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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9주일설교 고린도전서15:46-58
본문: 고린도전서15:46-58
제목: 부활의 몸으로 상속하는 하나님 나라
오늘은 고린도전서15:46-58의 말씀을 가지고
“부활의 몸으로 상속하는 하나님 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몸으로 상속하는 하나님 나라”
우리는 계속해서 부활에 관해서 나누고 있고
오늘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서
다섯 번째 부활에 관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 육의 몸으로 땅에 심기어져 죽지만
부활의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땅의 몸, 하늘의 몸(46-49절)
우리는 계속해서 땅의 몸과
하늘의 몸의 차이를 말해야 합니다.
바울은 두 몸의 필연적 순서와
그 기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울은 부활에도 순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열매인 그리스도는 이미 부활하셨지만
신자들의 부활은 아직 정해진 종말을
기다려야 합니다(23-26절)
따라서 우리 몸에도 나름의 순서가 생깁니다.
역사적 경험에서 두 몸의 순서를 말하자며,
당연히 지금과 같은 “혼의”몸이 먼저입니다.
부활과 더불어 갖게 될 “영의” 몸은
그 다음에 따라옵니다.(46절)
이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우리 경험에서도 그렇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난 존재, 곧 지상의 존재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신 분이기에
천상의 존재이십니다.(47-48절)
여기서 “하늘에서”는 물리적으로 보이는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지상의 존재들인 현재 우리는
지상의 인간인 아담의 속성을 공유합니다.
반면 천상의 존재들 곧 미래 부활을 통해
태어날 우리는 천상의 아담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속성을 고스란히 이어받습니다.(48절)
지금 우리가 지상의 존재인
아담의 형상-생김새를 지닌것처럼
장차 우리의 천상의 존재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공유할 것입니다(49절)
부활의 몸으로 상속하는 하나님 나라(50-58)
바울은 실제 부활의 여려가지 관점에서 밝히며
부활의 분명함을 강조해 왔습니다.
마지막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활의 미래를 하나님의 나라 상속,
곧 구원과 소망과 연결합니다.
물론 이 역시, 곧 부활
곧 변화된 몸의 분명함을 설득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이루어질 때의 상황을
생생한 묵시적 언어로 묘사하면서(56절)
실천적 권고와 더불어 긴 논쟁을 마무리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하나님 나라와 연결합니다.
바울은 신자들 모두가 공유한
이 구원의 소망을 가리키며 바로 이 소망이 실천되려면
부활의 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살과 피”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는 이유는
현재의 이 몸이 곧 “부패할” 몸이기 때문입니다.
부패할 몸으로 영원한 삶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한다면
그 말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부패하지 않을” 나라이며,
따라서 부패하지 않을 몸을 가진 자들만이
그 나라의 주민이 됩니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입니다.
지옥 개념이 전혀 나오지 않는 바울 서신에서
부패란 ‘죽을 수밖에 없는’ 현재의 실존 묘사이자,
종말론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 파멸의 상대의 이름입니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지금 지상의 몸은
부패할 몸이자 죽을 몸입니다.
하지만 부패하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려면
죽음으로 이 땅에 심겨야 합니다,(42절)
부패하고 말 현재 우리 실존과
미래에 상속할 하나님 나라를 혼동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장차 상속할 나라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바울 서신에서는
종말론적 경고의 문맥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은
현재의 부패할 몸 대신 부패하지 않을 몸을,
현재의 죽을 몸 대신 죽지 않을 몸을 요구합니다.
이는 장차 우리가 죽음 이후에 가질 지금 우리로서는
비유적인 상상 밖에는 할 수 없는 부활의 몸입니다.
장차 그리스도가 죽음이라는 마지막 원수를 정복하실 때
우리 역시 부패하지 않을 부활의 몸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같은
천상의 몸을 소유할 것이며,
그 부패하지 않을 몸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언급하는 이유는 평소와 다릅니다.
평소 바울은 주로 신자들의 일탈을
경고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언급합니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4:19-20)
반면 여기서는 부활의 확실성을 재확인하며
신자들의 희망을 북돋우는 것이 주된 목적입니다.
현재의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이는 이유는
미래의 부활의 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다 선명하게 각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다는 것입니까?
그런 식으로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 나라도 상속받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하는
경고입니다.
부활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논증인 만큼
바울은 지금의 몸을 벗고
부활의 몸을 입을 때의 극적인 변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보라 내가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비밀은 본래 숨겨진 것을 의미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비밀은
오랫동안 감추어졌다가 이제 드러난 비밀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과
그 권력자들에게는 여전히 비밀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에게는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밀은 다름 아인 부활의 날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해 왔듯이 “모두가 잠 잘”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원히 죽을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변화할 것입니다.(51절)
지금 바울은 차분하게 바라보는 분위기에서
미래의 변화를 묵상하는 중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거침없는 신앙적 날개를 타고
부활의 날,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질
바로 그 순간을 향해 갑니다.
이 변화는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날 것입니다(52절)
순식간이라는 말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시간을 말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부활의 변화가
지금은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일단 일어나면 금방이라는 뜻입니다.
이 순간은 “마지막 나팔의 울릴” 바로 그 시점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하나님이 나팔 소리는
천사장의 소리 및 주님 자신의 우렁찬 명령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이
먼저 부활하게 될 때를 알리는 신호입니다.(살전4:16)
바로 그때 죽은 사람들이
부패하지 않을 사람들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의심이 문제가 되는 상황이 아니라
여기서는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부활의 순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죽은 신자들이 부활하고
그다음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도
그들과 더불어 구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가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살전4:17)
이런 변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확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패할 몸은 부패하지 않을 것을
옷처럼 입어야 하고
현재의 이 죽을 것은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죽을 우리 존재가 불멸의 옷을 입을 때
그때 바로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54후절)
이 구절은 이사야25:8에서 하나님이 세상 모든 민족을
시온산으로 초대하여
베푸실 종말 잔치에 관한 노래의 한 구절입니다.
이 잔치는 죽음에 대한 최종 승리가
이루지는 바로 그날에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이사야가 노래한 이 오랜 기대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의 맥락에서 새롭게 읽습니다.
바울의 인용을 또 합니다. 호세아의 말씀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절)
현재 우리의 실존은 죽음의 지배 아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죽음의 승리란
한갓 지나간 이야기일 뿐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헤칠 수 있는 날카로운
화살이나 칼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패할 몸이 부패하지 않음을 입고
죽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는 그날에는
죽음 자체가 파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멋진 꿈도 실현 가능성이 없으면
개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려내는 멋진 승리의 노래와
패배자를 향한 빈정거림도
현실적 가능성이 없다면 현실 도피를 위한
‘정신적 승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울은 56절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이라”고 말함으로 갑자기 차분해 집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음이 우리를 휘두르는 날카로운 칼날은
다름이 아닌 죄입니다.
죄는 우리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이 죄를 무기 삼아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합니다.(롬5:12,14,21)
죄의 권세는 율법이라는 말은
정통 유대인들을 경악하게 할 만한 말입니다.
율법이 주어졌지만
이 율법은 죄의 위력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무기력함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의 위력에 짓눌리며
죄의 하수인처럼 작용합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은 오히려 욕망을 자극하고
죄를 부추긴다고 말합니다.
결국 죽음이 죄를 통해 나를 지배합니다.
안타깝게도 선한 율법은 죄에 이용당하고,
또 죄는 죽음에 이용당합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탈출구 없는 “죽음의 몸”에 갇혀
처형 날짜만 기다리니 “비참한 존재”라고 (롬7:24)
곧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암울한 묘사에 감사의 찬양이 이어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매우 비슷한 표현으로
감사의 찬양이 이어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절)
죄가 율법을 이용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죽음이 죄를 쏘아 우리를 정복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주십니다.
우리가 응당 받아야 할 죽음 대신,
하나님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내려 주십니다.
부활은 죽음의 무장 해제, 아니 죽음의 패배입니다.
과거 죽음은 죄를 자신의 공격 무기로 삼아
우리를 지배했습니다.
곧 죄의 명분으로 우리를 눌렀습니다.
그리고 죄는 율법의 힘을 등에 업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56)
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승리를 주십니다(57절).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는 죄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17절)
그뿐 아니라 우리는 장래에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을 경험할 것입니다.
바로 이 부활과 영생의 승리가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렇듯 부활이 확실하므로 성도들은
어리석은 가르침에 속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33절).
오히려 견고하게 서서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모든 면에서 주를 섬기는 일에
더 나은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현실이 될 때까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계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부활 신앙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헛되이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현재도 함께 힘을 잃게 됩니다.
현재는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삽니다.
과거는 나의 현재로 이어지는 여정입니다.
또 미래는 나의 오늘이 이어지는 여정입니다.
현재의 서글픔을 감추기 위한 왕년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의 무게를 피하기 위한 두고 보자도 아닙니다.
복음 속에서 우리의 과거와 미래는 오늘 우리의 신앙적
실존을 양쪽에서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입니다.
과거의 십자가를 말하는 일이
미래의 구원을 말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미래의 부활의 소망을 상실할지 모르는
그래서 현재의 삶의 좌표를 잃고
방황할 위기에 빠진 신자들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소망은
현재의 우리의 삶을 표류하지 않게 붙드는
영혼의 닻이라고 합니다.(히6:19)
현재의 의미를 잃고 표류하는 까닭은
미래를 너무 강조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소망이라는 올바른 방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에 대한 생각은 어쨌든
오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파종이기에
오늘 우리가 무엇을 심는가에 따라서
미래의 추수를 결정합니다.
부활이 없다는 가르침이 속아 현재의 삶을 그르치면
곧 미래의 소망을 팽개치는 결과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심는 몸은 욕된 것이며
약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영광되고 강한 몸을 얻으려는 소망 때문입니다.
내일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보여준 삶은 천하고 약했으며
세상의 구경거리요, 만물의 쓰레기 같았습니다.
미래가 없다면 가장 불쌍한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비천함 속에서
미래를 여는 열쇠를 보았습니다.
현재의 고통이 미래를 위한 통로입니다.
역설적으로 비천함 아래 십자가 모양을 띤
성령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능력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뿌리는 대로 거둡니다. (갈6:7-9)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따라서 갚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안전합니까?
십자가의 모양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은 드러내지 못하고
세상과 별반 다름없이 먹고 마시며 산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은 아닐까요?
우리는 부활에 희망을 건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이 세상에서 승리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일까요?
말로만 부활을 고백할 뿐
실제로는 부인하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부활은 부활절에 한번 소리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복음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입니다.
그의 복음은 하나님 아들에 관한 것이었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을 결정적 계기는 부활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은
하나님의 영 곧 생명의 성령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나 우리에게나 의롭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소유하신 부활의 능력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 부활에서 드러나고
지금 믿는 자 중에서 역사합니다.
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도록 변화시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성도들이
이 능력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부활의 능력을 믿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