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결의 / 이성목
나는 여기서
더 오래 나를 기다려야 한다.
죽은 울타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 봄을 맞이하듯
두엄 냄새 그윽한 편지를 보냈지만,
개울을 따라 내려간 소식은 어느 차사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봄 날 하루
산죽은 바람에 칼을 벼리고,
한 생을 탕진하고 돌아온 나는
사지를 꺾어 꽃잎 한 장에 나를 건다.
햇살에 손목을 그어 내미는
복숭아나무 가지에 입을 대면
목젖에 닿는 이 뜨거움이 당신 아니던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턱을 괴고
혓바닥까지 스며드는 가시 같은
내 사랑은 거듭 거듭 덧나야 한다.
상처 물컹하게 짓무르도록
몸에 마음이 차고 넘치도록
- 이성목 시집 < 뜨거운 뿌리 > 2005
옛날 노래를 듣다 / 이성목
낡은 전축 위에 검은 판을 올려놓는다
전축은 판을 긁어 대며 지나간 시대를 열창하지만
여전히 노래는 슬프고, 잡음은 노래가 끝나도록 거칠다
소란스럽던 시절의 노래라서 그런 것일까
마음과 마음 사이에 먼지가 끼어서 그런 것일까
몇 소절은 그냥 건너뛰기도 한다 훌쩍 뛰어 넘어
두만강 푸른 물이 삼각지 로터리에 궂은 비로 내리고
눈보라치는 흥남부두로 소양강 처녀가 노 저어 가기도 하면서
경계와 경계를, 음절과 음절을, 이념과 이념을
덜컹 뛰어넘는 저 몇 개의 세선들
한때 우리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노래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낡은 전축이 요동을 친다
긁히고 패인 한 시대를 털커덕 털커덕 넘어서며
판을 뒤집자고
이젠 뒤집어 노래하자고
쓸만하다, 내 발 / 이성목
발은 더 이상 나를 미지로 데려가지 않는다.
어제는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 오늘은 그 자리를 다른
당신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나를 아주 먼 곳, 융단의 강을 건너 당신의 나라에
보내고 싶었는데, 그 일을 도맡아 해야할 발이, 생각이
먼저 딱딱해졌다. 냄새도 나고, 냄새나는 생애는 내가
신고 다닌 신발 같은 것이었으나 쉽게 벗어버릴 수는 없었다.
발가락 사이, 당신과 나 사이에 물집처럼 부풀어오른
추억의 쓰라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발만이 발을 버릴 수
있는 이상한 나라의 시민이었던 나는, 오래 쓰면 닳아
없어지는 것들의 목록에서 발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발의 소임이란 당신의 그곳 소멸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
얼마나 무모한가. 내가 여기 나를 남기려 했던 것, 밥을
벌러 안산과 서울사이를 오갔던 무수한 발자국들. 발목에
넥타이를 묶고, 발바닥에 봉급봉투를 신고 마음속에 살아서
꼼지락 꼼지락 거리는 무엇, 벌레 밟듯 지긋이 눌러 죽이는
것뿐이었으니 발은 나에게 새로운 생의 발자국을 찍게
하지는 않을 것이나, 아직은 쓸만하다. 닳고닳아 마침내
모든 휘청거리는 걸음걸이가 끝나는 곳에 당신의 나라가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