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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크리스토교가 들어온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크리스토교라 하면 개신교와 천주교를 통틀어서 말하는데,
개신교에 대해서는 교과서나 수업시간에 거의 설명을 하지 않고
그나마 천주교의 전래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도 다루고 있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주로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차츰 신앙으로 믿어지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다른 나라의 크리스토교 전래 역사와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양반들인 남인 학자들이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
천국 복음을 전하는 크리스토교의 특성상
대부분의 크리스토교 전래는 낮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들,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먼저 전래 되고,
차츰 상류층들에게 전래 되는 것이 특징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례가 달랐다.
천주교를 처음에는 학문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크리스토교 사상을
유교의 근본 원리인 충효를 바탕으로 하여 이해하고,
세상을 구원한다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윤리 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는 한편, 중인이나 상민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호응을 얻어
점차 그 범위를 넓혀 갈 수 있었다.
이렇듯 서학은 양반들 그중에서도 특히 남인 학자들에게 처음 소개되었는데,
이들 남인들은 붕당정치가 전개되던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벌어진 환국(換局)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관직에서 소외되어,
낙향 후 학문 연구에 힘쓰거나 그마저도 힘들어 지방에서조차 양반 행세를 하지 못하는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처지의 학자들에게 처음으로 천주교가 소개되면서
정조의 탕평책 이후 관직에 등용되면서 남인들 중에 신자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는 중 남인 학자로 서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이승훈이 사절단의 일행으로
베이징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서양 선교사를 만나 복음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
1784년 초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았다.
그가 돌아오면서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오면서 이후 남인 학자, 중인,
그리고 상민과 부녀자들 사이에 천주교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특히 현세의 고난에 힘들어 하던 농민들에게 인간적 깨우침과
내세의 영생을 약속하는 천주교의 교리는 구원의 가르침으로 비추어졌고,
이 무렵 세도정치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민생이 어려워짐에 따라,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과
현실에서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것은 천주교 선교 역사에서도 희귀한 사례인데,
보통은 선교사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가운데서 신자가 생기면서 세례자가 나타나는데,
이승훈은 천주교 관련 서적을 서학이라고 하면서 탐구하다가 교리를 깨닫고
세례를 받은 사례로
선교(宣敎)가 아닌 도를 탐구하는 즉 구도(求道) 과정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아시아 각 지역에서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에도 18세기 후반부터 이양선(異樣船)이라는 서양의 배들이 자주 나타났다.
이들은 우리나라 해안에 나타나 해안을 측량하거나 통상을 요구해 왔다.
그러는 중에 1832년 영국의 상선 ‘로드 암허스트호(Lord Amherst)’가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이양선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상인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곳에 크리스토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양선을 탄 개신교 선교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천주교를 전하려는 신부들이 아니라 개신교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사들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 선교 원년에 대하여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선교 원년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선교사가 입국한 1884년으로 보고 있다.
이에 한국의 개신교인 장로교와 감리교는 1934년에 각각 50주년 선교기념대회를 열었고, 1980년에는 개신교 11개 교단 대표가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를 결성하였으며,
1984년 8월 15이과 19일 사이에 한국크리스토교 100주년 선교대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 외에도 1885년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 제물포에 발을 디딘 때를 선교 원년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래도 오래된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보다 먼저인 1866년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이때 개신교를 처음으로 전해준 선교사는 토마스 선교사인데,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으면서
선교를 위해 한자를 배워서 한문을 쓸 수 있었기에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통역관의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평양 군민들과 충돌하면서 배가 불에 타게 되고, 상선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된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가 자기를 죽이는 관원에게
자기가 가지고 왔던 한문으로 된 성경책을 전해주었고,
이것이 이 땅에 개신교가 처음으로 전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토마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해준 1866년보다 34년이나 빠른 1832년에 위에서 언급하였던 로드 암허스트(발음에 따라 ‘Amherst’를 ‘암허스트’, 혹은 ‘애머스트’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암허스트’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애머스트’라고 표현하고 있기에 이하에서는 ‘애머스트’라고 표현하겠음)가 충청도 해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할 때 개신교가 처음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로드 애머스트호는 영국의 상선인데,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자체적으로 상선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필요할 때 이를 이용했으며, 가끔씩 회사 소속은 아니지만 용역을 맺어 필요할 때 활용하였다.
애머스트호는 동인도회사 소속은 아니었지만 필요할 때 회사와 용역을 맺어 활용하였던 용선(傭船)이었다.
동인도회사가 동북아시아 지역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애머스트호를 이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애머스트호는 마카오를 출발하여 대만을 거쳐 일본과 조선으로 항해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애머스트호는 우리 역사에 자주 등장하여
개항을 요구하였던 다른 배들과 달리 통상을 요구하면서 평화적으로 접근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에 애머스트호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조선왕조실록 순조 32년 7월 21일의 기록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 이양선(異樣船) 1척이 본주(本州) 고대도(古代島)의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는데, …… 언어가 통하지 않아 문자를 대신 사용하여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상세히 힐문하였는 바, 그들 대답에 …… ‘서양포(西洋布)·기자포(碁子布)·대니(大呢)·우단초(羽緞綃)·뉴자(紐子)·도자(刀子)·전도(剪刀)·요도(腰刀)·납촉(蠟燭)·등대(燈臺)·등롱(燈籠)·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천리경(千里鏡) 등의 물품을 가지고 귀국의 소산물을 사려고 본년 2월 20일 배에 올라 본월 26일에 이곳에 왔으니, 귀국의 대왕에게 전계(轉啓)하여 우호(友好)를 맺어 교역하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우호를 맺어 교역하게 해주기를 바라’며 애머스트호는 1832년 2월 20일 마카오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왔다.
이 배의 규모에 관하여도 조선왕조실록에 적혀있는데, ‘넓이는 6파(把), 길이는 30파’, 라고 적고 있다. 기사의 내용과 현재의 도량법이 다르기에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를 지금의 미터법으로 환산해 보면 넓이는 약 10m, 길이는 약 46m 정도로 파악되며,
이 크기를 톤(ton)으로 환산해 보면 약 500ton 정도일 것으로 파악된다.
이 배는 상선으로 통상 요구가 주 목적이었다.
다시 실록의 기록을 보면 ‘선원은 총 67인이고,
선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칼 귀츨라프’라는 독일인 선교사가 타고 있었다.
귀츨라프는 베를린 선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시아의 이방인들,
특히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꿈을 꾸고 이를 위하여 아시아지역으로 왔다.
처음 왔던 곳이 싱가포르 지역인 바타비아였는데,
여기서 런던 선교회 선교사 한분을 만나 그와 교류하면서 많은 도움도 받고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인을 전도하면서 중국어도 배우고 중국인과 교류를 하였다.
그 뒤 중국행 배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텐진에 도착하여 선교를 하게 되는데,
그 이전에 태국에서 선교를 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때 진료를 받았던 사람들이 이곳에 있으면서 소문이 나서
텐진에서 많은 환자들을 돌보면서 전도를 할 수 있었다.
선교를 위하여 그는 의술을 배웠었다.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신학교에서 기초적인 의술을 배웠는데,
선교지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신학교에서는 선교지에서 필요할 것이라 하여 실용적인 의술과 약초와 약 처방 법 등을
교육하였다.
텐진에서 이렇게 의료 선교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 뒤 마카오로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고,
여기에서 새로운 통상로를 확보하려는 애머스트호를 승선하여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언어에 대한 이해력과 해석하는 능력도 탁월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중국인들에게 중국어와 한자를 배우면서 이를 빨리 익힐 수 있었고,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 번역 사업에도 힘을 쏟기도 하였다.
마카오에서 애머스트호를 탈 때 그는 많은 의약품과 전도책자들을 준비하였다.
당연히 중국에 있으면서 조선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기 때문에
새로운 통상로 개척을 위한 애머스트호였지만
그 배의 의사로서 통역사로 함께 했던 귀츨라프에게는 새로운 선교지 탐방이었던 것이다.
귀츨라프 선교 기념비 - 고대도 선교 기념 공원에 조성되어있다.
1832년 2월에 마카오를 출발한 애머스트호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7월이었으며,
조선에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황해도 몽금포로 7월 17일이었다.
여기에서 한 어부를 만나 전도책자를 건네고 선물도 주고 받았지만 별다른 접점이 없이
이곳을 떠나고 남하하여 충남 보령시 외연도 등을 거쳐 7월 25일에 주민들이 인도하는
안전한 항구 고대도 안항에 정박할 수 있었다.
고대도에서 귀츨라프는 중국에서 익힌 한문을 통하여 필담을 통해 교류하였는데,
양이라고 하는 젊고 똑똑한 고관의 비서와 탱노라는 사람을 통하여 주로 교류를 하였다.
이들을 통해 한문으로 번역된 2권의 성경과 전도책자를 주었다.
귀츨라프는 조선을 방문 후에 『동아시아 항해기』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에서도 고대도에서의 활동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복음을 전하였다는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면,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손짓과 발짓 그리고 간단한 한문으로
인류의 구세주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크리스토가 구원자임을 재차 전하였지만
조선인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굴하지 않고 복음서를 배포했다.
청중들 가운데 크리스토교 서적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을 선물로 주었고
이 책을 받은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여 읽겠으며 잘 간직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책을 받는 것은 고관이 금지했으나 이미 많은 관리와 서기들이
이 책을 받은 뒤였다. 오히려 금지령으로 인해 책의 가치가 더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기도로 간구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였다.
나중에는 고관들 중에 책을 받는 사람이 있자 사람들이 책을 받으려고 밀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할 방법을 더욱 궁리하게 되었다.
고대도 주민들에게 한문으로 된 성경책을 나눠주었으며,
주민들이 이를 서로 받으려고 몰려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으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책을 나눠줬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 외에도 공식적으로 조선과 교역을 원한다고 하면서 국왕에게 진상하는 선물을 보냈다고 하는데, 국왕에게 보낸 선물에도 성경책이 들어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록에도 이들이 국왕에게 선물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들은 ‘금년 2월 20일 서남풍을 만나 이곳에 와서 국왕의 명으로 문서와 예물을 귀국의
천세 계하(千歲階下)에 올리고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으며, ……’ 이른바 바칠 예물은 …… 본국의 도리서(道理書) 26종이라 하였습니다.
‘본국의 도리서(道理書) 26종’ 이는 아마도 성경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여기에서 국왕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마냥 기다린 것만은 아니었다. 한문에 능했던 양이를 통하여 고관들이 배를 방문하여 함께 교류하면서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츨라프는 양이를 통해 주기도문의 번역을 시도하였다.
귀츨라프는 고관의 비서 양이를 설득하여 한글 자모 일체를 쓰게 하였으며,
양이에게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주면서 그에게 읽게 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번역을 한 양이는 고관들이 알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경고하자
귀츨라프는 양이가 번역한 주기도문을 그가 보는 앞에서 상자에 넣어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주기도문이 현지인에 의한 자국어로 번역된 것은 세계 선교 역사에서도 의미있는 일어었다. 뿐만 아니라 귀츨라프는 양이에게 한글을 배워
소논문 형태의 ‘한글에 대한 소견’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귀츨라프가 익힌 한글 - 고대도 교회 앞 마당에 벽화가 있다.
귀츨라프는 애머스트호를 탈때 그의 지위가 통역사와 의사였다.
그는 이 기간에 선교사역을 위하여 그가 배운 의술을 베풀며 고대도 사람들을 돌보았다.
진료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신학교에서 배운 기초적인 의료기술로 이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이들 일행은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은 고대도 주민들에게 감자를 보급하였다.
답변을 기다리는 7월 30일 저녁 식사 후 귀츨라프 일행은 가장 좋은 땅을 찾아서 그곳에서 백 개 이상의 감자를 심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둘러서서 이것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감자 재배법을 글로 써주었다.
뿐만 아니라 야생 포도가 있는 것을 보고 포도의 재배와
포도 과즙 만드는 방법도 글로 써주었다.
이렇게 귀츨라프는 우리나라 개신교 선교역사에서 처음으로 성경과 전도 서적을 전해준 선교사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처음으로 주기도문을 우리 말로 번역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한글을 세계에 전하기도 하였으며, 근대 의술을 베풀었고, 감자를 소개한 선교사이다. 아쉬운 것은 충청남도 보령시 고대도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전해주면서 전도를 하였다는데, 이 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점이다. 또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하는데, 그것도 지금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선교는 1866년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1884년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1885년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보다 53년이나 앞서 이루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