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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로열 오페라, 52분 / 다큐 45분 / 한글자막>
=== 프로덕션 노트 ===
마리아 칼라스 1964년 <토스카(2막)> 실황 & 다큐멘터리
마리아 칼라스(토스카), 레나토 시오니(카바라도시), 티토 고피(스카르피아), 로버트 보우먼(스폴레타)
1964년, 칼라스가 노래한 영광의 순간을 찾아서
1964년,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에 프랑코 제피렐리 연출로 오른 <토스카>에 마리아 칼라스(1923~77)가 오른다. 당시 인기와 보도는 비틀즈를 넘어섰다고 한다. 스캔들에 빠져있었지만, 칼라스는 이 무대를 통해 프리마 돈나의 건재함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다큐멘터리(52분)는 칼라스의 영상과 안토니오 파파노, 롤란도 비야손, 토마스 햄슨, 크리스틴 오폴라이스 등의 인터뷰가 어우러진다. <토스카> 2막 실황(45분)은 한편의 영화처럼 촬영되었다. 마지막에 관객들의 박수소리를 통해 '한편의 영화 같은 무대'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해설지(13쪽 분량)에는 칼라스에 대한 간략한 아티클(영·불·독)이 수록되어 있다.
이 영상물은 마리아 칼라스(1923~77)의 일생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마법 같은 순간을 담고 있다. 1964년, 칼라스는 런던 로열 오페라에 오른 <토스카>에 출연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공연에 대한 보도는 당시 비틀즈를 넘어섰다고 한다.
당시에 그녀는 그리스의 선박왕이자 억만장자 애리스토틀 오나시스와의 스캔들에 빠져 있었지만, 이 무대를 통해 프리마 돈나라는 타이틀을 지켜낸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의 무대도 한몫했다. 칼라스의 팬들은 티켓을 구하기 위해 며칠간을 기다렸다고 한다. 심지어 침낭과 간이용 의자를 준비한 열성 팬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다큐멘터리(영·독·불·일·한국어/52분)는 '오늘날의 관점'으로 칼라스의 인생과 예술세계를 회고하며 바라다 본다. 칼라스의 영상과 함께 안토니오 파파노(지휘자), 롤란도 비야손(테너), 루퍼스 웨인라이트(싱어송라이터), 토머스 햄슨(바리톤), 볼프강 욥(디자이너), 크리스틴 오폴라이스(소프라노) 등의 인터뷰가 함께 실려 있다.
보너스 트랙은 칼라스가 출연했던 <토스카>의 2막 실황(영·독·불·일·한국어/45분)이다. 무대를 영화세트처럼 활영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오페라하우스를 가득 메운 관객들의 박수소리를 통해 이것이 '한편의 영화 같은 무대'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해설지(13쪽 분량)에는 칼라스에 대한 간략한 아티클(영·불·독)이 수록되어 있다.
=== 인물 정보 === <다음 클래식 백과 / 정주은 글>
마리아 칼라스
(1923 ~ 1977)
그리스 출신의 소프라노. 20세기 최고의 디바로 평가받는다.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 군림하기까지
세기의 디바,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 군림했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또래보다 큰 체구와 목청을 지닌 칼라스는 노래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미국 이민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한 후,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돌아온 칼라스는 가정의 불화로 인한 불안함을 음식과 노래로 달랬다.
1937년, 그녀는 아테네 음악원의 성악 교사였던 마리아 트리벨라(Maria Trivella)를 만나 성악의 기초를 배웠고 열네 살에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차 역으로 처음 오페라 무대에 섰다. 트리벨라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스승 이달고(Elvira de Hidalgo)를 사사하는 동안에는 주페의 오페레타 〈보카치오〉를 통해 국립 리릭 극장의 프로 무대에 진출했고 열일곱 살에는 아테네 오페라단의 평생 단원이 되었다.
1947년 8월 3일, 베르디 아레나에서 칼라스는 〈라 조콘다〉로 이탈리아 데뷔 무대를 가졌다. 연습 도중 넘어져 발목을 삔 그녀는 붕대를 감은 채로 무대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연주를 마쳤다. 그해 겨울, 칼라스는 베로나에서 함께 공연했던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의 소개로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 출연했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푸치니의 〈투란도트〉 두 작품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48년 칼라스는 트리에스테, 제노아, 로마, 피렌체, 투린 등에서 잇달아 연주를 했고 40일 동안의 맹연습 끝에 막을 올린 〈노르마〉를 통해 이전에 없던 최고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후 〈노르마〉는 그녀가 가장 많이 공연하게 되는 레퍼토리이자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49년 4월 21일, 장기간에 걸친 남미 순회공연을 앞두고 칼라스는 사업가 메네기니(Battista Meneghini)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1951년에는 이른바 ‘대세’인 칼라스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던 밀라노에서 출연을 요청해왔다. 칼라스는 1951년 12월 7일,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의 엘레나로 변신해 라 스칼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라이벌이었던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가 떠나고 난 후 비로소 완벽한 밀라노의 안주인이 된 칼라스는 1962년 무대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매 시즌 라 스칼라 무대에 섰다. 1952년 여름에는 세계적인 메이저 음반사인 EMI와 계약을 맺었다. 어마어마한 계약금과 함께 EMI의 독점 아티스트가 된 그녀는 이후 모든 레코딩을 EMI와 함께 한다.
1954년 4월, 칼라스는 1년여에 걸친 혹독한 다이어트 끝에 날씬한 몸으로 무대에 올랐다. 갑작스런 다이어트 때문에 성량이 줄어들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더욱 매끄럽고 풍성한 목소리를 선보였고 유례없는 최고의 대우를 약속받고 뉴욕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섰다.
1958년 12월 19일, 칼라스는 파리에서의 데뷔 공연을 가졌다. 파리 오페라 사상 최고의 티켓 가격을 기록한 이날, 프랑스 대통령 부부를 비롯해 찰리 채플린, 브리짓 바르도, 에드워드와 심슨 부인 부부 같은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고, 이곳에서 선박업을 하는 그리스 출신의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를 만나 연인이 되었다.
영원한 디바, 마리아 칼라스
1960년 이후로 칼라스는 무대에 서는 횟수를 부쩍 줄였다. 1958년 칼라스는 스물여덟 차례 무대에 섰지만 1960년에는 단 일곱 번, 이듬해에는 다섯 번 무대에 섰고, 1963년에는 오페라 무대엔 한 번도 서지 않고 콘서트와 녹음만 했다. 1965년 5월 29일, 파리에서 예정된 〈노르마〉 공연의 마지막 무대에서는 공연 중간에 쓰러졌고, 런던에서는 4회 공연하기로 했던 〈토스카〉를 1회만 공연해야했다.
이후 칼라스는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생애 마지막 활동은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Giuseppe Di Stefano)와 함께 7개월간의 순회 연주를 한 것이다. 1977년 9월 16일 마리아 칼라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에도 그녀는 최고의 디바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리아 칼라스는 미국 ABC 방송에서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100인의 여성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칼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되는 2007년에는 그리스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해’를 선포하고 화려한 기념 공연과 공식 행사를 개최하는 등 세상을 떠난 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전설의 디바를 기억하는 움직임은 계속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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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정보 === <불멸의 목소리 / 유형종 글>
마리아 칼라스
디바, 혹은 사랑을 잃고 죽어가던 새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뽑아올리는 가창 스타일로 소프라노에 대한 미학적 관점을 완전히 바꿔놓은 전대미문의 명가수. 그러나 일찍이 목소리와 사랑을 잃고 은둔 속에서 세상과 이별했다.
2002년 9월 16일은 칼라스 25주기였다. 그런데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도 25주기라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엘비스는 1977년 8월 16일에 세상을 떠났고 '오페라의 여신' 칼라스는 꼭 한 달 후인 9월 16일 파리에서 눈을 감았다. 로큰롤과 오페라! 대중음악과 클래식이라는 점에서 극히 대조적이지만 각각의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어필했던 최고의 거장들이 정확히 한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어딘가 묘한 기분이었다.
칼라스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칼라스의 숭배자들은 매년 9월 16일이 찾아오면 의식을 치르듯 경건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면서 오페라 연주에서 그녀가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였는가를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자 힘을 쏟는다. 그러나 칼라스는 살아 있을 때 누구 못지않게 많은 비난에 휩싸였던 존재이기도 했다. 다소 껄끄럽더라도 그 얘기로 시작하겠다.
암표범 칼라스
아래 소개된 면면을 살펴보면 칼라스가 얼마나 '못되고' '결점이 많은' 여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칼라스에게 아예 질려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을 알아야 그녀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
• 칼라스는 1923년 12월 그리스에서 막 이주한 부부의 둘째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성악 교육은 그리스로 건너가 받았다. 태어날 때부터 굉장히 덩치가 컸는데 자라면서도 절제심이라곤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식욕 때문에 누구나 인정하는 '뚱녀'가 되었다. 오페라 가수로 데뷔할 당시에는 한때 90킬로그램이 훨씬 넘는 체중을 자랑했다고 한다.
• 칼라스가 이탈리아에서 명성을 획득하고 베로나의 부호인 메네기니(Giovanni Meneghini, 1896∼1981)와 결혼하자 모친 에반겔리아(Evangelia Callas)는 그동안 딸을 위해 모든 걸 바쳤으니 경제적으로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에 대한 칼라스의 입장은 이러했다.
엄마로서 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못 하겠으면 낳지도 말았어야지! 게다가 엄마는 아직 젊다.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닌가?
칼라스는 이렇게 모친에게 적대적이었으며 1950년 멕시코 순회 공연에 초대한 것을 마지막으로 죽는 순간까지 다시 만나지 않았다.
• 1955년 시카고 리릭 오페라의 《나비부인》 공연 당시 분장실로 경찰이 찾아와 칼라스가 무명 시절에 계약을 맺었던 바가로지(Bagarozi)라는 사람의 고소장에 대한 법원명령서를 전달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칼라스는 극장 관계자들에게 화풀이를 했는데 그 표독스런 모습이 사진에 잡혀 '암표범 칼라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다음부터 칼라스에게는 '노래는 잘하지만 성질이 고약한 여자'라는 고정 이미지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 칼라스의 큰 스승은 스페인 출신의 명가수로 아테네에서 그녀를 가르친 엘비라 데 이달고(Elvira de Hidalgo, 1898∼1980)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로 진출한 후에는 대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이 오페라의 진정한 히로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모든 음악적인 부분을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칼라스는 어느 순간에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세라핀이 《라 트라비아타》를 녹음하면서 자기가 아닌 안토니에타 스텔라를 기용했다는 것. 그 이후로 칼라스는 오랫동안 아버지뻘인 세라핀과 절연(絶緣)한 상태로 지냈다.
• 함께 출연한 다른 가수들이 자기보다 박수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노르마》를 공연한 마리오 델 모나코가 1막이 끝나고 굉장한 환호를 받자 막간에 그를 걷어찼다는 일화까지 있다. 델 모나코 사건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심지어 칼라스 자신이 직접 천거한 가수라도 자기보다 돋보이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던 일화들은 많은 증언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신년 축하로 이탈리아 대통령 부처와 수많은 명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노르마》가 공연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칼라스는 송년 파티가 열린 사교 클럽에서 당일 새벽까지 즐기다가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칼라스는 공연을 포기하겠다고 우겼지만 결국 무대에 서서 1막을 마치고는 도저히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며 남은 막의 출연을 거부했다. "노래를 하지 않아도 좋다. 대통령이 참석하셨으니 그냥 성의 표시로 대사만 읊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는데도 극장을 떠났다. 이 사건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는데 극장용 뉴스에서는 "칼라스의 연주를 끝까지 들으시려면 리허설에 가세요. 그때는 열심히 한답니다."라고 비꼬기도 했고 심지어 국가원수를 모독했다는 국회의 비난도 있었다.
• 칼라스는 훨씬 연상인 메네기니를 죽이 잘 맞는 남편이면서 아버지, 오빠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이성으로서의 애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오페라 연출가였던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1906∼1976)에게 푹 빠져 지낸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비스콘티는 후일 《베니스의 죽음》을 감독하면서 자기 취향을 뚜렷이 드러냈을 정도로 유명한 동성애자였으므로 칼라스의 애정은 거의 일방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결혼 생활 10년이 지난 1959년,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 1906∼1975)의 호화 요트 크리스티나호에 승선하여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면서 메네기니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리아를 포기하지 않았던 남편을 피하기 위해 결혼하면서 획득한 이탈리아 국적을 버리고 그리스로 바꿨는데, 이로써 그리스 정교식으로 올리지 않은 메네기니와의 혼인은 무효가 되었으며 칼라스에게 모든 걸 바친 메네기니는 처참하게 버림받았다.
• 칼라스의 음성에 대해서도 비난이 많았다. 여자의 노래가 왜 그리 억세냐는 것이다. 고음을 낼 때도 전혀 소리를 아름답게 띄우지 않고 생소리로 질러댄다, 극심한 비브라토가 섞인 귀 따가운 소음일 뿐이며 중음역대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과연 작곡가들이 프리마돈나에게 요구한 목소리가 이런 것이었냐는 등등의 비난이었다.
강철 같은 예술가 '칼라스', 그러나 불행한 여인 '마리아'
그렇다면 칼라스에게 도대체 무엇이 있었기에 이런 약점과 비난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바로 예술가로서의 고집과 집념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런 기질이 있었는데, 히달고를 만나 진정으로 노래에 재미를 붙이면서 불과 한 학기 만에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마스터했을 정도였다.
1949년 초에는 베니스 라 페니체 극장에서 바그너의 《발퀴레》 중 브륀힐데를 부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개막일 전날 세라핀이 급히 호출해 열흘 후 개막하는 벨리니의 《청교도》 주역이 펑크 났으니 이를 맡아달라고 요구했다. 불러본 적도 없었고 정통 벨칸토 역은 처음이었지만 세라핀의 막무가내식 요구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결국 브륀힐데를 공연하면서 며칠 만에 엘비라를 연습하여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이탈리아 전역에 명성이 자자해졌다. 이때부터 칼라스는 무거운 역보다도 벨리니, 도니체티, 베르디 중기 이전의 정통 벨칸토 오페라에 도전했고 묻혀 있던 많은 명작의 진가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칼라스의 근성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은 감량이다. 《로마의 휴일》에 출연한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을 닮기로 작정한 지 1년 만에 30킬로그램 이상 몸무게를 줄이면서 '뚱녀'에서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해버렸다. 이로써 '라 디비나(La Divina, 여신)'라는 찬사 어린 별명은 칼라스에게 완벽하게 어울리게 되었다.
모친, 세라핀, 메네기니를 차례로 버릴 만큼 냉정했던 칼라스의 성격은 어린 시절의 환경에서 나왔다는 분석이 많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에반겔리아는 자식에 대한 애정보다 자기의 불만을 극복하기 위해 마리아를 몰아쳤다는 것이다. 이를 물려받은 칼라스 또한 내면에 불만이 쌓여 항상 누군가와 대결하는 입장에 있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탓을 외부에서 찾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엄격해서 항상 최상의 상태를 추구했다. 연주를 취소한다든지 함께 출연한 가수에게 화를 터뜨린다든지 하는 행동도 알고 보면 완벽주의에서 비롯되는 강박관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칼라스의 음성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그녀를 두고 결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가수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르마》, 《돈 카를로》, 《토스카》 등 프리마돈나의 내면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격렬한 감정을 그대로 뽑아올리는 칼라스만의 음악적 경지를 깨닫게 되면 누구나 그녀의 포로가 되고 만다. 기원전을 뜻하는 'BC'가 오페라로 건너오면 'Before Callas'를 의미한다는 농담이 통할 정도로 칼라스는 오페라에 대한 미적 판단 기준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여주인공이 예쁜 목소리만으로 노래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극적인 진실일 것이고, 칼라스의 특징인 고음의 생소리나 심한 비브라토도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사실적 감동을 더하는 것이다.
전기 작가들은 예술가로서의 '칼라스'와 여인으로서의 '마리아'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여인으로서 마리아에게 비극적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오나시스를 만난 후부터였다. 그녀의 동료였던 모든 사람들은 오나시스야말로 칼라스를 파멸시킨 존재라고 증언했다. 오나시스는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라 '남자'로서 섹스어필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자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메네기니와 정확히 대조적인 존재였다. 오나시스가 칼라스를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더 유명하게 만드는 수단이라는 점 때문에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칼라스와 동거했지만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케네디의 미망인 재키(Jacqueline Kennedy, 1929∼1994)와 결혼했는데, 이것도 칼라스가 오페라의 연인이라면 재키는 '전 세계의 연인'이므로 재키를 차지하는 편이 자기를 더욱 돋보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오페라를 연습하는 것에만 쏟아부었던 칼라스는 전혀 비음악적인 존재였던 오나시스에게 빠져들면서 주의가 산만해졌다. 칼라스의 목소리에 근본적인 문제가 생긴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음악도 사랑도 모두 잃었다. 마리아는 주변 사람들에게 했던 것 이상으로 혹독하게 버림받은 것이다. 오나시스는 재키와의 결혼 이후에도 칼라스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화를 하거나 집 앞에 찾아오는 식으로 괴롭혔다. 이 모든 것이 칼라스에게 더욱 큰 고통이었다.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지자 "즐거운 새만 노래하는 법이에요. 사랑을 잃은 새는 그냥 둥지에 숨어서 죽어버리죠."라고 활기차게 인터뷰하던 그녀는 점점 후자의 길로 빠져들었다.
1965년 7월 코벤트 가든의 《토스카》가 공식적인 마지막 오페라 출연이었고, 8년 만인 1973∼1974년에 주세페 디 스테파노의 권유를 받아들여 마지막 순회 공연에 나섰지만(이때 한국도 포함되었다) 재기 불능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이후 마리아는 마지막 칩거에 들어갔다. 아무리 친한 친구가 전화를 해도 목욕 중이라거나 미용실에 갔다는 핑계로 좀체 연락에 응하지 않았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 잠을 잘 때는 수면제, 깨어 있을 때도 약에 의존해야 했다. 얼마나 지독하게 생의 의욕을 잃어버렸는지 디 스테파노에게 "매일 남아 있는 날들이 짧아져서 좋다."는 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이에 오나시스가 죽고, 칼라스와 영화 《메데아(Medea)》를 만들었던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1975) 감독마저 살해되었다. 마리아에게 두 사람의 죽음은 끔찍한 것이었기에 조용히 자신의 죽음을 기다렸다. 만 54세를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뜬 칼라스의 사인은 그간 과용한 약물이 심장에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시신은 파리에 묻혔고 2년 후 그리스로 옮겨졌다. 딸과 인연이 끊겼던 에반겔리아는 마리아를 화장한 재를 바다에 뿌림으로써 상징적 관계를 회복했다.
칼라스의 예술과 삶을 다룬 책은 이미 수십여 종이 출판되었다. 국내 도서로는 아리아나 스타시노풀로스(Arianna Stassinopoulos)의 『마리아 칼라스: 전설 속에 숨겨진 여인(Maria Callas : The Woman Behind the Legend)』을 주 텍스트로 사용한 고(故) 박준용 선생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가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다. 모든 내용이 진실은 아니겠지만 칼라스의 가족들이 쓴 책도 있다. 1960년에 모친 에반겔리아는 『내 딸 마리아 칼라스(My daughter Maria Callas)』를 냈으며, 첫 남편 메네기니는 1982년 『나의 아내 마리아 칼라스(My Wife Maria Callas)』에서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된 아내를 회상했다. 마리아의 어린 시절 사랑과 질투의 대상이었던 언니 재키는 1989년 『자매들(Sisters ; A Revealing Portrait of the World's Most Famous Diva)』을 썼는데 이 책에는 칼라스의 공식 기록이 부실한 1938년부터 1945년까지 그리스의 초기 공연에 대해 추정 가능한 리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마리아 칼라스 대표 음반
《마리아 칼라스 - 라 디비나》(DVD, EMI)
마리아 칼라스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여러 종류가 존재하지만 10주기(1987)를 맞아 제작된 토니 팔머(Tony Palmer)의 필름이 가장 유명하다. 본문에 언급한 바와 같이 여인으로서의 '마리아'와 소프라노로서의 '칼라스'를 대조하며 긴박감 있게 그녀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고 있다.
《함부르크 1959년, 1962년 공연 실황》(DVD, EMI)
마리아 칼라스의 영상물 중 오페라 전곡은 없다. 만약 발견된다면 굉장한 가치를 지닐 것이지만 약간의 단편만이 전해질 뿐이다. 대신 함부르크 리사이틀, 파리 리사이틀, 런던 리사이틀, 디 스테파노와 함께한 말년의 동경 실황 등이 남아 있다. 이중 1959년과 1962년의 함부르크 리사이틀이 가장 풍부한 레퍼토리를 담고 있다. 이 두 자료가 한 장의 DVD에 묶여 있다. 파리와 런던 실황은 티토 곱비(Tito Gobbi, 1913∼1984)와 공연한 《토스카》 2막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베르디 아리아》 제1집 (EMI)
도니체티와 벨리니의 벨칸토 오페라 부활을 위한 칼라스의 공적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지만 그래도 역시 음악적으로 최고 수준은 역시 베르디를 노래했을 때였다. 특히 《맥베스》의 레이디 맥베스, 《나부코》의 아비가일레, 《돈 카를로》의 엘리자베타 역은 칼라스의 노래로 듣고 나면 다른 가수의 노래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곡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한 음반이다.
푸치니 《토스카》(EMI)
칼라스의 가장 화려한 파트너라면 주세페 디 스테파노, 티토 곱비,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을 들 수 있다. 단 이런 드림팀이 모인 음반은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리골레토》, 《팔리아치》밖에 없다. 반면 《토스카》에서는 디 스테파노, 곱비가 함께 출연했지만 지휘자가 빅토르 데 사바타다. 그럼에도 극의 핵심을 꿰뚫고 있기에 칼라스의 음반 중 가장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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