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딜레마를 전달하는 매체로써의 게임
우리는 살며 많은 딜레마와 직면한다. 그러나 철학에서 제시하는 딜레마는 때로는 비현실적이며, 비직관적이다. 가장 유명한 딜레마인 트롤리 딜레마조차 일반적으로 마주하기 힘든 상황이다. 딜레마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민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딜레마 상황에 몰입감을 고조할 필요가 있다. 딜레마는 주로 활자 매체나 영상 매체 등 기존 단일 방향 매체를 통해 전달된다. 물론 매체를 제작하며 몰입감 형성에 큰 노력을 기울였겠지만,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 유발할 수 있는 몰입감에는 한계가 있다. 수용자의 의지가 반영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영화를 예시로 들어보자. 관람객이 어떠한 딜레마를 제시한 장면에서 “나라면 저러지 않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관람객은 아쉬워하며 영화가 끝난 후 영화사나 감독에게 의견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과연, 관람객은 전달에 성공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설사 복잡하고도 불확실하게 전달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차기작 혹은 영화계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영화에 관한 여론과 이 관람객의 생각이 우연히 일치한다면 여론이 흥행에 영향을 주고 의견이 반영되는 정도가 현실적이다. 하지만 상호작용이 더 강력하고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몰입감은 상승할 것이고, 딜레마가 전달하려는 주제도 수용하기 쉬울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비디오 게임(이하 게임)은 몰입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매체이다.
이러한 점에서 PC, 콘솔, VR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출시된 <폴아웃 4>는 윤리적 딜레마를 고찰하기 좋은 게임이다. 시스템적으로 플레이어가 선택하는 행위가 결말에 영향을 주는데, 이는 게임 전체뿐만 아니라 작은 이야기에도 적용되어 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상에 들어간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본작은 2차 세계대전 후, 원자력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한 가상의 미래가 배경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가족은 핵전쟁을 피하려 벙커로 피신했는데, 이곳에서 주인공은 아들이 납치되고 배우자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주인공은 아들을 찾기 위해 황무지가 된 매사추세츠로 여정을 떠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과 세력을 만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현한다. 그러다 아들이 “인스티튜트”라는 기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는데, 이곳에서 얻은 정보는 게임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윤리적 딜레마 상황을 초래한다. 이 외에 추가적인 서사는 게임 플레이를 참고하길 바란다.
이 윤리적 딜레마는 바로, “인간과 비인간은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이다. 인스티튜트는 “신스”라는 인조인간을 생산하여 인스티튜트 외부로 내보내는데, 이중 3세대 신스는 인간과 똑같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잔다. 심지어 외형조차 인간과 구분이 불가능하다. 신체를 해부하지 않고서는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3세대 신스에게도 기계적인 면모가 존재하는데, 바로 신스 회수 체계이다. 해당 체계에 따르면 모든 신스에게는 고유한 회수 번호가 있는데, 이것이 신스에게 음성을 통해 인식되면 개체는 작동을 중지한다. 줄거리를 따라가다 보면 필수적으로 이 딜레마를 해결해야 하는데, 바로 “신스 회수” 임무에서다. 여러 세력이 전투를 벌이는 도중에 주인공은 납치된 신스들을 처리할 방법을 정해야만 한다. 총 세 가지 세력이 개입되어 있는데, 인스티튜트는 회수 번호로 신스를 회수하려 하고, 한 집단은 신스들을 몰살하라고 지시하며, 나머지 한 세력은 신스들이 탈출하도록 도움을 주려 한다. 해당 임무는 매체로써 게임이 가진 장점을 십분 활용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임무를 하며 신스는 플레이어와 상호작용하고, 플레이어는 신스가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도록 유도된다. 그러다 선택에 따라 회수 번호를 말하면 작동을 멈추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인간형 로봇의 전원이 꺼진 듯하여 플레이어에게 혼란을 가중한다.
이처럼 <폴아웃 4>는 앞서 언급한 딜레마를 제외하고서도 동물 윤리, 결과론과 의무론, 불평등과 차별 등 다양한 윤리·철학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기에, 관심이 간다면 플레이하는 것도 추천한다. 이러한 게임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게임은 주제에 따라 윤리적 딜레마를 체감하도록 돕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https://store.steampowered.com/app/377160/Fallout_4/
폴아웃 4 스팀 판매 페이지
첫댓글 흥미로우면서 시의성 있는 소재를 선택했군요. 그런데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3세대 신스가 인간과 똑같이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잘 뿐 아니라, 외형조차도 인간과 구분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신체를 해부하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3세대 신스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이미 인간과는 다른 존재이지요. 모든 신스에게 부여된 고유한 회수 번호가 호명되면 작동을 중지하는 점까지 말한다면 더 이상 논의할 여지가 없기도 하지만 말이지요. 자, 이제 이 이야기는 "윤리적 딜레마"라는 점에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 듯해요. 이렇게 분명히 인간과 구분되는 3세대 신스는 본인을 인간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이지요. 본인을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어떤 존재에 대해서, 그것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인식하는 우리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작동을 멈춘다고 한다면 그것을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신스의 입장에서는 비윤리적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윤리, 비윤리를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