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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행전 이야기(6)
1987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5미터 높이의 머리 잘린 석상이 발견되는데
그 옆에는 ‘도마’로 읽힐 수 있는 ‘히브리어’가 암각되어 있었다.
한국 교회사의 시원을 더 앞으로 당길 수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계는 이 석상을 ‘도마상’이라 부르며 흥분했지만 그 때 흥분에 비하면 요즘은 관심이 많이 시들해진 상태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당나라까지 와서 경교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니
당(唐)과 교류가 많던 신라에 그 흔적을 남겼다는 ‘역사’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도마의 흔적이?
지난 회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페스트, 몽골 제국 등의 외인(外因)에 의해
네스토리우스파의 활동 영역이 축소된 9세기 경
인도 남부의 말라바르 교회는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결별아닌 결별을 하게 된다.
홀로 남겨진 인도 교회는 도마 전통을 강조하고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동진(東進)해서
당나라까지 진출해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라바르 교회를 동방 가톨릭 교구에 포함시켰다.
네스토리우스파로부터 독립해 도마 전통을 지켜온 인도교회가
‘정통교회’로 인정받기에는 1000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정통과 주류’가 ‘종교적 올바름’과 동의어라고 가정하면
네스토리우스와 결별한 오래전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이 말은 네스토리우스파가 신라에까지 소개되었을 개연성은 있지만
도마가 그 중심인물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의미다.
경북 영주 시민신문은 도마상이 발견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석상을 발견한 유우식이란 사람은
1987년 당시 영등포여고에 재직 중인 현직 교사이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였다.
그해 여름 성도들과 철야기도회를 하고 있을 때 깜박 잠이 들었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우식아, 영풍군 평은면 왕유리에 가서 석상(도마상)을 찾아
역사를 바로 세우라”는 음성이 들렸다. 이튿날 아들과 배낭을 챙겨 영주행 열차를 탔다.
영주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평은면소재지까지 왔다.
물어물어 왕유리에 도착하여 마을 어르신께 물었더니
‘언덕배기 산 밑에 두상이 없는 부처바위가 있다’고 했다.
그 곳으로 달려가 보니 우거진 잡목 속에 우뚝한 바위가 보였다.
풀숲을 헤치고 가까이 가보니 집채만 한 크기에 높이는 5m가량 되어 보였고,
이끼와 솔잎이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 집사는 바위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기를
‘주님, 이곳까지 인도해 주셔서 왔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감동해 깨달아 알게 해 주소서…’
기도 중에 “그 바위의 이끼를 벗겨 보라”고 하셨다.
마을 분들의 도움으로 사다리를 놓고 이끼를 걷어냈다.
이게 웬일인가? 수백 아니 수천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나타나지 않는가? 그날 이후 여러 차례 답사와 탁본 분석을 통해 ‘도마상’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게 됐다.
(영주 시민 신문 2019년 12월 27일)
발견한 분이 그렇게 증언했다고는 하지만 나같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창조과학자들이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는 것 만큼이나 황당하다. 신앙 언어에는 고백의 영역과 증명의 영역이 있는데 증명의 영역이 고백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려면 과학적 역사적 증명이 확실히 이루어 져야 한다.
위 신문은 이런 기사도 전한다.
도마박물관 조국현(박사) 관장은 저서에서 “지난 30년 동안 500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왕유동(왕머리)의 도마상(分處바위:예수바위)에 대해 검증했다”며 “도마상이 맞다”고 썼다.
석상을 발견한 유우식 선생은 논문에서 “‘분처(分處)바위’ 유적은 한국사상의 원류를 이룬 고대기독교 유적이며, 고구려 호태왕 영락 19년(서기409년,己酉)에 명전행(名全行)이 작성한 사도 도마의 전도기념 유적이며, 또한 고구려 유적이므로 국보로 지정하여 보다 철저히 관리되도록 관계기관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500명이 넘는 전문가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 한국에 교회사 연구가들이 그렇게 많았던가? 게다가 이것은 교회사의 영역이 아니라 고고학의 영역인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이를 연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발굴한 것으로 알려진 ‘독실한 순복음 신자’ 유우식 씨는 “국보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석상은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으로 명명되어 경북 문화재 자료 4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굴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석상이 도마상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근거로 삼는다.
석상의 손모양, 즉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오른 손은 바깥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전통적인 불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1908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파의 인물상에 나타난 손모양과 비슷하다.
가슴에 십자가로 보이는 것이 양각되어 있다.
중국 둔황 천불동에서 발견된 그리스도상 복원도(김호동,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오른 손은 손바닥을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전통적인 불상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도마상은 이런 손모양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석상에는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라고 새겨져 있는데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 가톨릭이 전래된 후 사용하기 시작한 한자어다. 오히려 네스토리우스 비석인 ‘재단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가 ‘미시가(彌施訶, 메시아)’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도마라는 글자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글자는 발굴자 유우식씨가 주장한 고구려시대보다 훨씬 나중인 11세기 이후 사용하기 시작한 현대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히브리어와 비슷할 뿐 히브리어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머리가 잘려나간 그 석상이 정말 도마상이라 할지라도 글자는 나중에 새겨진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누가? 그리고 왜 이곳에만?- 이런 글자를 새길 열정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 여러가지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경상북도 지역을 거쳐 올라간 가톨릭 신자였던 왜장(倭將) 고니시 부대에서 함께 했던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 일행에서 새겼거나 박해기 조선의 가톨릭 신자들이 새겼을 것이라고 추측도 해보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마을의 이름이 홍건족의 난을 피해 피난가던 고려 공민왕이 잠시 머물렀다는 의미의 왕유(王留)마을인 것으로 보아 공민왕 일행에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는 추측도 해보지만 이 역시 가능성도 없거니와 ‘야소’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시점과도 맞지 않는다.
일단 석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그렇다면 석상의 머리부분은 누가 잘라 냈을까?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이 어릴 때까지 머리 부분이 석상 주위에 굴러 다녔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없어진 데는 종교적 이유에 따른 누군가의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고고학자가 아니기에 가서 보아도 뾰족한 결론은 못내렸겠지만) 내 의견으로 그것은 도마상이 아니다. 도마의 ‘명망(名望)’은 인도에서 멈췄고 중세 동방교회에서 선호되던 이름은 오히려 요한이었다. 중세 동방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전설의 인물 사제왕 요한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다루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도마상인지 불상인지에 관심이 없다. 다만 그 석상에 누가 어떤 의도로 ‘야소’, ‘도마’를 새겨 넣었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도마상을 객관적으로 다룬 2005년 1월 3일 한겨레 신문의 글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오늘도 분처상(분처바위 옆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은 그 무언가를 증언하면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다. 무언 중의 유언, 그것이 바로 역사어다. 이 역사어를 알아듣지 못해 생긴 것이 이른바 ‘역사의 비밀’이다. 역사의 비밀은 역사의 심연 속에 일시 가려진 것일 뿐, 영원은 아니다. 그 심연을 파헤치다 보면, 어느날엔가는 그 비밀이 허무해지는 법이다. 분처상의 비밀도 그러할 것이다.
서진 동진
기독교복음의 한국 전래 과정은 두 경로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서진의 과정으로서, 19세기 이후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을 통한 접촉이고, 다른 하나는 동진 과정으로서, 16세기 이전의 중국을 경유한 접촉이다. 후자의 경우는 문헌으로 확증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흔히 고대기독전래설이라고 말해 왔다.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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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보살상인가, 도마상인가 아직도 논란중-도마행전 이야기(6)
1987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5미터 높이의 머리 잘린 석상이 발견되는데 그 옆에는 ‘도마’로 읽힐 수 있는 ‘히브리어’가 암각되어 있었다. 한국 교회사의 시원을 더 앞으로 당길 수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계는 이 석상을 ‘도마상’이라 부르며 흥분했지만 그 때 흥분에 비하면 요즘은 관심이 많이 시들해진 상태다.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당나라까지 와서 경교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니 당(唐)과 교류가 많던 신라에 그 흔적을 남겼다는 ‘역사’는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도마의 흔적이?
네이버 블로그 story 77616 화면 갈무리
지난 회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페스트, 몽골 제국 등의 외인(外因)에 의해 네스토리우스파의 활동 영역이 축소된 9세기 경 인도 남부의 말라바르 교회는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결별아닌 결별을 하게 된다. 홀로 남겨진 인도 교회는 도마 전통을 강조하고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동진(東進)해서 당나라까지 진출해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2017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라바르 교회를 동방 가톨릭 교구에 포함시켰다. 네스토리우스파로부터 독립해 도마 전통을 지켜온 인도교회가 ‘정통교회’로 인정받기에는 1000년 이상이 걸린 셈이다. ‘정통과 주류’가 ‘종교적 올바름’과 동의어라고 가정하면 네스토리우스와 결별한 오래전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이 말은 네스토리우스파가 신라에까지 소개되었을 개연성은 있지만 도마가 그 중심인물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의미다.
경북 영주 시민신문은 도마상이 발견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석상을 발견한 유우식이란 사람은 1987년 당시 영등포여고에 재직 중인 현직 교사이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집사였다. 그해 여름 성도들과 철야기도회를 하고 있을 때 깜박 잠이 들었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우식아, 영풍군 평은면 왕유리에 가서 석상(도마상)을 찾아 역사를 바로 세우라”는 음성이 들렸다. 이튿날 아들과 배낭을 챙겨 영주행 열차를 탔다. 영주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평은면소재지까지 왔다. 물어물어 왕유리에 도착하여 마을 어르신께 물었더니 ‘언덕배기 산 밑에 두상이 없는 부처바위가 있다’고 했다.
그 곳으로 달려가 보니 우거진 잡목 속에 우뚝한 바위가 보였다. 풀숲을 헤치고 가까이 가보니 집채만 한 크기에 높이는 5m가량 되어 보였고, 이끼와 솔잎이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 집사는 바위 앞에 무릎 끓고 기도하기를 ‘주님, 이곳까지 인도해 주셔서 왔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감동해 깨달아 알게 해 주소서…’ 기도 중에 “그 바위의 이끼를 벗겨 보라”고 하셨다.
마을 분들의 도움으로 사다리를 놓고 이끼를 걷어냈다. 이게 웬일인가? 수백 아니 수천 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나타나지 않는가? 그날 이후 여러 차례 답사와 탁본 분석을 통해 ‘도마상’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게 됐다. (영주 시민 신문 2019년 12월 27일)
발견한 분이 그렇게 증언했다고는 하지만 나같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창조과학자들이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는 것 만큼이나 황당하다. 신앙 언어에는 고백의 영역과 증명의 영역이 있는데 증명의 영역이 고백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려면 과학적 역사적 증명이 확실히 이루어 져야 한다.
위 신문은 이런 기사도 전한다.
도마박물관 조국현(박사) 관장은 저서에서 “지난 30년 동안 500명이 넘는 전문가들이 왕유동(왕머리)의 도마상(分處바위:예수바위)에 대해 검증했다”며 “도마상이 맞다”고 썼다.
석상을 발견한 유우식 선생은 논문에서 “‘분처(分處)바위’ 유적은 한국사상의 원류를 이룬 고대기독교 유적이며, 고구려 호태왕 영락 19년(서기409년,己酉)에 명전행(名全行)이 작성한 사도 도마의 전도기념 유적이며, 또한 고구려 유적이므로 국보로 지정하여 보다 철저히 관리되도록 관계기관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500명이 넘는 전문가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가? 한국에 교회사 연구가들이 그렇게 많았던가? 게다가 이것은 교회사의 영역이 아니라 고고학의 영역인데 그렇게 많은 인원이 이를 연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발굴한 것으로 알려진 ‘독실한 순복음 신자’ 유우식 씨는 “국보로 지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석상은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으로 명명되어 경북 문화재 자료 4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발굴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석상이 도마상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근거로 삼는다.
석상의 손모양, 즉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오른 손은 바깥쪽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 전통적인 불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1908년 중국 둔황에서 발견된 네스토리우스파의 인물상에 나타난 손모양과 비슷하다.
가슴에 십자가로 보이는 것이 양각되어 있다.
중국 둔황 천불동에서 발견된 그리스도상 복원도(김호동,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오른 손은 손바닥을 왼손은 손등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전통적인 불상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런데 도마상은 이런 손모양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석상에는 ‘야소화왕인도자(耶蘇花王引導者)’라고 새겨져 있는데 ‘야소’라는 말은 중국 명대 중기 가톨릭이 전래된 후 사용하기 시작한 한자어다. 오히려 네스토리우스 비석인 ‘재단경교유행중국비’에는 예수가 ‘미시가(彌施訶, 메시아)’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도마라는 글자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글자는 발굴자 유우식씨가 주장한 고구려시대보다 훨씬 나중인 11세기 이후 사용하기 시작한 현대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히브리어와 비슷할 뿐 히브리어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머리가 잘려나간 그 석상이 정말 도마상이라 할지라도 글자는 나중에 새겨진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누가? 그리고 왜 이곳에만?- 이런 글자를 새길 열정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 여러가지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임진왜란 때 경상북도 지역을 거쳐 올라간 가톨릭 신자였던 왜장(倭將) 고니시 부대에서 함께 했던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 일행에서 새겼거나 박해기 조선의 가톨릭 신자들이 새겼을 것이라고 추측도 해보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마을의 이름이 홍건족의 난을 피해 피난가던 고려 공민왕이 잠시 머물렀다는 의미의 왕유(王留)마을인 것으로 보아 공민왕 일행에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는 추측도 해보지만 이 역시 가능성도 없거니와 ‘야소’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시점과도 맞지 않는다.
일단 석상의 정체에 대해서는 제쳐두고 그렇다면 석상의 머리부분은 누가 잘라 냈을까?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이 어릴 때까지 머리 부분이 석상 주위에 굴러 다녔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없어진 데는 종교적 이유에 따른 누군가의 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고고학자가 아니기에 가서 보아도 뾰족한 결론은 못내렸겠지만) 내 의견으로 그것은 도마상이 아니다. 도마의 ‘명망(名望)’은 인도에서 멈췄고 중세 동방교회에서 선호되던 이름은 오히려 요한이었다. 중세 동방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전설의 인물 사제왕 요한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다루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도마상인지 불상인지에 관심이 없다. 다만 그 석상에 누가 어떤 의도로 ‘야소’, ‘도마’를 새겨 넣었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도마상을 객관적으로 다룬 2005년 1월 3일 한겨레 신문의 글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다.
오늘도 분처상(분처바위 옆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은 그 무언가를 증언하면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다. 무언 중의 유언, 그것이 바로 역사어다. 이 역사어를 알아듣지 못해 생긴 것이 이른바 ‘역사의 비밀’이다. 역사의 비밀은 역사의 심연 속에 일시 가려진 것일 뿐, 영원은 아니다. 그 심연을 파헤치다 보면, 어느날엔가는 그 비밀이 허무해지는 법이다. 분처상의 비밀도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