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오직 앞만 바라보고 살게 하는 가속도의 사회이다. 좌우를 돌아다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고, 뒤를 돌아다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주어진 삶의 환경과 여건이 어려울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아날로그적인 삶의 양식에서 전환된 디지털적인 삶의 양식은 오로지 속도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로 뛰던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한 지 오래이다. 인터넷을 통한 광범위한 정보수집과 정보활용 능력이 이제는 삶의 성공여부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제는 속도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좀 비속하게 표현한다면 속도의 노예가 된 셈이다. 여유가 없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자기 존재에 대하여 우주론적인 성찰과 사유를 할 수 있을까. 이 세계에 던져진 자아를 과연 어떤 자아로 세워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한국문학에서도 얼마만큼 이러한 고뇌어린 창조적 작업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을까.
시간의 타자가 되어버린 현대시대에 있어서는 자기를 둘러싼 공간조차 향유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너무나도 많다. 그 공간과 대화할 겨를조차 전혀 없는 탓이다. 주어진 삶 속에서 감당해내야 할 여러 가지 일로 정신없이 살다보면, 정말 하늘조차 한번 보기도 힘들 때가 있다. 물론 우리가 하늘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아도 우리의 머릿속에는 늘 날마다 하늘이 자기 앞에 높이 펼쳐져 있다. 항상 그것을 머릿속에서는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몸을 세우고 눈을 들어 의도적으로 하늘을 쳐다본 경험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가까운 날들을 되짚어 보면, 금방 증명이 된다. 필자에게 물어도 ‘본적이 없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어디 대낮만 그러 하겠는가. 밤에도 그러할 것이다. 별이 돋아난 밤하늘을 보기에는 현대인의 일상사가 너무 사무로 바쁘다. 밤도 낮의 연장이다.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게임방으로, 야근으로… 등등의 일로 겨를이 없다.
하늘을 보지 않고 산다는 것은 하늘과 대립하는 땅만 보고 산다는 뜻이 된다. 이 지점에서 아날로그 시대에 살았던 시인 윤동주를 잠시 만나보자. 그는 거의 날마다 땅과 대립하는 하늘만을 보며 살았던 시인이다. 그의 주옥같은 명작 시편들을 보면, 거의 빠짐없이 하늘이 나타나 있다. 가령,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생략…)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서시」 일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별헤는 밤」 일부). 이렇게 윤동주 시인은 땅의 어렵고 힘든 고통의 삶에서 벗어나 낮이나 밤이나 하늘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기 존재적 삶을 탐구해 나갔던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땅에 속한 자였지만 언제나 하늘을 통하여 그 땅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땅의 삶을 가볍게 여기거나 회피하거나 조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치열하게 살았다. 그 치열함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가 어떤 존재일까 하는 의문을 수시로 되새기게 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땅에 속한 세계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허위적이고 곤핍한 땅의 공간에 두 발을 내디디고 서서 땅과 대립하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던 것이다. 그는 그 하늘을 통해 자아의 존재적 의미와 살아가야할 참된 길과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고 죽는 날까지 지상의 어려운 자들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자아상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윤동주는 하늘과 땅 사이에 위치한 시인이다. 하늘에도 걸리고 땅에도 걸리는 시인이다. 기독교의 성경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늘을 창조하였고, 그 다음에 땅을 창조하였으며, 가장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다. 이로 보면, 먼저 천지공간을 만든 다음에 여기에 인간을 창조해 넣은 것이 된다. 인간을 마지막으로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천지공간을 먼저 만들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천지인’으로 융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에게 천지는 동일한 공간적 의미로 작용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을 기호론적인 의미로 파악해 보면, 하늘은 높고 영원하며 변함이 없지만, 땅은 낮고 유한하며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상/하, 영원/유한, 불변/가변, 신/인간, 영생/죽음, 탈속/세속, 순수/불순’ 등의 대립적 의미를 산출한다. 천지 사이에 있는 인간은 이러한 대립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의 조정을 통해서 자아의 존재를 확립해나가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학을 기독교문학이라고 한다면, 윤동주 시인은 훌륭한 기독교문학의 금자탑을 쌓은 것이 된다. 이러한 기독교 문학은 서구에서는 그 연원이 매우 깊고 그 계보를 잇는 성과물도 만만치 않다. 가령, 생각나는 대로 걸작에 해당하는 소설들을 적어 본다면,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밀턴의 『실락원』, 단테의 『신곡』,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부활』, 호손의 『주홍글씨』 등 수없이 많다. 이 작품들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질문과 대답으로써 쓰여진 명작이다. 물론 한국문학에서도 그 연원은 그리 깊지는 않지만 미미하게나마 기독교적 문학의 계보를 잇고 있는 상황이다.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든 대립하든 간에 기독교 소재를 가지고 형상화한 소설로 보면, 이광수의 『무정』,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등을 명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시인으로는 정지용, 윤동주, 박두진, 박목월, 김현승, 황금찬, 김남조, 이해인, 정호승 등의 시작품을 들 수도 있다.
이러한 기독교문학은 땅과 하늘 사이에 위치한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에도 큰 유익함을 주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문학을 보면, 아쉽게도 땅만 바라보는 땅의 문학만을 열심히 쏟아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툼과 경쟁과 물질과 문명과 욕망에 대해서만 탐구하고 있다. 요컨대 눈앞에 보이는 감각적 현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만큼 땅에 구속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지상의 생활이 팍팍하고 어려우며 복잡다단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역설적으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다볼 필요가 있다. 지상은 수시로 변하면서 인간의 삶을 흔들어 놓지만 하늘은 영원 무변한 공간으로써 항상 동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과 대립하는 하늘을 통해서 변화되어가는 인간의 삶을 새롭게 조망해야 할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는 문학, 그것은 또다시 한국문학의 세계를 풍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역할도 할 것이다. 천지인이 융합된 한국문학을 겸손하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