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츠나우에서 루체른 가는 길...루체른 호수를 끼고 간다.
오후 세시 가까이에 비츠나우에서 루체른으로 출발을 하였는데 루체른을 들렀다가 스위스 취리히로 가야 하는 일정으로 루체른
에서는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30여분 내외로 루체를 호수를 끼고 가는 길이다.
비츠나우에서 출발하지 전...그림같은 도시 비츠나우이다.
버스를 타러 가고...
루체른으로 가는 길의 풍경
하늘이 맑으면 더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었으려나...
빗속에 보는 경치도 나쁘지는 않다.
루체른에서는 루체른호수에서 유람선을 타는 것과 빈사의 사자장이 있는 곳, 그리고 카펠교를 둘러보는 것으로 루체른에서 일정
이 마무리 되고 취리히로 출발을 하게 된다.
루체른(독일어: Luzern, 프랑스어: Lucerne 뤼세른)은 스위스 중부 루체른주에 있는 도시로, 루체른 주의 주도이다.
루체른호의 서안에 붙어 있으며, 로이스강이 시내를 흐른다. 8세기에 수도원과 대성당이 건립되었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교통로
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스위스 가입 후 가톨릭 중심지였으며, 1873년까지 교황대사가 이 도시에 주재하였다. 알프스 산맥의 유명
한 필라투스 산기슭에 위치하여, 알프스 산맥과 루체른호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유명한 관광지이다. 성당과 박물관을 비롯한
옛 건물도 많이 남아 있다.
인구는 8만2천 정도로 스위스 인구 8,700만 인구의 1%정도가 사는 소도시이다.(백과사전)
루체른...위키백과
루체른...그림같은 도시들이다.
루체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선착장으로 가서 유람선을 타고 루체른 호수를 둘러보는데 소나기 같은 비가 내린다. 춥기도 하고
비가 와서 밖에서 구경을 하지 못하고 안에서 구경들을 한다.
루체른에 도착을 하고....
비가 와서 검게 보이는 루체른 호수...사실 유람선을 타지 말고 루체른 시내를 둘러보아야 하지만 이미 예약이 되어서 어쩔 수가
없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유람선을 타러 가는 모습들 치고는 좀 그래 보인다.
오래된 가로수가 이 도시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루체른호수는 루체른 시의 이름을 따서 지었는데 경사가 가파른 석회암 산들 사이의 해발 434m 지점에 절경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는데, 이 산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북쪽의 리기 산과 서쪽의 피라투스 산이다. 호수 면적은 114㎢로 길이 약 39㎞, 최대 너
비 3㎞, 최대 수심 214m이다.(사전에서)
루체른 호수...인터넷
유람선을 타고 보는 호수
유람선에서 본 루체른
비가 오고 추워서 사람들이 밖에 나왔다가 금방 안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
호수주변의 경치들
그리스도의 상이 서 있는데 이곳에 서 있는 사연이 있을 터인데....
비가 와서 멀리보이는 풍경은 흐리다.
30여 분 정도 유람선을 타고 곧바로 빈사의 사자장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사진만 찍고는 카펠교 쪽으로 간다.
빈사의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 786명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위령비이다.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지켜 왔지만, 과거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높은 임금 때문에 용병으로 지원하는 국민이 많았
다. 덴마크 출신 조각가였던 토르발센의 작품으로, 프랑스 왕조 부르봉 왕가의 문장이었던 흰 백합이 그려진 방패 위에 부러진 창
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자의 용맹스러움이 묘사되어 있다. 자연석인 거대한 바위 중간을 쪼아서 사자를 만들었는데 사자를 보고
있으면 목숨을 걸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서 숙연해지게 된다.
유람선에서 내려서 빈사의 사자상이 있는 곳으로 간다.
시간이 부족하다가 보니 가이드가 재촉을 한다.
빈사의 사자상... 빈사(瀕死)라는 단어는 죽음에 이른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죽어가는 사자라는 뜻으로 1792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16세의 궁전을 지키다가 죽은 스위스의 용병을 상징한다.
옆구리에 부러진 창과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 그리고 부르봉왕가를 상징하는 백합문장을 깔고 죽어가고 있다....용병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던 그 때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아래 글씨는 그 때 그 자리에서 전사한 사람들과 살아 남은 사람들의 명단이라고 하며 화강암에 새긴 사자의 길이는 10m이고 높
이는 6m라고 한다.
사자상이 있는 곳에서는 사진만 찍고 카펠교 쪽으로 간다.
길거리 모습
카펠교에 도착을 하고
카펠교...인터넷
불ㅊ에 탄 카펠교
복원된 카펠교와 그림들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목조 다리로, 1333년에 호수로 잠입하는 적들을 감시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전체 길이
가 204m이다. 17세기에 다리 천장에 루체른의 역사와 수호 성인을 그려 넣은 111개의 판화 그림이 유명했지만 1993년 대형 화재
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고, 다리는 다음 해에 대부분 복구되었지만 판화 그림은 25개 정도만 복구되었다. 다리 위의 팔각형 탑은
높이 34m의 ‘물의 탑’으로 원래는 망을 보기 위한 탑으로 지어졌지만 나중에는 고문실과 감옥, 보물실과 기록 보관실로 사용되다
가 현재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기념품 가게로 운영되고 있다.(백과사전)
그런데 다리의 그림의 원본은 별도로 보관이 되어 있어서 화재로 소실된 것은 복사본이었다고 한다.
카펠교 입구에서 사진을 찍어 본다.
카펠교 주변
둥그런 탑은 감옥으로도 이용되었다고...
아직도 다리에는 꽃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하늘에서 보면 이렇게 생겼다....루이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오른쪽에는 다리가 없었고 그 당시에는 카펠교가 루체른호수로 들
어오는 길목인 셈이다.
버스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고....
다리 건너는 루체른 호수이고 이쪽은 루이스 강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는 카펠교...
다리에 올라가 볼 시간도 없이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서둘러 취리히로 출발을 하는데 이 도시에 머문 시간은 한시간 반이
체 되지 못한다.
루체른애서 취리히로 떠나는 시간이 5시로 취리히에서 관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2월에 열리는 가면축제의 모습
이 도시에는 음악회도 많이 열리지만 2월이면 루체른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면 축제가 열리는데, 루체른뿐만 아
니라 루체른 호를 끼고 있는 마을에서도 열리는 축제라고 한다. 가족별로, 팀별로 독특한 가면과 복장을 한 사람들이 루체른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고 한다.
https://youtu.be/ufI7r6qbI7s...루체른 가는 길과 호수
https://youtu.be/Nd69JuLqIUo....루체른 유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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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사의 사자상에 대한 이야기
스위스는 중립국으로서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지켜 왔지만, 과거 생활고에 시달리던 시절에는 높은 임금 때문에 용병으로
지원하는 국민이 많았다. 이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 786명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위령비이다. 덴
마크 출신 조각가였던 토르발센의 작품으로, 프랑스 왕조 부르봉 왕가의 문장이었던 흰 백합이 그려진 방패 위에 부러진 창을 맞
고 쓰러져 있는 사자의 용맹스러움이 묘사되어 있다. 자연석인 거대한 바위 중간을 쪼아서 사자를 조각한 모습에 관광객들은 놀라
움을 감추지 못한다.
빈사의 사자상(瀕死의 獅子像, 독일어: Löwendenkmal 뢰벤뎅크말)은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조각상이다. 덴마크의 조각가인 베르
텔 토르발센이 설계하고 루카스 아호른이 조각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1792년 8월 10일 사건 때 튈르리 궁전을 사수하다 전멸
한 라이슬로이퍼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미국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이 조각상을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
라고 극찬하였다.
17세기 초반부터 스위스 근위병 연대가 프랑스 왕실의 일부로 자리를 잡았다. 1789년 10월 6일,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함께 베르
사유 궁전에서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이사해야 했다. 1791년 6월 루이는 왕당파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밀집한 국경 근처의
몽메디로 도망치려 했다. 1792년 8월 10일 시민혁명군이 궁전을 습격했다. 왕실 가족들이 입법의회로 피신하기 위해 튈르리에서
호위를 받자, 자연스럽게 전투가 발발했다. 스위스 근위대는 탄약이 부족했고 수적으로 열세였다. 총격전이 시작된 지 30분 후에
국왕은 스위스 근위병에게 퇴각하고 병영으로 돌아가라는 서신을 남겼다.[2] 전투 중간에 이 서신이 전달되었지만, 근위병들이 이
미 더 이상 방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후였다.
튈르리를 지키던 스위스 근위대 760명이 전투 중에 죽거나[4] 항복한 후 학살당했다.[5] 약 200명의 사람들이 감옥에서 부상당한
채 죽거나 9월 학살로 사망했다.[6] 튈르리에서 탈출한 약 100명의 스위스인을 제외하고, 연대의 유일한 생존자는 국왕의 허가를
받아 8월 10일 며칠 전에 노르망디로 곡물 수송대를 호위하기 위해 파견된 300명의 강력한 분견대였다.[7] 비록 튈르리의 지휘관
카를 요제프 폰 바흐만 소령이 붉은 근위대 제복을 입은 채 9월에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 서게 되었지만, 생존한 두 명의
스위스 장교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고위 장교가 되었다.
반란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근위대와 해체된 스위스 전선군 병사들 중 약 350명은 이후 프랑스 제1공화국 혁명군에 입대했고, 다
른 이들은 방데 전쟁에서 반혁명군에 합류했다. 1817년 스위스 연방 의회는 생존자 중 389명에게 충성과 명예(Treue und Ehre)
훈장을 수여했다.
기념비 건립은 전투 당시 루체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근위대 장교 카를 파이퍼 폰 알티쇼펜이 주도했다. 그는 1818년에 모금
을 시작했으며, 이 기념비 설립은 유럽 왕실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이 사자상은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이 설계했고 1820
년부터 1821년까지 루체른 근처의 사암 채석장에서 석공 루카스 아호른(Lukas Ahorn)이 조각했다. 조각을 만들 당시 일부에서는
외국 군주를 위해 죽어간 스위스 시민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불쾌해 했고, 스위스 자유주의자들은 이에 항의
하기 위해 사자발 중 하나를 잘라내려고 계획하기도 했다.
이 기념물은 “스위스의 충성과 용맹”(Helvetiorum Fidei ac Virtuti)을 기리는 것이다. 절벽 안쪽 면에 새겨진 이 비석은 길이가 10m,
높이가 6m이다. 창에 찔려 죽어가는 사자는 프랑스 왕실의 플뢰르 드 리(fleur-de-lis, 백합)이 새겨진 방패를 덮고 있으며, 그 옆에
는 스위스의 국장이 새겨진 방패가 있다. 조각상 아래에는 장교들의 이름과 전사자(DCCLX = 760)와 생존자(CCCL = 350)의 대략
적인 숫자가 적혀 있다.
첫댓글 죽기전에 꼭 가보고
싶은나라 사진으로
구경 잘 했네요.
환상의나라 이탈리아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