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철학하기 중간 과제>
“우리가 낯설게 바라보는 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
2023101177 윤채은
<제1장: 일상 속 낯섦>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나란 사람의 본질적 속성이나 특징이 시간이 흘러 바뀌는 경우가 있다. 혹은 여전히 그 본질이 같지만 내가 변화해서 낯설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사소하지만 내가 느꼈던 ‘익숙했던 것들에 대한 낯설음’에 대해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나의 치아이다. 대부분 우리에게 치아가 있다는 사실은 너무 익숙하게 다가온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치열이 고르지 못해 교정을 했는데, 지금은 치열이 거의 가지런한 상태이다. 그래서 가끔 옛날 나의 사진을 보면 너무 낯설게 느껴진다. 치열만 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기도 하다. 치아를 뽑고 새로 갈아 끼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치아의 본질은 10년전이나 지금이나 같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연속성에 의해 부식되고 조금씩 모양이 변했을 수는 있지만 그 본질은 같다. 하지만 치아가 자리를 살짝만 이동했을 뿐인데도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이를 통해 본질이 같더라도 위치나 규칙, 교열을 다르게 한다면 낯설게 느껴질 수 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길이다. 집에서 집 근처에 있는 마트까지 항상 가는 길이 있다. 그 길로 2년을 넘게 다녔기에 나는 그 길을 완벽히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에 그 길로 걸었던 날 못보던 간판들이 하나, 둘 속속히 보였다. 새로 생겨서 처음 본 줄 알았는데, 낮에 잘 보이지 않던 간판들이 밤이 되자 하나씩 켜지고서야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하나의 길을 걸으며 두 가지를 경험했다.
마지막으로,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 한다. 성인이 된 이후 초등학교 선생님을 뵈러간적이 있다. 오랜만에 선생님을 뵙게 되어 무척이나 설레였다. 도착해서 빈 교실에 들어갔는데 교실이 너무 작았다. 초등학생 때의 나는 교실이 작았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6년이나 다닌 교실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교실의 향기는 그대로였고 위치와 나무바닥도 모두 그대로였는데 익숙하지가 않았다. 이 공간에서 달라져 있는 것은 커버린 나뿐이었다. 그렇게 익숙했던 공간이 이렇게까지 낯설어질 수 있다는게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대로인데 교실 크기와 물건들만 작아져보였다. 이러한 일상 속 갑작스레 다가오는 낯설음은 세월의 흐름을 몸소 느끼게 한다. 비록 시간도 지나고 모양과 크기 형태 모두 달라졌지만 그 본질은 같다. 또한, 달라짐을 통해서 변화 전과 변화 후 사이의 시간의 연속성을 생각해보게 되며, 그 속에서 환경과 내가 변했을테고, 그 변화가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제2장: 익숙한 사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우리 엄마이다. 나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익숙한 사람이기도하다. 그런 엄마가 가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확실히 집에 있는 모습을 더 자주 보다가 가끔씩 엄마의 직장에 가서 엄마의 모습을 보면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엄마’라는 이미지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있고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느껴지면서 멋있고 낯설게 보인다. 또, 엄마가 ‘나의 엄마’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보여질 때, 낯설게 느껴진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처음 본 사람이 엄마이기에, ‘내가 태어난 이후의 엄마’의 모습이 가장 익숙하다. 언젠가 한번 내가 태어나기전 엄마의 사진을 본적이있다.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의 청춘의 모습의 엄마였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엄마가 아닌 것 같고 굉장히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시간이 흘러 달라진 모습에 낯설기도 했지만, 내 존재를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낯설게 느껴진 것이 더 컸고 마음 한 켠이 찡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진 속의 모습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모습의 엄마이지만 너무 예뻤고 청춘의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해주시느라 포기한 것이 많았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알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라서 낯설었지만, 가장 소중하고 익숙한 사람을 가끔은 낯설게 바라봄으로써 더 소중히 여겨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 3장: 죽음>
이번 수업의 주제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였다. 하지만 때론 한 없이 익숙하고, 때론 한 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한다. 나는 오래오래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하곤 했다. 최대한 살 수 있으면 백 살이 넘게도 살고 싶다.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당연히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다. 언제 한번 친구에게 물어본적이 있다. 몇 살까지 살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친구는 50살이라고 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며,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터인데 말이다. 그런데 친구는 굳이 오래 살고 싶지 않고 오래 살면 고통스러운 일들을 다 자기가 겪어야 할 것만 같다고 했다. 이유를 들으니 나름대로 이해가 되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내가 오래 살고 싶은 이유는 죽고 싶지 않아서이다. 삶을 살아가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점도 물론 크지만,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생명은 언젠간 죽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죽음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작년 2022년에는 하루에 약 1000명씩 죽음을 겪었고, 1년동안 약 37만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어느 곳에서는 끝없는 전쟁으로 매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겪기도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영화에서도 나이가 많이 들어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하고, 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심지어 좀비떼가 몰려와 사람이 죽기도 한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오늘 식탁에 올라온 소고기도 죽은 소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 많은 죽음들을 경험하고 있고, 앞으로도 경험할 것이다.
내가 아는 ‘익숙하다’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자주 보거나 겪어서 처음 대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상태에 있다’라는 뜻인데 죽음은 아무리 겪고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지지가 않고 항상 낯설기만하다. 가까이에 있는 죽음이든 먼 곳에 있는 죽음이든 똑같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또한 내가 더 성장했을 때, 이 낯섦이 익숙해지는지도 의문이다.
<마무리>
이 과제를 하는 하루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사실에 ‘왜?’라고 의문을 던져보기도 했고, 집에 가는 길에 다른 방향으로 틀어서 가보기도 했다. 집에 와서는 가족들을 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우리 부모님이 만약 남이었다면 어땠을지에 대한 생각도 해보았다. 또 방 좀 치우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어차피 더러워질 방인데 왜 치워야하나 라는 생각도 했다. 이 과제를 쓰는 과정도 물론 유의미했지만, 과제 시작 전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일상생활을 계속해서 다르게 생각해보는 연습이, 나에겐 더 뜻깊었다. 평상시에 일깨우치지 못했던 다른 시각을 트여준 것 같았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며 낯설고 때론 익숙한 것들을 마주친다. 앞으로 세월은 흐를것이고 우리에게 낯선 것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 세상만사가 지겹고 모든 것이 익숙해져버릴 때 ‘낯선 철학하기’ 수업 시간 중 ‘낯설게 바라보기’를 경험했던 이 날을 떠올렸으면 한다. 두 개의 언어를 배우면 두 개의 세계를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도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얻는 방법이다.
첫댓글 어린 시절과 지금 교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교실은 아주 컸고, 성장한 이후에 마주하게 된 교실은 지금의 기준에서 작아 보입니다. 결국 내 기억이 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함이 없는데도, 변했다고 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느끼고 인식하는 모든 것이 이렇게 가짜이기만 한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처음부터 크거나 작은 교실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크다, 작다라고 느끼는 것은 나의 인식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것의 입장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누군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틀렸다가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