 바리새인은
유대교적 전통을 계승한 모세 율법의 복덩어리, 그 자체였습니다.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대였지만
헤롯 성전을 중심한 종교적 평안과 안식을 누렸던 것은
바리새인의 모세 율법에 충실한 종교적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유대인의 존경을 받았고
유대교를 지탱하였던 지주요, 그 기둥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출현은
유대교의 중심이었던 바리새인과 충돌과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리새인의 외식을 공격하였고
유대인의 존경을 받았던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던진 말씀의 검으로 말미암아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진리의 빛으로 바리새인의 외식, 그 가면을 벗기고 진리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빛 앞에 드러난 바리새인의 외식은
오늘날 종말론적인 기독교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은 구제의 외식을 비롯하여 기도의 외식, 금식의 외식,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외식, 십일조의 외식 등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그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을 회칠한 무덤이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고 책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의 종교적 외식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는 것이요,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며 저주하였습니다.
또한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소경된 인도자라고 하였으며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고 책망하였습니다.
하루살이는 율법의 금한 음식이 아니지만
율법의 금지 음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같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습니다.
포도주틀에 날아드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한 낙타는 율법으로 먹지 말라는 음식이요,
바릿인들은 율법의 금기를 어겼습니다.
☞ 다만 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 그것들은 새김질은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니
너희에게 부정하고(신14:7)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한국 교홰를 비롯한 이단과 사이비에 가득합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의 외식은 지옥의 판결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종교적 도적이요, 강도였습니다.
양의 탈을 쓴 바리새인의 외식은
오늘날 교회의 강단을 장악한 사역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강단의 설교는
마태복음 23장을 절대로 선포하지 못합니다.
혹 자신을 선한 목자로 가장하고
용감하게 마태복음 23장에 기록된 말씀의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도 없지 않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마태복음 23장을 강론할 수 있는 설교자는
바리새인의 모든 외식을 극복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한 목자의 형상을 가졌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기도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이요,
시장어귀에서 기도함으로 기도의 존경을 받는 외식으로 하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외식하지 않는 골방의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되며 응답받는 믿음의 향기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외식의 기도를 강조하면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골방의 기도를 버렸습니다.
오늘날 기도의 외식은 특새를 비롯한 각종 기도 모임과 소위 중보기도로
오늘날 한국 교회 영성 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용한 무당이 된 기도의 외식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성도의 고혈을 짜내는 소위 말하는 현금지급기가 되었습니다.
골방의 기도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지 않으며
기도로 존경받고 축복예언기도로 성도이 등을 쳐먹지 않습니다.
아직도 강단에서 줄세워 신년 축복 안수 기도를 하며
블록체인의 지갑을 채우는 탐욕의 기도는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신령한 복을 받기 위한 별미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날조하고 왜곡하고 편취한 파렴치한 사이비 종교 사기꾼의 전형입니다.
금식의 외식은 정치꾼들의 전유물이 되었지만
여전히 종교계에서도 금식의 외식으로 종교적 탐욕을 취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십일조 외식은
십일조의 정신인 인과 의와 신을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한국 교회의 십일조 망령은
인과 의와 신을 버렸습니다.
성서지대의 십일조는 가나안 땅의 소산으로 드리는 것이요,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십일조 항목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자녀들 용돈의 십일조와 시간의 십일조까지 강조하였던 한국 교회는십일조 외식의 끝판왕이요,
말씀을 외곡하고 날조하면서 가장 말씀의 중심이라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자가당착에 빠졌습니다.
말라기 3장의 십일조의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저주의 판결문입니다.
말라기 시대의 스룹바벨 성전은
레위와 맺은 평화의 언약을 깨뜨리고 제사장은 성전을 떠났고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인과 성전을 지키던 문지기 마저 떠나 이방인의 신전이 되었습니다.
☞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말2:1-9)
구약의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기업이요,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자를 구제하는 헌물이었습니다.
성막과 성전, 그리고 열 두 지파의 제도가 살아 있을 동안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로 십일조를 하지 않아 레위인은 유랑자가 되고 다른 지파의 종이 되었습니다.
의와 인과 신의 십일조 정신을 잃은 바리새인의 십일조 외식은
예수님 당시에도 십일조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 역시 십일조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보수의 아이콘이 된 것은
십일조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전혀 없는 무지의 극치요, 십일조의 외식, 그 늪에 빠졌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임재는 십일조의 외식으로 가득한 성전에 임한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유월절 만찬을 행한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그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 탄생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바리새인들이 바치는 십일조의 외식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었으며
초대 교회는 외식의 십일조를 한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으로 가득한 연보로 유무상통하였으며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외식하지 않는 구제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가득한 은혜의 복음을 담았습니다.
또한 바리새인은 안식일의 외식으로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에수님의 생명을 살리는 안식을 훼방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주일로 지키는 한국 교회는 안식일의 정신인 창조 신앙을 잃어 버렸고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을 중심한 유대교 안식일의 외식은
오늘날 안식일을 주일로 지킨 한국 교회의 외식이 되어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보수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외식으로 가득한 바리새인의 신앙은
구약시대 여호와를 바알로 섬겼던 돈을 사랑하는 현세적 사이비 무속 신앙이요
바리새적 후예의 정체성을 가진 한국 교회는
성공과 번영의 꿈과 비전을 좇는 혼잡한 설교로 맘몬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맘몬의 전당이 된 한국 교회는 이단과 사이비의 온상이 되어
종교 다원주의를 주체신앙으로 신봉하는 담무스의 굿당이 되었습니다.
종교적 외식으로 점철된 종말론적인 바벨론 교회의 타락은
악한 영을 따르는 적그리스도가 되어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탐심의 우상으로 비롯된 외식의 실상은
종교를 비롯한 정치와 문화와 교육을 타락시켰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혼란한 사태는 한국 교회 정체성의 혼란이며
종말론적인 외식의 옷과 복음의 갈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가득한 외식의 풍조는
독재 팔이와, 민주 팔이와 시체 팔이요, 감성 팔이로 민주의 옷을 입은 적화의 씨앗을 뿌렸으며
보수 팔이와 애국 팔이와 태극기 팔이와 북풍 팔이로 보수의 적폐라는 참상을 낳았습니다.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는 우리 사회는
종북과 수박 보수, 그 탐욕적 패거리 정치의 실상으로 보수는 적폐가 되고
종북은 적화의 발톱을 드러냈습니다.
정치적 외식의 극치는
시장 경제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파탄지경에 놓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태극기 물결의 애국 운동은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습니다.
좌파 독재 정부의 부역자가 된 한국 교회는
통일선교라는 적화의 전략전술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복음과 애국의 소통이 아닌 쇼통에 놀아나는 나라와 교회는
적화의 우상화, 그 농간에 농락되었습니다.
참으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말씀의 검으로 탐심의 외식을 분별하며
진리와 정의로 가득한 여호와 삼마, 그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성령의 역사로 세울 것입니다.
참된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듣고 믿어 순종하는 곳에
성령의 인치는 구원의 역사는 알곡의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외식의 옷과 복음의 갈등이라는 카페이 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던진 말씀의 검이 되어 불의와 탐심의 외식과 충돌하며 갈등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외식을 행하였던 베드로와 바나바를 책망하며
갈라디아서의 복음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성령과 복음으로 충만하였던 베드로와 바나바였지만
유대인의 외식에 빠졌을 때 바울은 더 신령한 복음으로 책망하며 진리의 복음을 온전히 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1-2절말씀에서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바른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는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양심의 화인을 맞아서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베드로는 벧전2장 1절에서 5절 말씀에서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종교적 외식은 지옥의 판결을 받기 전까지 죽얻 죽음을 깨닫지 못하는 종교적 광란의 좀비가 되어
천국의 문으로 들어 오는 사람을 막고 함께 무저갱에 함몰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그 말씀의 검은 종교적 외식을 타파하며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히4: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