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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55분이다. 은행 영업점 출입문으로 들어섰다. 은행직원과 청소원 아주머니가 있다.그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큰소리로 인사했다. 백팩을 경비석에 놓고 TV와 PC를 켰다. 신문을 객장 서가에 꽂고 대여금고 실과 ATM실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주방에 가서 커피 필터를 꺼내어 커피메이드의 깔때기에 끼워 넣은 다음 원두를 쏟아 넣고 물을 부었다. 마지막으로 전원을 켰다. 잠시 후에 은행직원이 금고를 열고 가스분사기를 건네줬다. 경비원 업무일지를 작성하고 물 한잔을 마셨다. 9시 30분에 은행 셔터와 자동문을 열면 은행 영업이 시작된다. 경비석에 앉았다. 나는 은행 영업점 경비원이다. 창구에서는 은행원들이 영업을 준비하고 있다. 7년 전에는 나도 은행원이었다. 은행 경비원과 관련한 과거사가 생각났다. 9년 전 어느 날 시중은행 안전관리부 과장이었던 때였다.
"김 과장! 자네가 경비원이야?"
부서 상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키가 작고 깡마른 상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어 대답했다.
"아닙니다. 은행의 급여를 받고 은행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보편적인 정의와 인권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상사는 코웃음치며 내 의견을 묵살했다.
"자네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라 은행원이야. 영업점에서 난리야. 경비원 담당과장이 이상하다고 말이야. 왜 김 과장이 경비원의 고용이나 인권에 신경을 써? 이해할 수 없네. 자네 영업점으로 가서 고생해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만."
나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부터 9년 전까지 5년 동안 원청업체(사용자)인 시중은행 안전관리부 경비원 도급 담당과장이었다. 영업점 경비원의 배치 및 교체, 민원 처리를 비롯해 은행 본점의 비용관리팀으로부터 예산을 배정받아 용역비를 하청업체(경비회사)에 지급하는 일도 했다.
내가 근무할 당시 당시 시중은행 경영진은 사모펀드 지배 아래 있었다. 경영진은 은행직원들에게 법규준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영업점장을 비롯한 은행직원들은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경비원이 잡무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교체를 요구하는 일이 잦았다. 경비 노동자들은 출입자 통제, 객장 내 질서유지, 화재 및 범죄예방, 안내 업무가 본연의 업무이다. 그러나 일부 은행원은 경비 업무를 벗어난 업무를 경비원에게 요구했다. 청소, 화분 물 주기, 자동차 운전, 현금 자동 입출금기 현금 보충, 우체국 심부름, 은행원의 사적 심부름 등이 그것이다. 일부 고객은 경비원에게 폭언을 하고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경비원은 저임금과 고객응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나는 처음에는 경비원의 처우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맡은 일을 하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중에는 경비원의 고충에 마음이 불편했다. 어느 날 영업점 지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과장님! 나 지점장인데요. 경비원 교체를 요청하려고 전화했어요“
"안녕하십니까? 지점장님! 지점 경비원이 경비업무에 소홀한가요? 경비회사 현장대리인과 경비지도사를 통해 개선을 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아니오. 다른 지점 경비원은 신용카드 유치도 잘해오는데 우리 지점 경비원은 너무 영업력이 없어서요“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카드 유치는 경비원의 업무가 아닌데요“
"안전관리부장 바꿔요! 말이 안 통하네"
위와 같은 일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일부 은행원은 ATM 현금 보충, 동전 교환, 자동차 세차 및 정비, 운전, 은행원 및 VIP 고객의 사적 심부름, 화분 관리, 청소, 커피 심부름, 은행원 사무보조, 금융상품 안내 등 잡무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렇다고 급여가 높거나 수고비를 지급하는 것도 아니었다. 은행원과 고객 그리고 동료 노동자인 청소원 마저도 경비원을 하인을 부리 듯 하는 경우가 잦았다.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안전관리부 업무 중 하나인 안전보안점검을 위하여 지점을 방문했다. 안전보안점검은 영업점에서 화재나 범죄 예방을 잘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조언을 하는 일이다. 그런데 경비원이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은행 영업점 차장에게 경비원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예, 제가 심부름 보냈습니다. 직원들은 모두 바빠서요.“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그러다가 범죄나 화재라도 발생하면 어쩌시려구요. 새마을금고 현금피탈사건도 있었잖아요“
차장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설마 그러겠어요? 여기는 도심인데"
당시 일부 은행원은 안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소탐대실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경우 사고발생시 경비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경비원은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심부름을 거절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현실은 잡무 거절을 하면 사실상 따돌림을 당하고 일자리를 잃는다. 경비원 인권 보호나 권리증진은 내 업무가 아니다. 그러나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경비원이 과연 업무에 충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은행 영업점 경비원은 범죄예방, 화재 예방, 출입자 통제, 고객 안내를 한다.
또다른 일도 있었다. 당시 은행 경영진은 영업점의 고객만족 서비스 수준의 향상과 유지를 위하여 외부 업체에 점검을 요청했다. 전반적으로 CS 수준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자 영업점 직원들은 소비자만족부에 경비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의견을 냈다. 고객이 지점을 방문했을 때 최초 응대하는 사람이 경비원이라는 이유였다. 소비자만족부는 안전관리부에 회의 날짜와 장소 그리고 주제를 통보했다. 농부에게 끌려가는 황소의 심정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는 경비회사 관계자도 참여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소비자만족부의 아무개 차장은 은행 영업점 경비원의 서비스 수준이 낮다며 경비회사와 안전관리부 직원들을 몰아세웠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개 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행 CS 부서의 주장이 부당한 처사라고 반박했다.
”영업점 고객만족 서비스의 핵심 담당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은행직원입니다. 경비원은 종된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경비원은 화재예방과 범죄예방을 담당하므로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는 안됩니다. 경비원은 은행에서 직접 고용한 은행직원이 아닙니다. 도급 계약에도 위반되는 일입니다“
나의 주장에 대하여 아무개 차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회의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개 차장은 현황 안내와 경비회사 앞 당부하는 말로 급하게 마무리를 하였다. 나는 안전관리부 사무실로 돌아왔다. 잠시 후에 전화벨이 울렸다.
"김 과장님! 소비자만족부의 아무개 차장입니다. 오늘 저희 부서와 안전관리부, 경비회사 관계자 회의에서 과장님이 경비업체 편을 들어서 정말 난감했습니다. 경비업체 협조 하에 영업점장이 경비원을 강하게 통제하여 CS 수준을 높이는 것이 잘못입니까?"
나는 화를 가라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내 입장을 밝혔다. 경비원은 도급사 은행 소속이 아니므로 수급사 직원인 경비원에게 직접 지시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고객만족서비스 수준을 높이려면 경비회사를 통해 교육을 강화하도록 요구해야 하는 대전제에 찬성한다. 그러나 CS수준은 본래 은행원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CS평가에 경비원을 포함시키는 것은 위장도급, 불법파견의 법률리스크에 노출된다, 마지막으로 원청사도 경비원의 처우 개선에 협조해야 한다. 그 전제 없이 저임금, 은행원의 잡무 요구, 고객 응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경비원에게 사람 대접도 해주지 않으면서 CS수준을 높이라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깊은 양해를 부탁한다고 덧붙였다.
소비자만족부장은 안전관리부장에게 항의를 했다. 나는 이 사건으로 안전관리부 상사의 질책을 받았다. 예견한 일이었다. 불이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뜻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9년 전 영업점으로 이동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영업점 근무를 견뎌내지 못했다. 건강이 좋지 않고 업무 능력이 부족해서 휴직과 복직을 거듭한 뒤 7년 전 ‘준정년 특별퇴직’을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자리를 옮겨 다녔다. 은행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아파서 결정한 퇴직은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보험설계사, 시중은행 IT센터 경비원, 고객센터 상담원, 텔레마케터, 도보 배달원으로 일했다.
1년 전에는 3개월 동안 '은행 영업점 경비원 대직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경비업계에서 '대직자'란 은행 영업점 경비원의 휴무할 때 그의 업무를 대신하는 일용직 근로자를 일컫는다. 대직자의 업무와 은행경비원의 업무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며칠 동안만 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은행원들이 출입자 통제, 범죄 예방, 화재 예방, 객장 안내만 요구하지는 않는다. 나는 동전 교환, 일반쓰레기 버리기, 주차권 배포, 스마트폰 앱 설치 등을 수행했다. 마지막으로 대직자로 일하던 은행 영업점에서 은행 직원들이 현재의 경비회사 입사를 권유했고 면접과 서류전형을 거쳐 현재 은행 영업점 계약직 일반경비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최근에 안전관리부 시절 친분을 쌓은 복수의 경비회사 관계자들과 전화 통화를 했다. 경비원으로 일하다보니 다른 은행 경비원들의 상황이 궁금했다. 그들은 현재는 현금 자동 입출금기에 현금 보충이나 자동차 운전을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그러나 나머지 상황은 전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은행 경비원 커뮤니티의 게시물을 읽거나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9년 전의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난 여름 2020년부터 은행경비원 처우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 온 전직 경비원은 "은행 영업점 객장에서 일하는 경비원은 다른 직장인과 달리 여름휴가를 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은행 경비원들은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원청사인 은행이나 소속 경비회사에 강한 요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년 여름 철이 되면 은행과 경비 도급 계약을 맺은 경비회사들은 대대적으로 '대직자'를 모집한다. 경비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대직 근무가 손쉽지 않고 다른 일용직에 비하여 일급이 높지 않아 구인이 쉽지 않다고 한다. 경비업무의 특성상 경비구역을 비워 둘 수 없기 때문에, 대직자가 구인되지 않으면 경비원을 쉬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은행 마다 사정이 조금씩 다르다. 내 경우 한 달 전에 연차휴가를 신청하면 휴가를 갈 수 있다. 그러나 휴가를 가지 못하는 경비원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A 은행에 근무하는 경비원 K 씨는 "유급 특별휴가가 없어 휴가를 사용하기가 망설여집니다"고 말했다. 그는 "제 월급은 최저 임금 수준 200만 원인데, 우리 은행 차장님은 은행 안전관리부에서 경비업체에 주는 월 용역비 350만 원이 제 봉급인 줄 알고 계시더라고요"라며 한숨을 쉬었다.
B 은행에서 일하는 경비원 L 씨는 또 다른 이야기를 했다. "연차수당을 급여에 녹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봐요. 관련해선 회사 규정집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C 경비업체 관계자는 "연차수당 지급은 회사마다 다릅니다. 선지급, 1년 후 지급, 퇴직 시 지급 등 다양해요. 법적 문제는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여기에 관하여 광역지방자치단체 노동법률상담소 관계자는 "연차수당을 선지급할 경우 반드시 근로계약서와 취업규칙에 기재하여야 하며 근로자에게 통보 없이 행하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조했다.
C 은행의 경비원 J 씨는 "은행 경비원 관련 기사가 몇 번 신문에 나왔어요. 그런데 변화가 없고, 사람들도 관심이 없습니다. 파견법 폐지와 직접 고용이 답인데 저희 빼고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J 씨가 보여준 수첩에는 ‘절규하는 은행경비원, 외면하는 은행권 노조, 은행경비원, 경비 외 업무 여전, 제2의 새마을금고 사태 우려, 나는 30대 비정규직 은행경비원, 3년 2개월 뒤 해고됐습니다, 월 188만 원 은행경비원의 편지, 중간 착취 없이 일하고 싶어요, 은행 점포 폐쇄 가속화, 일자리 잃는 경비원들’ 등의 신문 기사 제목과 날짜, 신문사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2020년부터 은행 경비원 커뮤니티를 이끌어 온 이 아무개 위원장은 은행 경비원 처우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 경비노동자를 비롯한 간접고용 노동자 문제를 취재한 <H일보> 기자들이 국회와 고용노동부에 네 가지 제안을 했다. 그 내용은 ‘원청이 노동자에게 임금을 직접 주자, 파견수수료를 정해진 비율 만큼만 떼자, 원청도 사용자다, 간접고용 노동자 보호법을 제정하자’이다. 그런데 현재 노동 관계 전문가들이 최선이라는 위의 제안도 국회와 고용노동부로부터 '검토해 보겠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답은 명확하게 있다. 파견법을 폐지하고 간접고용 노동자를 직접고용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안타깝지만 당장은 어렵다고 말한다. 갈 길이 멀다. 그러나 간접고용노동자와 시민사회는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노동조건이 나아질 수 있다.
오전 9시 30분이 되었다. 은행 셔터를 올리고 자동문을 열었다. 고객이 입장했다. 나는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큰소리로 인사했다. 어떤 손님은 인사를 받고 어떤 사람은 인사를 받지 않는다. 고객이 용무를 끝내고 은행을 나서면 ”살펴 가세요“ 혹은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한다. 손님이 떠나면 은행 창구의 탁자 위의 휴지를 버리고 필기구를 꽂고 의자를 제자리에 놓는다. 종종 고객의 요청에 따라 주차요금 할인등록을 하거나 우편물을 받아 수신자에게 배포하고 짐을 나르기도 한다.
나는 은행 영업점 경비원 중에서 운이 좋은 사람이다. 원청사 겸 도급사인 은행직원들이 친절하고 성품이 좋은 사람들이다. 늘 좋은 사람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한다. 그들은 경비업법을 준수하여 경비업무 외 잡무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도급사 겸 수급사인 우리 경비회사는 20만 원 상당의 일반건강검진, 상여금, 휴가, 전자책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모든 은행 영업점 경비원이 운이 좋지는 않다. 물론 나도 계속 운이 좋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근로계약이 종료되고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민원 고객이 해고를 요구하거나 지금 일하고 있는 은행 영업점이 폐점되면 일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나는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언행에 좌우되는 자존심이나 자부심이 아닌 확고한 자아존중감을 세우려 애쓰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지나온 삶을 통하여 교훈을 얻는다. 자신을 돌이켜보고 배우고 깨닫는다. 이를테면, 신중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과감하지 못해서 손해와 상처를 입는 경우가 잦았다. 또한 지나치게 마음이 약해서 다른 사람에게 쓴소리를 못했고 다툼을 두려워하여 피하였다. 몸을 강하게 키우지 못하여 운동과 싸움을 못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과거사로 마음의 상처가 깊더라도 치유를 하려고 애쓰고 있다. 올해 봄 나는 치유의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했다. 그중 하나는 신문 기사 쓰기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적 글쓰기이다. 국문학과 전공자로서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이다. 즐겁고 기쁘고 흐뭇한 일을 하고 싶었다. 더불어 적은 금액이라도 소득이 생기기를 바랐다.
우선 어느 인터넷 신문사에 시민기자 회원으로 등록했다. 그 신문사는 보도기사, 의견 기사 외에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하는 생활 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었다. 에세이 형식의 기사이다. 그리고 무작정 기사를 쓰고 송고하였다. 뉴스 기사로 채택이 되었다. 정말 기뻤다. 백일장에서 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송고한 기사 갯수에 비하여 채택되어 정식 기사로 노출되는 것은 많지 않았다. 신문사 편집부로 문의하니 역시 글쓰기와 기사 쓰기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해당 신문사는 원칙적으로 ‘시민기자 회원’의 문의는 전자우편이나 메시지만을 이용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편집기자가 직접 전화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편집기자가 내게 전화를 했다.
”김인식 기자님! 비문이 잦으면 안돼요. 글을 퇴고한 후 반드시 소리내어 읽어 보세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문장이 없는지 오타나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은 없는지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오해를 살만한 부분은 없는지 반드시 확인하셔야 해요.“
그의 조언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정보만으로는 부족했다. 기사 쓰기 실무를 알아야 했다. 배움에 못 말라 있었다. 기사를 더 잘쓰고 싶어서 기자양성 교육 과정을 찾았다. 예상 보다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인터넷을 뒤져서 적당한 학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공부한 과정은 전·현직 기자의 개인 교습과 지역 인터넷 신문의 특강 그리고 중앙지의 언론 아카데미 마지막으로 인터넷 신문기자 양성 교육 학원 등이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수료했다. 강의가 끝난 후 기자 양성 교육 학원 측은 세 가지 진로를 제안했다. 제휴 언론사 소속 기자로 입사하거나 각 전문 분야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신문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길이 있었다. 나는 나이가 55살이고 전문 분야가 없는 측면을 감안하여 인터넷 신문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실천했다.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가을부터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31년 전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글쓰기를 한 적이 없었다. 현재는 모르는 것이 많고 글쓰기 능력도 보잘것없다. 그래서 글쓰기 플랫폼과 출판사,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하여 알게 된 여러 작가를 통하여 글쓰기를 배우고 있다. 앞으로 책을 출간하고 지속해서 집필하는 작가로 살고 싶다. 책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일은 예상보다 피로했다.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 산책과 운동을 병행해야겠다.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자아존중감이 낮은 사람의 글에 안타까워 할 수는 있지만 희망을 잃은 글쓴이의 글에 공감하기는 어렵다.
지난 세월에 육군 장교, 은행원, 보험설계사, 텔레마케터, 고객센터 상담원, 도보 배달원을 거쳐 현재는 경비원과 인터넷 신문사 대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여러 직업을 거치며 삶의 다양한 면모를 경험할 수 있었다. 겪어 본 지식과 기능은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유용할 것이다. 물론 사연이 많다고 꼭 좋은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많이 애써야 한다. 삶은 쉽지 않다. 그래도 행복하여지려고 애써야 한다. 나는 성공 보다 실패가 많았던 인생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갔다.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인생 후배와 친구, 선배들에게 내 이야기가 가닿을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책과 언론 매체, 사람을 통하여 배우고 깨닫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만의 이야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작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