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다르기에 말이 다른 것인데도, 일상생활에서는 둘을 ‘사실상 같은 뜻’으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공평’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으로, ‘공정’을 ‘공평하고 올바름’으로 정의한 국어사전 탓도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권투에는 ‘체급’이 없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생래적인 체격 차이가 경기력에 그대로 반영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사람이 귀족과 노예로 나뉘는 것도 신이 정한 ‘불평등’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죠. 전에 한자 ‘공(公)’은 지상에 구현된 하늘의 도리라는 의미라고 쓴 적이 있는데, 공평도 인간 사이의 평등과는 별 관계가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조선왕조 개창 직후 한양으로 천도할 때, 왕은 한양으로 이주하는 개경 주민들을 신분과 지위에 따라 구분하여 집 지을 땅을 ‘차등 있게’ 나눠 줬습니다. 이 ‘차등’을 전제로 해서 같은 등급 내에서 균등하게 또는 평등하게 나눠 주는 게 ‘공평’이었죠. ‘공평’이 인간 사이의 ‘평등’과 비슷한 개념으로 옮겨 온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권투에서 체급이 생긴 것도 19세기 말입니다.
공평이 평등에 가까운 개념으로 이동하면서, 그 기준을 정하는 건 대단히 어려워졌습니다. 현대의 사회적 갈등은 대부분 ‘공평’을 둘러싸고 벌어집니다. 뷔페식당에서 체격이 큰 사람에게나 작은 사람에게나 똑같은 액수의 돈을 받는 게 공평한가? 부자와 빈자에게 똑같은 액수의 세금을 걷는 것, 소득에 비례해서 세금을 걷는 것, 소득이 높을수록 세율도 올리는 것 중 어느 것이 공평한가?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임금 차별이 있는 것은 공평한가? 경찰 채용 시험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공평한가? 남성만 군대에 가는 것은 공평한가?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 여성 전용 주차 구역 설정 등은 공평한 행정인가? 농어촌 거주자 특별전형, 사회적 배려 대상자 특별전형 등은 공평한 제도인가? 등등. 민주주의 시대의 ‘공’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다수의 뜻이기 때문에, 사안별로 무엇이 공평인가에 대한 답은 ‘공론의 장’에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법과 제도는 이 ‘공론’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제 ‘생래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생래적 약점’을 가진 사람에게 일정한 혜택을 주거나 ‘생래적 장점’을 가진 사람에게 일정한 핸디캡을 부여하는 게 ‘공평’이라는 인식은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혜택이나 핸디캡의 ‘정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완전한 합의가 불가능할 겁니다. '불공평'에 대한 분노와 불만도 완전히 사라질 수 없을 겁니다.
‘공평’이 체급을 나누고 체급 내, 또는 체급 사이의 규칙을 정하는 것과 관련된 개념이라면, ‘공정’은 그 규칙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헤비급 선수와 플라이급 선수를 똑같은 조건에서 맞붙게 해야 하는가, 헤비급 선수 한 팔을 묶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예 같은 링에 서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가를 정하는 게 ‘공평’의 문제라면, 일단 링에 오른 선수들이 규칙을 지키도록 하는 건 ‘공정’의 문제입니다. 이 대결이 ‘공평’한지 아닌지는 세계권투위원회가 정하고, ‘공정’하게 진행되는지 아닌지는 심판이 판단합니다. 법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는 일도 '공정성'과 관련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쪽이 규칙을 위반해도 눈 감아 주는 ‘편파’가 불공정입니다.
조국 교수 딸 입시 문제로 분노하는 젊은이들, 본인의 분노가 ‘불공평’ 때문인지 ‘불공정’ 때문인지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헤비급 선수가 플라이급 선수를 맞상대하는 건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그가 만든 게 아닙니다. 그가 경기규칙을 지켰다면, 분노는 ‘불공평한 제도’를 만든 조직이나 기구를 향해야 합니다.
학부모 활용 인턴쉽 제도를 만들어 학부모 사이에 쌍방향이든 단방향이든 ‘선심 베풀기’를 권장하고, 세계선도인재전형을 만들어 외국 생활했던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입시 기회를 제공한 건 이명박 정부와 지금의 자한당 정치세력입니다.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고, 법인세 인상에 반대하며, 복지 확대에 반대하여 현재의 사회적 불평등을 더 확대하려는 세력도 저들입니다.
저들이 만들어 운영했던 그 때의 제도가 원천적으로 ‘불공평’했습니다. 그 ‘불공평’의 책임은 당시 일반 시민은 물론 권력에서 배제된 ‘상류층’에게도 물을 수 없는 겁니다. 만약 청문회 등을 통해 조국 교수가 이 ‘불공평한’ 입시 제도에서조차 ‘불공정’한 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는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불공정’이 아니라 ‘불공평’이 문제라면, 지금 분노하는 젊은이들의 비난이 향해야 할 대상은, 그런 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던 정치세력입니다.
한 가지 더. 지금 그대들이 서 있는 그 자리는 ‘공평한 경쟁’의 결과인가요, ‘공정한 경쟁’의 결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