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으로 - 월정사단기출가학교 이야기
2004년 이른 봄.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온 전화였다.
새로 본사주지로 부임한 정념스님께서
내게 교무 국장 소임을 맡기고자 하니
와 달라는
선배 스님의 부탁이었다.
그즈음
나는 강진 백련사
무문관 선방에서 정진한 후
몸이 많이 안 좋아
쉬고 있을 때였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무문관 정진 후
몸이 아직 회복되질 않아서
다음에 인연이 되면
그때 살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히 사양을 했다.
그런데
며칠 있다 또 연락이 왔다.
그러지 말고 일단 한번
와 보기나 하라는 것이었다.
자꾸
사양하는 것보다
부임 축하도 드릴 겸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대산으로 향했다.
사실 난 월정사로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지만,
계를 받고 보름 만에
걸망을 싸서
토굴행을 한 전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의 끝에서
나를 부처님 제자로
받아준 월정사와 오대산의 너른 품.
그리고
몽중가피를 입은
약왕보살님의 은혜를 갚지 못하고
밖으로만 떠돈 마음의 빚이 늘 있었다.
주지 스님을 뵙고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사정을 말씀드리니.
"아.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몸이 안 좋으면 여기서
쉬엄쉬엄 조리하면서
틈틈이 소임도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같이 살도록 하십시다." 하며
망설이는 내 마음을
단칼에 정리를 해 버리셨다.
'허, 이게 아닌데-..' 하면서
잠시 생각을 했다.
'그래. 이번 기회에
차라리 마음의 빚도 덜 겸,
그동안 선방 다니면서
대중 공양 받은
인연들께 회향하는 마음으로
대중 시봉하는
공덕을 짓자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정성을 다해서
한 번 살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본사의 교무국장은
어찌 보면 한직일 수도 있지만,
일을 제대로 할라치면
안 걸리는 것이 없는 소임이다.
정념스님께서는 상원사 주지를
12년간 하면서 도량을 일신하셨다.
특히
북방 제일선원인
청량선원을 재개원 하셨고,
총무원에서 두루 소임도 사셨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본사 주지를 맡으셨으니.
뜻을 펼치고 싶은 것이
어찌 많지 않으시겠는가?
주지 스님을 비롯한 7국장과
뒷방 한주 스님들까지
모든 대중들이
새벽예불 참석은 물론이요 .
예불 후 108대참회문과
원각경보안보살장 독송을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그 진행을 교무국장인 내가
직접 목탁 치면 서 해야 하니
난 그야말로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0여 년 선방 다니는 동안
염불할 일이 거의 없어
천수경도 다 잊어먹었는데.
다시 힘든
승가대학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이렇게 온 대중이 예불과 발우공양,
청규를 지켜가며 수행을 하고 있으니.
총림도 아닌 본사에서
이렇게 사는 모습이 희유하다며,
교계 신문에
보도까지 되기도 했다.
매일 아침 공양 후엔
주지 스님과
전나무 숲길 포행을 다녔는데,
이런저런 현안들을
그 시간에 주로 의논했다.
그러다가
단기출가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준비를 잘 해달라고 지시를 하셨다.
정념스님께서는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벌써 이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계셨었다.
그런데
말씀을 듣다 보니 마침 평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같았다.
1993년도였다.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도반들과 함께
어머니들을 모시고
미얀마 성지순례를 갔을 때였다.
미얀마 불교의 상징이라는
쉐다곤 파고다를 참배하는 중에
희유한 행렬을 만났다.
맨 앞에서
화동이 꽃잎을 뿌리고,
이어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아이가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의 어깨를 타고 지나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공양물을 손에 들거나,
혹은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돌며 따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장엄하게 보여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단기출가 '신퓨' 의식이라고 했다.
출가 하는 절에 가기 전에
불탑을 먼저 참배하여 공덕을 짓고,
온가족들이 훌륭하게
수행 잘하기를
축복해 주는 행사였딘 것이다.
그러면서 미얀마에서는
남자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단기출가를 해야만.
사회생활을 하더라도
대접을 받는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남자라면
군대를 다녀와야
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것과 흡사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야. 출가를
이렇게 멋지게 할 수도 있구나.
우리나라도 이런 출가문화가
정착되면 얼마나 좋을까?'
순례 기간 내내
그 모습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그래,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도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 라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마치
부처님께서 이 일을 하라고
나를 월정사로 부르신 것 같았다.
그해 9월
개교를 목표로 차근차근
'월정사단기출가학교'
프로 그램을 준비해 나갔다.
당시
'단기출가' 라는
프로그램이 아직 없던 때라
자료 구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우선 오래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남방의 미얀마.
태국 단기출가 자료들을 모았다.
'신퓨의식'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다하면
천리를 멀다않고 찾아갔다.
대만 불광사의
단기출가 프로그램도 참고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불교실정에 맞는
프로그램 틀을 짜는 것이었다.
문득
송광사 율원에서 공부할 때.
행자교육원 습의사로
행자들을 가르치던 때가 생각났다.
조계종으로 출가하면
일정기간의 행자생활을 해야 한다.
또한 정식으로
계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자교육원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거쳐야 한다.
불교의 기본적인 지식을
점검하는 입방고사와 신체갈마.
마지막으로 면접까지
통과해야 입방이 허락된다.
이후 한 달 간의 힘든 수행까지 마치고
졸업시험인 5급 승가고시에 합격하면
비로소
예비승인 사미가 되는 것이다.
이 훌륭한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흐름은 유지하되
남방의 '신퓨' 장점도 보태
완성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출가하면서
삭발한 머리카락을 묻는
이른바
'삭발탑'을 만든 것이었다.
종무회의에 이 안을 올리니
대부분의 스님들이
''머리를 깎았으면
태워버리면 되지
뭣하러 탑을 만들어
묻습니까?"라며
부정적인 의견들을 냈다.
''그 말씀도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출가 수행자들이야
늘 깎는 머리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기출가 하는 분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삭발하고 수행체험을 하는 것인데
그 머리카락을 좀 더 의미있게
해 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며
설득을 해서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뿐인
삭발탑이
일주문 옆에 생기게 되었다.
탑신과 옥개석, 보주는
법당 뒤에 방치되어 있던
옛날 석탑부재들을 이용했다.
삭발탑 뒤쪽에는
이런 글귀도 써 넣었다.
創髮紀念塔
寶展에 주인공이 꿈만 꾸더니
無明草 몇해를무성했던고
金剛寶劍 번쩍 깎아버리니
無限光明 대천세계 밝게 비추네.
출가, 그리고 삭발
여기,
자기 성찰을 통한
맑고 건강한 인격체 형성과
삶의 궁극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출가한 이들의
삭발을 기념하며
무명초를 묻는다.
사바의 여정에
가끔 이곳을 들러
일주문 밖
어디쯤인가에서
서성이고 있을
초발심 때의 그 간절했던 마음을
추슬러 삶을 좀 더 치열하게
살 수 있는 이 되고자 이 탑을 세운다.
불기 2548(2004)년 9월 15일
월정사단기출가학교
윗글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삭발하시면서 읊은 게송이며
아랫글은 내가 지은 것이다.
지금 이곳은
단기출가학교 동문들에게
성지쯤으로
여겨지는 곳이 되었다.
먼 훗날 세월이 흐르면
정식 출가행자들은
노스님이 되고,
집으로 돌아간
행자들도 백발이 될 것이다.
고단한 삶에 노을이 물들 때쯤
이곳에 와 탑을 어루만지며,
젊은 날
월정사에서 삭발염의하고
한 달간 치열하게 수행했던
흔적들을 더듬다 문득
'한소식' 할지 어찌 알겠는가?
전체적인 틀이 잡히자
교재를 만들기 시작했다.
프로그램 성격에 맞게
거의 완성한 다음
'책 제목을 무엇으로 하지?'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며칠 생각하다가 문득
책상 위에
있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첫 마음으로'
이 글은 내가
교무국장 소임을 시작하면서,
'소임 보는 동안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지금 출가하여 행자생활
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자.
장애가 있을 땐.
출가하던 날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자.
그때의 첫 마음으로만 돌아가면
모든 분별심은 사라지고
결코 해내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 '
이런 각오를
다지기 위해 써 붙인 글이었다.
'맞아. 이것으로 하자.
한 달간 단기출가이긴 하지만
배낭을 메고 산문을 들어설 때
그 첫 마음만 생각한다면
무슨 시비분별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정했다.
프로그램을 확정한 후
언론에 자료를 배부했다.
여기저기서 대서특필했다.
그 무렵
속가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월정사에 참배를 왔다.
그때 방바닥에 펼쳐 놓은
불교신문 1면에
단기출가 학교가 소개된 것을 보고.
"스님. 저도 이 프로그램
한 번 해보고싶습니다."라고 했다.
흔쾌히 승낙했다.
1기 반장 소임까지 맡은
동생 선각 행자는
졸업 후 정식 출가를 했다.
이후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선방정진을 거처 지금은
팔공산 은해사에서
소임까지 보고 있으니
단기출가학교의
인연이 참으로 지중하다.
그리고 오늘날
월정사단기출가학교를
있게 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행자들을
모집하고 서류심사를 해서
합격자까지 발표를 한 뒤에
모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이 프로그램으로
다큐 멘터리를 만들고 싶은데
허락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스님들은 대체로 도량 내에
방송국 카메라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을 꺼려 한다.
행동을 조심해야 하고
혹시 본의 아니게
절집의 일상 생활이
잘못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프로 그램을
전국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직감했다.
종 무회의에 안건을 올리고
반대하는 스님들을
설득해 나가기 시작 했다.
''이 단기출가학교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가
우리 한국불교의 미래를 좌우할 것입니다.
이 좋은 프로그램을 우리가
방송국에 부탁을
해서라도 홍보를 해야 할 판인데,
방송국에서 먼저 찍자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대중스님들 피해가 없도록
최대한 노력할 테니
제발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망설이는 대중들의 마음을
주지 스님께서
시원하게 정리를 해주셨다.
"거 교무스님 말씀대로 해봅시다.
대중스님들은 좀 불편하더라도
촬영하는 데 적극
협조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안건이 통과되자
이번에는 합격한 행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이 남았다.
일일이 전화를 걸어
이렇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영상에
얼굴 노출이 되어도
괜찮은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을
분류해서 조를 짰다.
그리고
주인공으로 출연할 5명을
감독님과 상의해서 선정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꼬박 한 달 동안 촬영한 작품은
'출가'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특집 방송되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
3기 모집 문의로
종무소 전화는 불이 났고,
월정사 홈페이지는
접속이 폭주해서 다운이 되었다.
정원 60명에 천여 명이
지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급기야 여기 저기서
입학하게 해 달라는 청탁까지 들어와,
지원 서류를 들고
도반 스님 절로
피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출범한
월정사단기출가학교는
이제 월정사의 대표적인
수행 프로그램이 되었고,
2020년까지
16년 동안 57기.
약 3천여 명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정식출가자가
졸업생의 거의
10퍼센트 가까이 되니,
요즘같이
출가자가 격감하는 시대에
출가의 산실로서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길을 가다
방향을 잃어 버렸을 때는,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룰 때 설레던 첫 마음,
그리고
기다리던 첫 아기를 안고
기뻐할 때의 그 환희롭던 마음,
힘든 투병생활을
마치고 퇴원할 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의 눈물짓던 그 마음.
오랜 취업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직장에
첫 출근할 때
그 당당하고 힘찾던 발걸음...
모두 그
첫 마음을 기억할 일이다.
지금의 겪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순수했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 지혜를 모은다면,
반드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수행자들도 마찬가지다.
신심이
퇴색되고 무더졌을 땐
이 첫 마음이란
숫돌로 날을 세워야 한다.
처음 발심했을 때가
정각을 이룬 때라 하지 않았는가.
첫 마음,
늘 가슴에 새기면서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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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음으로 - 월정사단기출가학교 이야기 ----동은스님
햇빛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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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9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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