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dge;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것은 이제는 아쉽게도 사라지고 없는 어떤 ‘큰집’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끝
난 고등학교 3년 내내 집에서 살지 않았다.
아니 아마도 중3 부터일지도 모른다.
영어를 곧잘 한다는 이유로 중 3초에는 풍기극장앞 약방집 명걸이네 집에서 기숙을 했고, 이후에는 풍기의 유일한 병원집 성수(개명; 영준)네 집에서 함께 기거를 했다.
두 친구 다 공부하기를 싫어해서 애를 먹었다.
다만 영어 실력이 향상된 것만은 시험 성적으로 증명해주었다.
고등학교 1년을 마칠 즈음 우리는 서부동 집을 팔고 교촌의 과수원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으로 이사를 했다. 원래는 과수원 지키라고 먼 친척으로 하여금 거기 들어가 살라고 지어 놓은 것인데, 다섯 손주들 공부시키느라고 할아버지가 서부동 집을 팔은 것이었다. 작고 열악하기 그지 없는 것이 전깃불 조차 들어오지 않아서 호야라고 부르던 램프불을 켜고 살아야 했으니 그 집에 정이 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나와서 살았다.
집을 나와서 똑 바로 권씨네 과수원(향님이네)를 지나 철길을 넘으면 영두네 집이 나왔으니, 영두네는 그 아버지가 딴 살림을 차려서 서울에 가 있고, 그 할머니와 삼촌 그리고 조카 하나와 살고 있었으므로 거기서는 맘대로 나쁜 짓(?=탈선)을 할 수 이었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여자애들을 불러내서 어울려 놀기도 하고 동네 닭은 다 서리를 해서 잡아먹었다.
영두네 패는 황태기와 나, 그리고 청주에서 온 병갑이가 단골이었다. 영두는 목사가 된 뒤로는 세속과 인연을 끊었다.
그리고 또 자주 간 집은 역 앞 철도 관사에 있는 규인이네 집이었다. 2년 선배인 그의 누나가 너무 이쁘고 좋아서 무던히도 드나들었다.
거기서는 수박, 포도서리와 담배 훔치기가 기억이난다. 담배는 물탱크 근처에서 수납용으로 쌓아 놓은 것인데, 한 둥치를 훔친 적이 있으나, 그 양이 너무 많고 쓰기만 해서 버리고 말았다. 수박과 포도 이야기는 생략한다. 다만 그 주인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그 누나(규희)는 딸들(3명)중 인물은 제일 빠지나 착했고, 늘 집안 청소를 반질거리게 해 놓고 이미자와 페티 김의 노래를 가수 보다 더 잘 불렀다. 집안 청소를 하면서도 노래는 종일 흥얼거렸다.
그러다가 한번은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거기서 일등을 해서 신분이 탄로나 교무실에 불려가고 혼이 나기도 했다. 재능을 키워주진 못할 망정!!ㅠㅠ
그 누나는 내가 대학을 가서 청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정말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났다. 좀 키가 작은 어떤 남자하고.
‘순복아, 나 마국으로 시집 가.’ 그게 그 누나와의 마지막이었다. 워싱턴에 살다가 몇 해 전에 한국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거기서 임종을 지켰단다. 기관사였던 남편은 제천인가에서 딴 살림을 차리고, 그 바람에 골초요 바짝 말랐던 그 어머니도 생각이 난다.
이렇게 쓰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서 대영이네 얘기로 돌아간다.
대영이네는 풍기에서 마지막 남은 큰집이었다. 한자말로 쓰면 대가(大家)라 하겠다.
(중국어로 大家(따지아)라 하면 ‘여러분!’이란 뜻이다. 혼동 마시길!)
집도 컸지만, 내가 대가라 부르는 것은 사람을 많이 수용하는 곳이란 뜻이다.
본채와 사랑채(행랑채)로 나뉘어져서 본채는 가족만이 기거했고, 바깥 사랑채는 온갖 식객이 끊이지 않았다.
그 집의 큰 모습은 넓은 마당(지금은 줄어든 것 같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청마루에 있었으니, 그 마루의 시렁에 소반이 백여개가 있었다는 것이다!
집안 잔치나 대소사를 치를 때, 겸상이나 두리반을 내는 것이 아니라, 손님 한 분 마다 한 상씩 외상(床)을 차려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가의 모습이다.
나는 이런 외상 차림(또는 各床)을 청주에서 딱 한번 보았고, 그것이 전부다.
양반 흉내내기 좋아하는 안동이나 전주 등지에서도 지금은 사라진 모습일 것이다.
지 먹을 걸 지가 날라서 먹는 최고품 쌍넘 풍습인 뷔폐와 극이 되는 모습이다.
그 집에 서울대생이 데모를 하다가 피신을 왔단다. 어떤 경로로 거기까지 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서울 사대 지리과 학생이었고, 경복고 출신이다. 나중에 영주고 선생이 되었으므로 졸업학점은 땄는가 보다. 지금은 장생이에 살고 있다.
대학은 물론이거니와 경복고라 하면 풍기가 생겨나서 한 사람도 가질 못했던 학교다. 경기고나 경북고. 사대부고도 그러했다.
과연 그의 스팩은 대단했다. 특히 나의 약점인 수학에는 달인이었다. 요상한 수학 참고서를 갖다놓고 어눌한 말투로 잘도 풀어주었다.
나는 수학과목에 워낙 취약해서 중 2때 은석이네 집에가서 당시 교감 선생님이셨던 은석이 아버지로부터 수학 과외를 받았다. 일주일에 한 두 번 간 것으로 기억되는데, 과외비는 받지 않으셨다. 영두, 재관이가 함께 배운 것 같다.
그러다가 중 3학년이 되자마자 선생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자 그 공부도 중단되었다.
언제나 취약과목으로 남아있던 수학은 대학에 가서도 애를 먹였다. 1학년 때의 정성분석화학이나, 정량분석화학에서 남들은 같잖게 생각했지만, 내 머리에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고3때의 오병욱 선생은 내 수학의 구세주가 되었다. 기초가 없는 학생들에게 과거 각 대학에서 출제되었던 문제집을 풀어주었다!
이것은 신의 한 수였다. 언제 수학1부터 기초를 가르치겠나?! 그러니 이런 문제 보면 이렇게 풀어라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 선생은 한양대 공대를 나왔고, 한해 선배와 결혼하였으니 잠시 풍기에 정착한 것이 인생을 결정했다. 나중에 현대 중공업 사장을 했고, 나와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몇 안되는 선생이다.
다시 대영이네 이야기를 하자면, 그 큰 집과 참나무배기의 웅덩이가 딸린 큰 논과 대영이가 농사를 짓는 두 개의 큰 과수원 등등이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었다.
난 그 분을 뵌적이 없고, 무엇으로 그런 부를 축적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는 평생을 철도 공무원을 하셨고, 말수가 없고 착하기만 한 분이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더 늘리지도 팔지도 않고 고이 간직하여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면 진정 그 ‘큰집’을 큰집답게 만든 게 누구였을까?
바로 지금도 백수(白壽)를 살고 계신 대영이의 어머니다!
큰 강은 작은 물도 받아들이고 바다는 모든 걸 받아들인다고 바다가 되었다 하지 않던가?!
그 어머니는 모든 식객을 차별하지 않고 받아주셨다. 무던히도 많은 이들이 드나들었다.
사람 집에 사람이 드나들어야 큰집이다.
그게 큰집의 모습이다.
나를 비롯하여 차용구나 오갈 데 없는 친구들에게 그 집 사랑채는 안식처가 되었고,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의 피난처가 되어서 그들로부터 식객인 나도 서울 대학생들의 생활상이나 지식을 얻어들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더 많은 서울대생들이 와서 그의 동생 선영이가 李선생과 결혼하여 한의사 딸레미와 둘을 낳고 부산에서 잘 살고 있다. 가만히 풍기에 앉아서 어찌 서울대 출신 사위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 어머니가 대갓집 주인 역할을 한 덕일 것이다.
언제나 웃으며 나를 대해주던 그 어머니의 건강을 바라며 글을 맺는다.
癸卯 立春 後
豊 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