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9
12월24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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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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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7UOtVO2Yfk (박형준 라파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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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밤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성덕이 출중했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가 여행 중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너무 늦은 시각에 머무르기로 약속한 수도원에 도착했답니다. 때마침 세찬 눈보라까지 몰아치니 이빨이 자동으로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했기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 한사람 문을 열어주러 나오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수도원의 높은 담은 그의 목소리를 가로막았고, 아무리 수도원 주변을 뺑뺑 돌아 다녀봐도 철옹성 같은 수도원 담벼락으로 인해 내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나긴 밤이 지나고 첫새벽이 되어서야 문 앞에서 꽁꽁 얼어있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를 발견한 수사들은 너무나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한평생 지난밤만큼 기쁘게 지낸 날도 없었습니다. 지난밤 제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높은 하늘에서 하느님이 눈송이를 하나씩 제게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길고 긴 밤을 얼마나 포근하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의 일화를 묵상하면서 오늘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기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자신을 낮춰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느님께서도 허름한 여인숙 방 하나 잡지 못해 찬바람이 만만치 않은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밤, 또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밤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추위에 오들오들 떠시면서 간절히 문을 두드리시는데, 정신없이 잠만 자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또다시 성탄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가장 최종적이자 구체적인 표현인 육화강생(肉化降生)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성탄의 핵심은 한없는 자기 낮춤이며 겸손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조건 없는 헌신이며 극진한 사랑입니다.
성탄 시기는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극도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겸손의 영성, 마구간의 영성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우리 주변을 한번 주의 깊게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주변에 아기 예수님께서 홀로 추위에 떨고 계시지는 않는지 살펴보길 바랍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미소하고 가난한 이웃들, 문전 박대당하는 이웃들, 소외된 이웃들, 외로운 이웃들, 가슴 아픈 이웃들, 심한 상처받아 속울음 우는 이웃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더욱 허전하고 쓸쓸한 탈북자 형제들,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되어도 마땅히 오라는 곳 한 군데 없는 출소자 형제들. 살을 에이는 추위를 겨우 박스 한 장으로 막아내며 ‘오늘은 어디에 머리를 눕혀야 하나?’ 고민하는 노숙자 형제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성탄 선물 (조광호 신부님)
드릴 선물은 없사오나
첫눈이 오면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만발한 우리들의 죄가
흰 꽃잎으로 떨어져 쌓이는
엄동의 빈터에
천도의 열기를 지닌
당신 숨결과
우리들의 눈물을 간직한
눈사람을 만들어
황금과 유향
몰약이 녹아 흐르는 양지 곁에
팔도 다리도 없는
눈사람을 만들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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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r7_MPLYyY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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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시려 오신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천사들의 알림을 통해 예수님 탄생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성탄은 무엇이었을까요? 삶을 바꿔주는 놀라운 기쁜 소식이었을까요? 그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고통이고 여전히 어둠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 혹독한 박해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는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외부 환경을 변화 시켜주지는 못하지만, 이 환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줍니다. 만약 어둠이 없다면 빛을 볼 수 있을까요? 어둠 속에서만 빛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둠이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내가 미운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것이 사람이건 사회이건 나라이건 세상이건 상관없습니다. 내가 용서하려면 그것들이 나에게 와서 용서를 빌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럼 계속 미워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 어둠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더는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됩니다.
최보기 작가의 ‘국수가 우습니?’란 글입니다. 엊그제는 서울과 인천 사이에 끼어있는 부천시에 취재하러 갈 일이 있었다. 오후 2시 가까운 시각이었는데 약속 시간에 조금 여유가 있는 데다 마침 점심을 거른 터라 간단한 분식 정도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40년 전통 온달 할매 국수’란 조그만 간판에서 왠지 모를 내공이 느껴져 그 집으로 향했다. 간판에 쓰인 대로 80세가 넘은 것 같은 백발의 할머니가 주방에서 국수를 끓이고 있었는데 텅 빈 홀임에도 불구하고 손길이 무척 바쁜 게 이상했다. 주방에 주문을 전달한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손님, 죄송한데요. 잠시 후면 예약된 단체 손님들이 몰려오실 텐데 괜찮을까요?”
“뭐 어때서요? 식당에 단체 손님 오면 좋은 것 아닌가요?”
“그게요…. 식사를 하시는 분들이 그냥 드시는 분들이라서….”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얼른 이해가 안 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잔치국수 한 그릇 먹는데 뭐 이거 저거 따질 필요는 없으니까.
가벼운 생각으로 후룩후룩 국수를 먹는데 주방의 할머니가 사내에게 “이제 들오시라고 해”라고 하자 사내가 문밖으로 목을 내밀더니 “들어들 오세요!”라며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일군의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그들은 잠시 전 식당에 들어올 때 봤던, 빈 터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모두가 중 장년과 어르신들이었는데 살기 넉넉한 사람들은 아닌 것이 남루한 행색들에서 금방 드러났다. 눈치가 9단이라 절에서 새우젓 얻어먹을 위인인 내가 척 보기에 노숙인이나 가난한 분들에게 제공하는 무료 급식임이 분명했다.
‘아, 그래서 그런 질문을….’
카운터에서 국수 값을 계산하던 나는 기자 다운 호기심이 생겨 사내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무료 급식을 하시는 건가요?”
“아, 네…. 정확히 말하면 무료는 아닙니다.”
“그럼 돈을 받는 건가요?”
“그게…. 후원을 받는 거라서….”
“아, 독지가가 계시군요. 날마다 이렇게 하시나요?”
“네, 일요일은 저희도 쉬어야 해서 일요일은 닫습니다.”
“누가 후원을 하는 거예요?”
사내가 잠시 나를 쳐다봤다. ‘누구신데 이렇게 질문을 꼬치꼬치 하시는가?’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저, 실은 제가 신문사 기자예요. 이런 일을 보면 꼭 사정을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 직업병이라서요.”
“아, 기자분이세요? 전 또….”
사내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한 10년 전쯤 일이었어요. 그때는 어머니 혼자서 이 식당을 했었죠. 지금은 제가 식당을 물려받기 위해 같이 있고요. 어느 추운 날 오후 늦게 옷을 반듯이 차려 입은 남자가 들어와 칼국수를 시켰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국수를 다 먹은 후에 냅다 도망을 쳤대요. 골목 입구에 파출소가 있으니까 더 다급하게 도망을 치더랍니다. 어머니는 젊은 사람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럴까 싶어 오히려 저러다 넘어져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한 달 후 쯤 행색이 초라한 남자가 오후 늦게 들어와 칼국수를 주문하는데 딱 봐도 그때 그 남자였답니다. 어머니는 모른 척하며 칼국수를 내주었죠. 국수 양도 곱빼기로 푸짐하게 넣고, 김치도 큰 사발에 담았답니다. 가만히 보자니 국수 먹는 모습이 몹시 불안해 보여 이번에도 또 도망칠 것이 뻔해 보였답니다. 어머니는 그 남자가 국수를 거의 다 먹었을 때 사내 눈에 안 띄도록 주방에 앉아 ‘이번에는 뛰지 말고 그냥 걸어가, 괜찮아. 살다 보면 다 그럴 때가 있어’ 하시고는 화장실 가는 척 주방 뒷문으로 나가셨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오니 사내가 안 보이더랍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8년도 지난 재작년 어느 날 풍채가 눈에 띄게 좋은 남자가 양복을 번듯하게 차려 입고 들어와 칼국수를 주문했답니다. 국수를 다 먹은 사내가 주방에 계신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여기 막 나올 때라 잘 알죠.”
“어르신,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지요?” 주방에서 나온 어머니는 ‘이 사람이 누군고?’ 하는 표정이셨습니다. “글쎄요. 모르겄는디라?” “제가 실은 8년 전 겨울에 여기서 칼국수를 먹고 두 번이나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오늘 국수값 갚으러 왔습니다.” “아…. 허허허, 그런 분들이 한둘이어야지라…. 뭐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제가 그때 두 번째 왔을 때 어르신께서 국수를 다 먹기를 기다리시다가 ‘뛰지 말고 걸어가라. 몸 다칠라. 그럴 때가 있지’라고 허공에다 말씀하시며 자리를 슬쩍 비우셨던 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날 그 말씀 때문에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아들의 말에 따르면 인천에서 가구 공장을 하던 그 사내는 뜻밖의 부도를 크게 맞아 경찰과 채권자들을 피해 도망 다니던 신세였는데 그날 하도 배가 고파 어머니 혼자서 운영하는 식당을 골라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부도 문제가 해결이 잘 돼 다시 재기할 기회를 얻었고, 죽을 힘을 다한 결과 오히려 부도 전보다 회사를 키우는 데 성공을 거둬 어머니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어르신, 비용은 제가 능력 되는 날까지 매달 댈 테니 십 년 전 그때 저처럼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수를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돈까지 대신다는데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걸 거절하겄소. 나도 이제 죽으면 극락에 가고 싶소. 재료비 원가만 대시오.” 그런 인연으로 시작해 오후 2시가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수를 끓여준 지 벌써 2년이 됐는데, 오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해 하루 서른 명 선을 유지하는 질서까지 생겨났다고 했다. [출처: ‘국수가 우습니?’, 최보기 작가, 블로그 ‘최보기의 책보기’]
하루에 같은 죄를 490번 용서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저지르는 잘못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용서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 용서는 어떤 힘으로 이루어질까요? 바로 자신도 부모로부터 용서 받으며 자란 사람이고 자신이 부모로서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위 이야기에서 국수를 먹고 도망쳤던 그 사람은 세상에 대한 원망이 컸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당연히 그렇게 해도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용서를 받고 나서는 이제 용서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용서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만약 이런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할머니의 희생은 무가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목자들에게 세상은 비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 은혜로운 곳이 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변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이고 성탄을 맞는 자세입니다. 믿음의 변화.
어떤 ‘성탄 영상’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성탄절에 자녀들과 손주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습니다. 다들 바빠서 이번에도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들입니다. 몇 년을 그렇게 홀로 성탄절을 보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탄 전에 자녀들은 아버지의 ‘부고’를 받습니다. 자녀들은 그동안 부모에게 잘하지 못한 것에 가슴 아파하며 모두 집으로 모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아버지는 살아계십니다. “너희를 다 모이게 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더구나!” 형제들은 아버지와 함께 모여 다 함께 기쁨의 성탄을 즐깁니다. 세상 근심 걱정은 모두 잊고서.
이 짧은 영상이 어쩌면 성탄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주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그 이전에는 자녀들이 돈 버느라 바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는 이제 다 받은 사람들이 됩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우리를 모으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습니다. 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세상 것을 잊고 하느님 자녀임을 다시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행복에 참여합니다.
제가 강론을 매일 쓰는 이유는 어머니께서 어려운 형편에도 한 끼도 굶기신 적이 없기 때문이고, 환자 영성체나 병자 성사를 나가 조금이라도 더 충실하여지려는 이유는 홍수가 졌을 때 일 나가셨던 아버지께서 남겨진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헤엄쳐 건너오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받은 사람입니다. '다' 받은 사람입니다. 받은 사람이 되지 않으면 줄 수 없습니다. 못 받은 사람에서 이제 다 받은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하느님을 받으면 다 받은 것입니다. 다 받은 사람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구유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그분께서 우리 것이 되러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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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난 11월 30일 한국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꿈과 열정을 담아낸 영화 ‘탄생’이 개봉되었습니다. 영화는 개봉되기 전에 바티칸에서 ‘시사회’를 가졌습니다. 시사회 현장에서 김대건 신부님 역할을 맡았던 배우 윤시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조선의 청년 김대건은 바다 건너 어느 곳에 바티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청년은 언젠가 바티칸에 가고 싶은 꿈이 있었을 것입니다. 청년 김대건의 꿈은 200년이 지난 오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 김대건의 역할을 하였지만 청년 김대건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화의 제목 ‘탄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탄생은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탄생은 새로운 시대의 기준점이 되기도 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에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천동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지동설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마트폰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 선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탄생’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통해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살던 시대의 조선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새로운 문물은 왕조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봉건제도가 아닌 산업혁명의 시대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세상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시대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는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같은 형제 자매였습니다. 귀족도, 평민도, 노예도 모두 같은 형제 자매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새로운 학문을 배웠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웠습니다. 문을 굳게 잠갔던 조선의 문을 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다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함께 하였던 가톨릭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박해의 칼날이 무서웠고, 고통과 죽음의 터널이 길었지만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동료 순교자들은 103위 성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탄생을 역사의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예수님 탄생 이전(Before Christ)과 예수님 탄생 이후(Anno Domini)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던 한 아이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께서 오셨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신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 창녀, 이방인, 중풍병자, 나병환자,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죄는 용서받았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면 우리들 역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세주의 탄생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경건한 마음으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우리에게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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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1-14: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나셨다
호구조사의 상황은 요셉과 마리아를 왕도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다. 이곳은 다윗의 왕권이 시작된 곳이다.(루카 2,1-5; 참조 1사무 16,1-13) 여기서 마리아, 시온의 딸인 그리고 성령의 거룩한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루카 2,6-7)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신다.
들에서는 “주님의 천사”가 “주님의 영광”과 함께 깨어있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복음을 전한다.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부활의 명칭). 그 표지는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가 구유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지극히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여기서 말씀이 전해졌다. 즉 복음화되었다. 목동들이 알아들었고, 아기에게로 달려갔다. 이것이 “오늘”(11절) 모든 사람에게, 가시적으로 영원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과 함께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참으로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 위에 죽으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시며,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사셨고, 그러므로 그분은 참으로 탄생하셨다.
성탄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깊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 무덤에서 옛 시간의 날이 끝나고, 새로운 “날”, “낮”, “오늘”이 시작된다.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날은 무덤에서 지지 않는 날로 시작되며, 탄생에서도 그렇다.
* 같은 인격(위격)이 “살아 계신 분”으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때문에 탄생에서도 “살아 계신 분”으로 태어나셨다.
* 수의로 싸여 무덤에 모셔졌다. 탄생에서도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다.
* 무덤에서 인간으로서 신적 생명으로서 나셨다. 때문에 그분의 탄생은 즉 인간이 되신 것은 무덤을 위한 것이다.
생명에로 태어나기 위하여 죽으셨다. 진정 부활로서 아버지는 성령의 복되신 영원 안에서 영원한 아들의 인성을 낳으셨다. 바오로 사도가 시편 2,7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죽음을 위해 태어나셨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십자가는 탄생을 위한 것이며, 탄생은 십자가를 위한 것이다.
* 마리아와 아리마태아의 요셉은 무덤에 묻기 위해 수의로 싸는데 있었고, 그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포대기에 쌓아 구유에 모신 것이다.
* 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무덤이 없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요한 19,41), “3일” 때문에라도 사랑으로 내어드려야 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분을 위해서는 탄생할 자리가 없었다.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여관은 모두 예약이 되어 있었다.
*몰약은 무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위해 쓰였다.(요한 19,39) 그 몰약은 박사들이 아기에게 바친 예물이었다.(한 번만 쓰였다)
* 하늘의 천사들은 부활에도 있었으며, 탄생에도 있었다.
* 초자연적 신적 빛이 부활에도 빛났고, 같은 것이 탄생에도 있었다.
* 부활 사건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신현) 앞에서 두려움은 탄생에서도 나타난다.
* 제자들 사이의 부활에 대해 놀라움은 탄생에서의 목동들의 놀라움과 같다.
* 두려움에 대해 부활에서 천사들의 안심시키는 “두려워 말라!”는 말이 탄생에서도 같이 나타난다.
* “큰 기쁨”은 무덤에서 여인들에게 힘을 주었고, 같은 기쁨을 목동들도 맛본다.
* “표지”로서 무덤에 있던 얼굴을 싸맸던 수건과 끈이 표지가 되었으며, 같은 표지로서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있다고 하였다.
* 부활 사건에서 제자들이 달려가는 것, 미래의 “하느님 양 떼의 목자들”, 탄생하신 곳으로 달려가는 목동들이 나타난다.
* 제자들에게 여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부활, 탄생에서는 목동들의 주님의 찬미와 찬양을 볼 수 있다.
* 위대한 왕의 도시, 예루살렘(시온)에서 부활하셨고, 인간적인 왕의 도시, 메시아적 왕의 도시, 다윗 왕의 도시, 예수께서는 인성으로 그리스도의 선조인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부활의 “표지”는 탄생의 “표지”이다. 이것은 기쁜 소식(복음)이며 살아있는 표징이다.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이분이 바로 “오시는 분”이시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다.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분은 평화의 왕자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아기로 태어나셨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분이 바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모든 이의 구세주이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가르치고 계시다.
복음에 나타난 성탄 사화가 바로 부활을 통하여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탄의 신비는 바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탄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십자가와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가 모두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위하여 죽는 것을 말하며, 부활의 신비는 거기에서 오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성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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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의 노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앞선 본문, 특별히 1장 59-66절과의 관계에서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에 대한 찬미를 표현하며(루카 1,64 참조), 유다 산악 지방 주민들이 아기에 관하여 제기한 질문(1,66 참조)에 답변하고 있습니다.(1,76-77 참조)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향한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즈카르야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원수에게서 구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06[105] 참조). 하느님의 구원 행위는 그분께서 백성들에게 보여 주신 자비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하여 이어 오는 계약에서 기원합니다. 노래의 전반부인 첫 번째 부분(1,68-75)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강조하고 그 근거를 설명합니다.
노래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두 번째 부분(1,76-79)은 하느님께서 구원 약속을 성취하시고자 계획하신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 두 인물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백성을 준비시키는 선구자입니다. 다른 한 명은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즈카르야는 ‘높은 곳에서 찾아오는 별’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드님의 탄생이 자리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응답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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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밤, 천사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달받은 이들은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벗어나 들에서 야영하며 양들과 지냈기에 몸에서 늘 가축 냄새가 배어 나던 이들입니다. 게다가 흙먼지로 불결하고, 초라한 차림으로 다니니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주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이들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여 사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하던 목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목자들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된 삶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비추어진 큰 빛이야말로 그들이 오랫동안 짊어진 멍에를 부술 평화의 한 아기의 태어남을 뜻한다고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의 천사도 태어난 아기로 말미암은 평화를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알려 준 아기는 “구원자, 주 그리스도”로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평화의 군왕”이십니다.
또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며 구세주 탄생의 신비를 더욱 확실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끝없는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뵌 목자들처럼, 세상 눈에는 변변하지 못한 인생일지라도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감이 이 밤에 절로 생깁니다. 평화가 끝없이 이어지기를 이 거룩한 밤에 오신 구세주께 은총을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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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아버지가 부르는 ‘즈카르야의 노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루카 복음사가가 수집하여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기리는 노래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래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장 66절)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성령으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대답입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건을 밝히심으로써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이 드러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또한 그 사건들의 의미를 아시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즈카르야의 노래 전반부는 원수들과 미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박해를 받아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다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두려움 없이 거룩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기고 평화의 길로 들어선 이들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찬미받으소서.’ 하고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시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량’은 노예 제도 시대의 개념으로, 노예의 몸값인 속전(贖錢)을 내고 노예를 해방시키거나 포로를 석방시켜 자유인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다는 말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베푸셨다는 의미로, 장차 오실 메시아가 원수들을 쳐서 승리한다는 말입니다.(유충희, 『루카 복음』, 68-69면 참조)
노래의 후반부는 세례자 요한의 앞날과 역할을 예언하는 시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장차 예수님께서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아 구원받으리라는 사실을 주님의 백성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 즈카르야는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합니다. 나의 혀와 입은 무엇을 노래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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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하느님>
루카 1,67-79 (즈카르야의 노래)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 하느님>
우리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몸소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우리 하느님은
당신과 우리를 가르는
우리의 헛된 울타리를 허무시어
우리가 당신과 함께할 수 있게 하시는 분
우리 하느님은
우리를 위하는 체 죽음으로 내모는
이기심과 무관심과 탐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 구원하시는 분
우리 하느님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김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시는 분
우리 하느님은
어둠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빛나는 살림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
더불어함께 평화를 이루도록 북돋우시는 분
우리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를
당신보다 앞서 온 누리에 보내시어
우리가 당신의 사람임을 드러내게 하시는 분
우리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몸소 찾아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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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백성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 앞으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성이 더 크게 나라를 걱정하고 내로라하는 이들은 기득권세력이 되어 자기의 잇속에 매여 있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변덕스럽지만, 하느님은 요지부동하신다. 하느님은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 1,75) 이것은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영적인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 1,78) 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 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 40,3)라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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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UN 산하 전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 네트워크(SDSN)에서는 매년 ‘세계행복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이 발표에서 한국은 전체 149개국 중에서 59위를 차지했습니다. 1인당 GDP가 35,000달러가 넘는 우리나라이지만 행복 순위는 한참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통해 행복한 나라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유사시에 기댈 누군가가 있다.’
자신이 겪은 사고나 트라우마를 겪으며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면, ‘왜 내게 발생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자기를 부정적인 틀에 가둬둘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삶을 쉽게 바꿔서 행복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질문의 초점이 ‘왜’가 아니라 ‘어떻게’ 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로 바꿀 수 있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계속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나의 삶을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도 ‘왜’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듣고는, 자신들은 나이가 많다며 ‘왜’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는 말문이 닫혀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명명식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해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했던 말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나’에서 벗어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왜’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초점은 어디에 맞춰져 있습니까? 이제는 ‘나’에서 ‘우리’를, ‘왜’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나’와 ‘왜’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큰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서 살아간다면, 주님의 뜻에 한층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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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닫힌 말문이 열리기까지>
지난 17일 이후 복음을 유심히 읽은 분들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한 분들 가운데서 오직 즈카르야만 말문이 막히고 그래서 찬미할 수 없었음을 보셨을 텐데 그것은 즈카르야만 성령에 이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즈카르야의 아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라고 하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같은 부모인데 즈카르야의 찬미는 엘리사벳의 찬미와 시차가 있고 오늘 비로서 성령에 가득 차 외칩니다.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달리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고 말문이 막힌 이유는 그의 합리적인 생각이 믿음보다 강해 믿기보다 의심케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의심이 성령이 들어올 문을 막았고, 성령께서 들어오실 문을 막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찬미의 말문뿐 아니라 아예 모든 말문을 막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이 더 그렇지만, 의심도 말문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막히게 합니다. 불신과 의심은 나의 문을 모두 걸어잠그게 하잖습니까?
나 외에 모든 사람을 도둑으로 의심하거나 불신하면 모든 문을 걸어잠그겠지요. 반대로 누구나 믿으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요.
그런데 그 의심엔 하느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하느님을 더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아예 존재 자체를 불신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교만한 사람은 성령 대신 불신과 의심의 망령妄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의 경우에는 그런 의심은 아닐 것이고, 보통 사람의 그 합리적인 생각 때문이고 그러므로 그 의심은 병적인 의심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의처증처럼 병적인 의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의심이 인간적으로는 병적이지 않더라도 영적으로는 병적이거나 적어도 장애가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는 것,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생각은 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능력이고 가능성이고 구원인데 합리적인 생각에 갇히면 하느님의 능력과 가능성과 구원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합리적인 의심이 깨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이것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시차인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아들처럼 생각하는 형제가 외국에서 살다가 아주 큰 병이 들어 돌아왔습니다.
그 부모도 제가 같이 잘 알고 있는데 아버지는 말을 듣고 고칠 수 없다고 체념하고 대비하는 데 비해 어머니는 단순해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고 그 형제가 말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맞다고 제가 말해주면서 형제도 어머니처럼 믿으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의사도 손 놓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어머니의 단순성은 한편으로는 믿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입니다.
아무튼, 즈카르야는 합리적인 의심이 깨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말문이 막히는 고통을 겪은 다음 구원을 체험하고 찬미하는데 우리도 즈카르야와 다르지 않다면 말문이 열리는 그 날을 고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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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나로 사는 방법”
-회개, 겸손, 감사, 찬미-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89,2)
어떻게하면 참나로 살 수 있을까요? 옛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한번뿐이 없는 유일회적 삶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참나로 살 때 아름답고 행복하며 자유롭습니다. 두가지 방법입니다.
1.인생 순례 여정중 순례자 신분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인생 순례 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여 현재 어느 시점時點에, 또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중 현재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는지 살펴보며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2,내 삶의 성경을 수시로 렉시오디비나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신구약성경을 1차적 렉시오디비나의 대상으로 하여 자연성경, 내 삶의 성경을 렉시오디비나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오늘은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에 대해 주로 언급하려합니다.
하나뿐이 없는 아직은 미완未完의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나이 곱하기 햇수하면 전체쪽수가 나옵니다. 날마다 한쪽씩 써내려 가는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디비나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지금까지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디비나 하면서 하느님 섭리 은총의 발자취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저절로 뒤따르는 회개와 겸손, 감사와 찬미를 통한 참나의 발견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배우고 확인하는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나탄의 신탁(oracle)은 하느님께서 나탄에게 삶의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다윗의 무지를 일깨우라는 것입니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에 이어지는 주님의 설명은 온통 주님이 주어가 된 문장입니다. 다윗이 주어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어입니다. 바로 주어 자리에 주님을 놓고 읽는 것이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내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수도원에 보내주셨다, 하느님께서 세례를 통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로 읽는 것이, 즉 내가 주어가 아니라 하느님 주어로 읽는 것이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대신하여 다윗에게 이점을 가르치는 나탄입니다.
“나는 양떼를 따라 다니던 너를 목자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나는 그의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해질 것이다.”(사무하7,8ㄷ-12.14ㄱ.16)
온통 다윗이 주어가 아닌, 하느님의 주어가 되어 다윗을 위해 하신 위업의 나열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렉시오 디비나입니다. 저절로 회개와 겸손이요 무지의 교만이나 탐욕에서 벗어나 참나를 살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문장의 주어가 되어 오늘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께 저절로 샘솟는 감사와 찬양의 삶이 될것입니다.
내 중심에서 내 삶을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내 삶을 관망해 보는 것, 바로 이것이 렉시오디비나입니다. 회개와 겸손을 통해 참나의 아름답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는 방법이 바로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내가 삶의 주어가 아닌 하느님이 주어가 된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삶의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나 참나를 사는 방법은 하느님 중심의 렉시오디비나 방법 하나뿐입니다. 내가 삶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권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지 않고는 참된 회개도 겸손도 감사도 찬양도 나올수 없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렉시오디비나에 절대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의 노래(canticle)로 온통 하느님이 주어가 된 문장으로 하느님 위업의 나열입니다. 하느님의 위업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즈카르야입니다. 아마도 즈카르야는 세례자 요한이 탄생하기까지 불신의 벌로 벙어리가 되어 피정하며 지내는 동안 깊이 자기 삶의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를 하느님 중심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렉시오디비나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난 빛속에서 부르는 자유로운 영혼의 찬미가입니다. 이또한 마리아의 노래처럼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노래에 속합니다. 우리 천주교 수도자들이 아침성무일도 끝무렵에 매일 아침마다 즈카르야와 함께 부르는 찬미가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1,68-79)
온통 하느님이 문장의 주어가 된, 하느님 중심의 구원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무지의 교만으로 눈먼 내 중심의 독서가 아니라 바로 이렇게 하느님 중심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읽는 삶의 독서가 바로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이렇게 내 삶의 역사를, 내 가정공동체의 역사를, 내 수도원의 역사를, 내 나라의 역사를 하느님의 눈으로 읽는 것이 렉시오디비나입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의 렉시오디비나는 끊임없이 확장됩니다. 이렇게 렉시오디비나가 전방위적으로 확장되어 생활화, 일상화될 때 삶의 정화와 성화는 물론 관상적 영적 삶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루하루 내 삶의 성경 렉시오디비나 수행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복음 환호송이 은혜롭습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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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신다."(루카1,78)
<마라나타!>
오늘 복음(루카1,67-79)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성령의 기쁨으로 가득 찬 즈카르야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노래입니다. 구원자이신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고, 세례자 요한이 그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1,78-79)
이제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성탄이 지금 우리 문 앞에 와 있습니다. 오늘 밤에는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노래할 것입니다.
성탄은 기쁨입니다. 성탄은 우리 모두의 기쁨입니다. 성탄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은 성탄을 잘 준비해 온 이들, 그렇지 못한 이들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 날에는 담벼락도 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로, 어느 누구도 성탄의 기쁨에서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성탄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 죄인들, 약한 이들을 위한 성탄입니다. 이들의 부활과 구원을 위해 오십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함께 기뻐하면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이 날은 담벼락도 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로 큰 기쁨의 날이니, 이 날 만큼은 서로 싸우지 말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날이 되게 합시다!
하느님께서 가장 누추하고 낮은 곳에 탄생하십니다. 가장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말 구유간에 탄생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성탄을 함께 기뻐하면서, 소외된 낮은 곳을 바라봅시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복음 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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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8LKR6IYvA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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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 1, 78)
마지막까지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준비했던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기억합니다.
평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음을
알려줍니다.
별은 망설이지
않습니다.
떠나오지 않고서는
빛이 될 수 없는
빛의
신비입니다.
빛은 죽음을
비추고
우리의 어둠을
비춥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우리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참된
빛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빛입니다.
빛은 빛날수록
소중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사랑의 빛입니다.
사랑의 빛은
삶의 여백을
보게 합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여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백이 있기에
우리 자신을 만나고
우리 자신을 비추는
별을 보게 됩니다.
별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제 자신을
만납니다.
별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법을 배웁니다.
별도
사람도
내려놓을 때
더욱 빛납니다.
여백을
채워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빛과
여백(餘白)이
하느님께서
탄생하실
빈자리가 됩니다.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려야
별을 만나고
보게 되는
참된 사랑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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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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