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堤金氏(김제 김씨)
본관(本貫): 김제(金堤) 시조(始祖): 김천서(金天瑞) 유래(由來):
김제 김씨(金堤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2세손으로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진 김천서(金天瑞)가 김제(金堤)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의 7세손 김정걸(金正傑)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功)을 세워 개국삼등공신(開國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김제군(金堤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김정걸(金正傑)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김제(金堤)로 하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김희준(金熙俊) 가문을 빛 낸 인물(人物)로는 가헌공(可軒公) 정걸(正傑)의 아들 희준(熙俊)이 서기 1405년(조선 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천 군수(醴泉郡守)와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올랐다.
김순의(金順義) 희준(熙俊)의 손자(孫子)의 순의(順義)가 구례 현감(求禮縣監)을 지내고, 순례(順禮)는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세효(金世孝)와 김세광(金世光) 세종(世宗) 때 여산 부사(礪山府使)를 지낸 세효(世孝)와 성종(成宗) 때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낸 세광(世光)이 유명했으며,
김극혜 극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대가(임금이 타는 수레)를 배종(陪從)하여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현령(縣令)을 역임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 욱(頊),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철견(鐵堅), 부호군(副護軍) 천겸(千兼)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김희영(金熺永) 희영(熺永)은 고금도 수군절제사(古今島水軍節制使)를 지낸 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러 길주 목사(吉州牧使) 신걸(神傑)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한민족대성보>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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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行列) 세 항렬자 세 항렬자 세 항렬자 21계(啓),정(正) 23인(仁),종(鐘) 25진(珍),영(榮) 22 규(圭) 24린(麟),하(河) 26명(銘),환(煥)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제 김씨(金堤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090가구, 5,2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金堤金氏(김제김씨) 2
▣ 由來 始祖(시조) : 金天瑞(김천서) 始祖(시조)金天瑞(김천서)는 敬順王(경순왕)의 넷째 아들 金殷說(김은열)의 12世孫(12세손)으로 高麗(고려)때 門下侍中[문하시중 : 門下省(문하성)의 從1品(종1품) 으뜸 벼슬]을 지내고 月城府院君(월성부원군)에 封(봉)해졌다. 金天瑞(김천서)가 金堤(김제)에 定着(정착)李成桂(이성계)를 도와 朝鮮開國(조선개국 )에 功(공)을 세워 開國三等功臣(개국삼등공신)에 冊祿(책녹)되었으며,太宗(태종)이 卽位(즉위)하자 金堤君(김제군)에 封(봉)해졌다. 그래서 後孫(후손)들이 金挺傑(김정걸)을 1世祖(1세조)로 하고 本貫(본관)을 金堤(김제)로 하였다. ▣ 人物 可軒公(가헌공) 金挺傑(김정걸)의 아들 金熙俊(김희준)이 1405年(朝鮮太宗 5年)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고 醴泉郡守(예천군수)와 經筵參贊官(경연참찬관)을 거쳐 藝文館直提學[예문관직제학:임금의 勅令(칙령)과 敎命(교명)을 記錄(기록)하던 官廳(관청)의 正3品(정3품)벼슬]에 올랐으며,그의 孫子(손자)金順義(김순의)가 求禮縣監(구례현감)을 지내고, 金順禮(김순례)는 通德郞(통덕랑)에 이르렀다.그밖의 人物(인물)로는 世宗(세종)때 礪山府使(여산부사)를 지낸 金世孝(김세효)와 成宗(성종)때 靈光郡守(영광군수)를 지낸 金世光(김세광)이 유명했으며, 金克惠(김극혜)는 丙子胡亂(병자호란)때 王(왕)을 뒤따라 原從一等功臣(원종일등공신)에 冊祿(책록)되고 縣令(현령)을 歷任(역임)하여, 軍資監正(군자감정) 頊(김욱), 敦寧府都正(돈령부 도정) 金鐵堅(김철견), 副護軍(부호군) 金千兼(김천겸)과 함께 名聲(명성)을 날렸다.哲宗(철종)때에는 通政大夫(통정대부)와 中樞院議官(중추원 의관)을 거쳐 秘書丞(비서승)에 오른 金然泰(김연태)가 이름났고, 金熺永(김희영)은 古今島水軍節制使(고금도수군절제사)를 지낸 後(후) 嘉善大夫(가선대부)에 이르러 吉州牧使(길주목사) 金神傑(김신걸)과 함께 家門(가문)을 빛냈다. ▣ 科擧及第者(朝鮮時代) 金士龍(김사룡) (1608 戊申生) : 武科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金應立(김응립) (1593 癸巳生) : 武科 仁祖15年(1637) 別試 丙科 金義龍(김의룡) (1641 辛巳生) : 武科 肅宗15年(1689) 增廣試 乙科 金鼎鉉(김정현) (1517 丁丑生) : 司馬試 明宗13年(1558) 式年試 三等 金麗道(김여도) (1869 己巳生) : 司馬試 高宗22年(1885) 式年試 三等 金然承(김연승) (1846 丙午生) : 司馬試 高宗11年(1874) 增廣試 三等 金秀林(김수림) (1846 丙午生) : 司馬試 中宗2年(1507) 式年試 三等 金然雨(김연우) (1852 壬子生) : 司馬試 高宗28年(1891) 增廣試 三等 金然始(김연시) (1863 癸亥生) : 司馬試 高宗17年(1880) 增廣試 三等 金綸栢(김윤백) (1836 丙申生) : 司馬試 高宗11年(1874) 增廣試 三等 等 모두 11名의 科擧及第者가 있다. (武科 3名, 司馬試 8名) ▣ 本貫 沿革 本貫所在地 : 全羅北道 金堤 金堤(김제)는 全羅北道(전라북도) 西(서)쪽에 位置(위치)하고 있으며 三韓時代(삼한시대)에 碧卑離國(벽비리국)이 있던 곳이다. 百濟 仁德王(백제 인덕왕)때 碧骨郡(벽골군:벼의 고을)으로 불리우다가 百濟 滅亡後(백제 멸망후) 唐(당)이 碧城(벽성)으로 고쳐 古四州(고사주: 高阜)의 領縣(영현)을 삼았다.新羅(신라) 757年(景德王16)에 平古縣(평고현)을 고쳐 金堤群(김제군)으로 改稱(개칭)되었다.1143年(高麗仁宗21)에 全州牧(전주목)의 金堤縣(김제현)이 되었다가, 1171년(明宗1)에 金溝縣(금구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466年(世祖12)에 金 堤郡(김제군)으로 昇格(승격)되었다.1628年(仁祖6)에 萬頃縣(만경현)이 金堤 郡(김제군)에 倂合(병합)되었고 1759年(英祖35) 萬頃郡(만경군)과 金溝郡(금 구군)이 金堤郡(김제군)에 倂合(병합)되었다.1895년(高宗32)地方制度(지방제도)改正(개정)으로 萬頃郡(만경군)과 金溝郡(금구군)으로 分離(분리)되었다가 1914年 郡面廢合(군면폐합)으로 다시 萬頃郡(만경군)과 金溝郡(금구군)을 倂合(병합)하여 17個面(17개면)이 되었으며, 1931年 金堤面(김제면)이 金堤邑(김제읍)으로 昇格(승격)되었다. 1989年 金堤郡(김제군)의 金堤邑(김제읍)과 一部面(일부면)이 市(시)로 昇格(승격) 되었다가 1995年 金堤郡(김제군)이 金堤市(김제시)에 統合(통합)되었다. ▣ 人口數 統計廳(통계청)의 人口調査(인구조사)에 依(의)하면 金堤金氏(김제김씨)는 1985年에는 摠 1,090家口 5,296名, 2000年에는 摠 1,594家口 5,220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 편집한 것임.
[출처] 金堤金氏(김제 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