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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必死)의 대국(對局)
최 상 규
금강석으로 유리를 째는 소리에 노인은 잠이 깨었다. 시계를 보니 세시 이십분. 노인은 자리에 누운 채 꼼짝도 않고 온몸의 신경을 두 귀에 모았다. 쥐소리도 들리지 않는 새벽의 정적. 육중한 빌딩 삼층의 한 구석에 누워 있는 노인의 두 귀를 그것이 벽처럼 두껍게 막고 있었다. 깜빡 잊어버리고 전에 보지 않고 둔 전등불이 노인의 불안과 초조를 대표해서 뎅그런히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눈조차 도로 감아버렸다.
찌르륵!
가느다란 쥐의 비명 같은 소리에 노인의 신경은 바짝 긴장했다. 그 소리는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주기적으로 단속되어나갔다. 그것은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리였다. 틀림없이 그것은 창문의 관건나사가 돌려지는 소리였다. 침입자. 도적! 노인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노인의 몸은 빳빳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마구 가슴이 울렁거렸다. 일순일순 다가오는 위난을 목전에 느끼고 있으면서도 꼼짝도 하지 못하는 노인의 가슴속은 터져버릴 것 같았다.
어두운 복도에 섰던 두 사나이는 열려진 창문을 통하여 훌쩍훌쩍 방 안으로 뛰어넘어 들어갔다.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두 사나이는 방안의 어둠 속에서 피차의 무사함을 우선 확인하였다.
가자!
그들은 발소리를 죽여 문으로 다가갔다. 문짝 밑 방바닥과의 사이, 하얀 한일자 빚으로 하여 방 안엔 불이 켜져 있음올 알 수 있었다. 한 사나이가 외투 주머니 속에서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열쇠 구멍에 끼웠다. 꼭 맞자 그것올 오른편으로 가만히 틀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것은 소리없이 돌아갔다. 그러다가 얄팍한 저항을 받게 되자 그것은 힘을 더했다. 약간의 무게를 들치고 그것이 돌아가면서 잘깍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 전체가 찡 진동하는 것 같은 소리로 그것은 그들의 귀를 놀라게 했다. 싸늘하게 식어내려가는 가슴으로 두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얼굴올 마주보았다.
가자!
한 사나이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노인은 누운 채로 그 모든 것을 귀로 듣고 있었다. 창을 넘어오는 소리. 방바닥으로 내려서는 소리. 고개를 돌리는 소리. 옷과 옷이 부대끼는 소리. 문으로 다가오는 발소리. 주머니를 뛰지는 소리. 얼쇠가 꽂히는 소리. 그것이 돌려지는 소리. 자뭍쇠가 열리는 소리. 그들이 놀라는 소리. 핸들에 손이 닿아 그것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소리…….
노인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듯이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았으나 문에 부딪히는 전등불의 명도(明渡)가 달라지는 것을 보고, 문이 열리기 시작함을 알 수 있었다. 이초에 일 밀리, 삼초에 일 밀리, 흑은 사초에 일 밀리…… 눈에 보이지 않게 그것이 움직이어 안으로 나오다가 옆 기둥과의 사이에 가느다란 일직선의 새까만 틈이 생기는 순간 노인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을 딱 감아버렸다.
키 큰 사나이가 권총올 손에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 새까만 총구와 그의 두 눈이 똑바로 노인을 향하고 있었다. 검은 복면 속에서는 불안정한 호흡이 들락날락하며 고요한 새벽의 시간을 잘라나가고 있었다. 그 뒤로 역시 검은 복면의 키 작은 사나이가 들어섰다.
“자는군.”
“쉬이…….”
키 큰 사나이는 노인에게로 다가오고 키 작은 사나이는 방구석의 금고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금고의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른편으로 네 번 돌리고 36, 왼편으로 두 번 돌리고 84, 다시 오른편으로 두 번 돌리고 16…… 그 자르륵 자르륵 하는 낮은 음향이 온 방 안에 방사되고 그것은 또 그것에 부딪치는 수많은 면(面)에 부딪치어 수없는 방향으로 반사되어나갔다. 그리고 그 수없는 음파들은 또 무수한 면에 부딪히어 또다시 수없는 방향으로 튀겨져나가고 있었다. 키 큰 사나이는 그 모든 소리들을 다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그와 동시에 생겨난 공명(共鳴)음파가 외부의 것과 똑같은 방향 똑같은 수로 튀겨져나가고 반사되고 흡수파고…… 또 그 속의 뇌세포 하나하나 속에서 또 그와 똑같이 공명작용이 일어나고……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그것들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자 두개골 속에 가득 찼던 뇌장이 별안간 호도알처럼 뭉쳐가지고 대그락대그락 굴러다니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는 번쩍 눈을 뜨며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노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핀 후에 금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그 모든 동작을 귀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관자놀이를 향하고 있는 어떤 흉기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권총일지 단도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자기가 눈만 뜨는 때면 그의 생명의 끝장을 짓기 위하여 그것이 달려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열려 있는 두 개의 귀로마나 이 엄청난 사태를 접하고 있을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휘이!
금고 쪽에서 난 가벼운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훌쩍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같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초조와 심려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한 사나이의 부름 소리라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열리질 않아.”
아주 낮게 속삭이는 소리였다.
“다시 한 번 해봐.”
키 큰 사나이의 속삭임이었다.
“세 번 해봤어. 그런데 안 돼.”
“더 해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키 큰 사나이의 속삭임은 핀잔에 가까웠다. 뒤이어 다이얼 돌아가는 소리가 또 나기 시작했다. 자르륵, 자르륵, 자르륵…… 조용한 공간을 통해 전해져오는 그 차분히 가라앉은 금속성의 소리는 노인의 가슴을 꾹꾹 찔러주었다. 그러나 노인의 마음속은 그것으로 해서 뒤엉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들떴던 기포(氣泡)가 추석추석 주저앉듯이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아가는 것이었다.
“안돼!”
또 금고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자식이, 번호를 잊어버린 게 아냐?”
저편으로 향해 말해지는 키 큰 사나이의 목소리는 질타에 가까웠다. 노인은 번쩍 눈을 뜨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때 서 있는 사나이의 몸이 움직여지는 기척을 그는 알아차렸다. 사나이의 콧구멍에서 뿜어져나온 더운 입김으로 해서 흔들려진 공기의 동요가 그의 얼굴에까지 왔다. 사나이는 허리를 굽혀 눈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로 자나 안 자나…… 그러다가 그것이 멀어졌다. 사나이의 발소리가 방바닥에서 났다. 그것이 천천히 금고 쪽으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고 앞에서 멎었다. 노인은 두 눈을 번쩍 떠버리고 말았다.
“안돼?”
키 작은 사나이는 열심히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그 자디잔 눈금 하나하나가 행여 조금이라도 틀릴세라 정확히 맞추면서 일곱 번째의 숫자를 맞추어놓았다. 그리고 손잡이를 잡고 눌렀으나 그것은 꼼짝도 안 했다.
“번호가 틀리는 게 아냐?”
키가 작은 사나이는 금고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번호들을 다시 기억 속에서 정리해보는 것이었다. 36, 84, 16, 62…….
“자식, 그걸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니?”
키 큰 사나이의 말이 키 작은 사나이의 신경을 건드리었다. 키 작은 사나이의 머릿속이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벌컥 성을 내는 표시로 키 큰 사나이의 다리를 팔꿈치로 쳤다. 그리고 너 맡은 일이나 하라고 노인 쪽을 손가락질하며 돌아다보던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주저앉고 말았다. 키 큰 사나이도 엉겁결에 놀라 벌떡 허리를 펴며 뒤를 돌아다본 순간!
자는 줄 알았던 노인이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키 큰 사나이는 앞뒤를 생각할 수 없었다. 노인에게 향한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겨버렸다.
땅 ! 소리와 함께 노인의 무서운 두 눈이 감겨지는 것이 그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총소리도 나지 않고 노인의 두 눈도 감겨지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만이 움직이지 않는 모의권총의 방아쇠의 감촉을 딱딱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아차, 하고 후회한 순간, 그는 제법 큰소리로 외쳤다.
“꼼짝하면 쏜다!”
노인은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의 위협에 눈곱만큼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돌아앉아!”
그러나 노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들 무엇하러 온 사람들이오?”
“입닥치고 돌아앉아! 안 그러면 쏜다!”
움직이지 않는 노인의 얼굴에 조용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게 큰소리를 내지 말아요. 남들이 혹시 들으면 어떡하려고…….”
“돌아앉으라니까…….”
“돌아앉기 싫소.”
노인은 천연덕스럽게 거절하였다. 키 큰 사나이는 바짝 악이 치받혔다.
“뱃가죽에 구멍이 뚫려야 알겠어?”
“하하아, 성급하시군.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좀 들어봐요. 보아 하니 그 속에 들어 있는 줄 알고 들어온 모양인데, 그 속엔 이미 돈은 없오. 잠깐 들어와 있다가 해진 후에 다시 나가버렸소.”
“거짓말 말아. 내일 봉급을 줄 돈인데 어디로 나간단 말이야. 그리고 당신 같은 청소부 영감이 무얼 안다고.”
“그럼 그렇다고 칩시다. 열어보시오.”
“묶어버려!”
키 큰 사나이가 주머니에서 가늘지만 튼튼하게 생긴 끈과 수건을 꺼내 키 작은 사나이에게 던졌다. 키 작은 사나이는 그것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인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노인이 한 손을 번쩍 들었다.
“오지 마시오!”
그들 둘은 한꺼번에 찔끔 놀랐다.
“내 이 왼편 손이 지금 무엇을 만지고 있는지 알기나 하시오?”
노인의 왼손은 야전용 침대 모서리 저편으로 내려가 있어서 그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여기 비상벨의 단추가 있소. 이결 내가 누르는 때엔 어떻게 되는지 짐작하시겠지.”
비상벨.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섣불리 달려들었다가 사실로 거기 그게 있어서 노인이 그것을 누른다면·……·그들은 그 100% 아니면 0의 가능성 앞에서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하면 도망이야 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어차피 당신들이 원하던 돈은 손에 들어오지 않는단 말이야. 당장 나를 쏘아보시오. 나는 죽으면서도 이 단추는 누를 수 있으니까…… 별로 살고 싶은 인생도 아니니, 나야 죽어버린대도 별거 아니지만……여하튼 당신네가 나를 죽인대도 계획이 틀려버리긴 마찬가지야. 잡히게 되면 죄만 가중될 뿐이지.”
“잔말 말고 두 손을 들어라. 말 안 들으면 쏘아버릴 테니.”
“총을 쓴다고? 이 첫새벽의 총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다른 사무실들의 숙직원, 빌딩의 경비원들이 가만히 있을까?”
키 작은 사나이가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자 찰칵 소리를 내고, 재크나이프의 칼날이 펴졌다. 복면과 모자 사이의 두 눈과 함께 그것은 전등불에 서릿발처럼 차디차게 빛났다.
“칼? 결국 나를 죽이겠다는 건가?”
“죽이지 않을 테니 하라는 대로 하란 말이야! 손을 들어!”
“그것도 싫소. 하여튼 당신들이 한 발자국만 움직이면 벨을 누르고 말 테니까……. 골치 아프게 되기 싫거든 당신네들이 내가 하라는 대로 하란 말이야.”
진퇴양난이었다.
뛸까? 벌써 영감은 벨을 누른 것이나 아닐까? ¨
“어떻게 하란 말이오?”
형세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키 큰 사나이가 짐짓 물어본 말이었다. 그러다가 틈만 보이면 달려들어 삐쩍 마른 늙은이를 해치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태연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금고에 손댈 생각을 그만두시오. 그리고 곱게 물러가시오.”
“곱게 물러간다면, 놓아주겠소?”
“그럼. 내가 그걸 원하지 않고, 당신네들이 잡혀가기를 원한다면 벌써 벨을 눌렀지 여태 있겠소? 그리고 벨이 있다는 얘기를 할 필요나 있소? 경찰관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당신네들이 하라는 대로 순순히 응하고 있었으면 됐지…….”
“그런데 왜 누르지 않았소?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대항해서 대드는 거요?”
“대항하는 게 아니지. 당신들의 행위를 곱게 그만두고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지.”
“거짓말이지? 벨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럼 와보시오. 나는 누를 테니까. 그리고 결과를 보면 되지.”
“벨이 있으면 누르지 못할 이유가 없어.”
“조용히 말하라니까, 다른 사무실 숙직원들이 깨면 어떻게 하려고…… 자, 거기 의자에들 앉아요. 내 설명을 해줄 테니, 마음 폭 놓고.”
노인의 어조엔 그들에 대한 악의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의 적이었다. 아무런 개인적인 이유가 없는 다만˙ 그들의 행위를 방해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만의 적. 그러므로 섣불리 노인의 말에 순종할 수는 없었다. 그래 키 큰 사나이는 소리쳤다.
“빨리 말해요.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게 선 채로 듣겠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이유는 간단해. 나는 당신들 젊은이들을 해치고 싶지는 않아. 당신들은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았어. 유리 한 장을 깨뜨린 것밖에는…… 그런데 내가 당신들을 잡혀가게 할 필요가 있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유망한 젊은이들을…….”
키 큰 사나이의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들끓어 올라왔다. 권총 앞에서도 오므라들 줄을 모르는 노인의 우둔성. 그 늙인이의 손끝에 있는지도 모르고 없는지도 모르는 비상벨의 단추 때문에 맥을 못추고 서 있는 자신들. 시간은 가고 있었다. 먼저·그 단추의 유무를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노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냥 뛰어버릴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찬스다. 그런데 놈은 금고문을 열지도 못했다. 열렸기만 하면 돈을 집어넣고 잡히는 순간까지는 뛰어보겠는데…… 그런데 또 지금으로 해서는 그냥 달아날 수조차 없다. 늙은이가 저렇게 지켜보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저놈의 늙은이는…… 늙은이에 대한 중오가 들끓어 올라왔다. 그런데 노인은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용돈이 부족해서 이런 짓을 할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끼니가 간데 없어 이런 짓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위험한 장난들을 시작했소?”
“듣기 싫어요. 이왕 이렇게 된 것, 우리는 나갈 테니까 벨을 누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시오I
“하하아, 그렇게 성급히 굴지 말라니까, 그리고 내 말을 좀 들어요.
늙은 쥐의 말을 들으랬다고…… 내 당신들에게 무슨 흉계는 안 하리다. 또 당신네들이 나가는 걸 방해하지도 않고, 나가고 난 다음에 비상벨을 누르지도 않으리다. 그러나 보시오, 아직 세시 사십분도 못 됐소. 나가서 걸릴 것 없이 여기서 안전하게 좀 더 있다가 통금시간이 해제된 다음에 나가는 게 좋지 않겠소?”
“별놈의 걱정을 다!”
“하하아, 내 말올 좀 들으래도…… 내가 당신들을 해치려면 벌써 이 비상벨을 눌렀지 여태 있었겠소? 이왕 아무 일 없이 끝나버리는 일은 끝까지 무사히 끝내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걸 참말로 몰라주는군.”
그러자 그때, 키 큰 사나이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이 노인은 벌써 비상벨을 눌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경관이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를 잡아두려고 술책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생각이 미치자 그는 일각을 지체할 수 없었다.
뛰자!
그리고 키 작은 사나이를 잡아채는데 키 작은 사나이가 그를 잡았다.
“괜찮아.”
“미련한 자식, 우물쭈물하다가 잡혀가고 싶으냐?”
그러자 노인이 또 말했다.
“안심하라니까. 이 비상벨을 누르면 이 빌딩 안의 각 충에 있는 경보기가 다 울리게 되어 있소. 그리고 동시에 경찰로 자동적으로 신호가 가게 되어 있소……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지 않았오? 그리고 설사 내 이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벌써 당신네들이 창문을 열 때 잠이 깨었고 당신들이 이 방에 들어와서 금고를 열려고 하기 시작한 지가 오분이 넘었는데, 여태까지 신고를 받고 경찰백차가 달려오지 않았을 리가 있소? 원 그렇게 사람을 못 믿어서야 어디 세상 살아나가겠소?”
믿는다.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지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거다. 키 작은 사나이는 복면과 모자챙 사이에 내어놓고 있는 두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가려거든 가시오. 내가 그것까지 막을 의무는 없소. 그러나 그보다는 이 늙은이의 말을 믿고 여기서 한 이십분만 더 있다가 나하고 같이 수위실을 통과하여 안전하게 마음놓고 돌아가는 것이 편할 거요.”
노인은 그때까지도 왼손은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키 큰 사나이의 손에도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건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그것으로는 노인을 위협할 수도 없었고, 노인을 죽일 수도 없었다. 설사 그것이 실탄이 들어 있는 진짜 권총이라고 해도 사나이에겐 노인을 쏘아 죽일 마음은 애당초부터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권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키 작은 사나이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
가지.
키 큰 사나이는 노인을 향하였다.
“우린 그냥 가겠소. 정말로 영감님이 우리의 신상을 염려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얼굴이 뜨거워서도 더 있을 수가 없소.”
노인의 얼굴엔 싱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경계의 빛을 늦추며 침대 모서리에서 손을 빼었다.
“바탕은 착한 사람들이로군…….”
두 복면의 사나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리고 열려진 옆방으로 통하는 문 앞에까지 갔올 때 노인이 또 입을 열었다.
“여보, 젊은이들.”
키 작은 사나이가 흘깃 돌아다보았다.
“고맙단 말 한마디 없소?”
“우리가 무사히 나가고 난 후에 고맙다는 말은 편지로 하지요.”
키 큰 사나이가 말했다.
“뭐 나도 꼭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싶지는 않소. 그러나 당신네들 때문에 이 늙은이의 잠은 설치고 말았소. 이제 또 잠이 오기는 틀렸고 한데…… 내가 한 가지 간단한 청을 한다면 들어주겠소?”
“뭐요?”
“아주 쉬운 일인데…….”
“글세, 그게 뭐냔 말이요!”
“나하고 장기 한 판 둡시다.”
“쳇!”
키 큰 사나이가 기가 막힌 소리를 내었다.
“도대체 이판에 무슨 놈의 장기요, 장기가…….”
“모르는 소리. 그런 때 장기 한 판을 두는 것이 중한 것인 줄 모르고…….”
“안 두겠소.”
키 작은 사나이가 흘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세시 사십오분, 통금해제까지 십오분 남았다.
“두어라!”
그가 키 큰 사나이에게 소근거렸다. ˙
“미친 소리. 그렇게 한가하냐?”
“십오분만 있다가 안전하게 나가자.”
“안전? 누가 안전하다고 그래?”
“하하아.”
이번엔 노인이 말했다.
“역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군. 늙은이는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아. 내가 자네들을 해칠 마음이 없다는 진짜 증거를 보여줄까?”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 캐비닛 뒤에 있는 장기판과 주머니를 가지고 이리로 와요. 그러면 보여줄 테니까.”
두 사나이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다가 키 작은 사나이가 장기판을 캐비닛 뒤에서 꺼냈다. 그리고 장기 주머니도 꺼내들었다. 그리고 키 큰 사나이의 둥을 밀었다. 노인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노인의 앞에 장기판을 놓았다.
“앉으시오, 거기에 걸터앉아요.”
“어서 증거나 보여주시오.”
“그러면 나하고 장기를 한 판 두겠지, 약속할 수 있지요?”
“약속하죠.”
“자, 그럼 우리는 약속을 했소. 내 그럼 보여주리다. 자 여기를 보시오.”
노인은 자신이 아까 손을 넣었던 침대 모서리를 가리켰다.
“아무것도 없소. 비상벨은 여기 없소.”
“그럼 거짓말을 했군요.”
키 큰 사나이가 말하고 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들었다.
“새로 시작이오?”
“맹랑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거짓말을 해서 감쪽같이 우리를 속이고, 우리틀 놓아주는 척…… 우리를 해칠 수도 없는 주제에 우리를 위해주는 하고 키 큰 사나이가 달려들려는 것을 키 작은 사나이가 말렸다.
“거짓말은 했지. 그러나 그 덕에 자네들은 죄를 저지르지 않았어. 그리고 순순히 돌아가려는 자네들이 귀여워서 내 거짓말을 내 입으로 폭로해준 거야. 자, 인제 어떻게 할 텐가. 나하고 장기 한 판을 두고 네시가 지나거든 집으로 돌아가겠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 시작해서 금고 도둑질을 하겠나?”
“해야지, 금고를 열어야지, 얼른 덤벼서 묶어버려!”
“나를 묶어놓고 입을 틀어막고 아무리 해봐야 금고문은 열리지 않아. 어제 오후에 금고 제작소 사람이 왔었지. 번호를 바꿔버렸다네. 그래서 그 번호는 두 사람밖엔 몰라. 그 사람하고 금고 책임자하고…… 그래도 열어보겠나?”
키 큰 사나이는 넋잃은 얼굴을 복면으로 감추고 있었다. 키 작은 사나이는 홀끔 그를 쳐다보고는 노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장기주머니를 풀어 좌르르 판 위에 장기알을 쏟아놓았다.
“둘려나?”
노인은 키 큰 사나이는 내버려두고 키 작은 사나이를 보며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노인은 홍장(漢)을 골라 꺼내 번쩍 들었다가 살며시 판 위 정위치에 놓았다. 그리고 차(車), 포(包), 마(馬), 상(象)을 차례로 끌어다가 배열하기 시작하였다. 키 작은 사나이도 초(楚)궁 이하 말들을 끌어다가 정위치에 나열하였다.
“자 두지. 단 한 판이야.”
노인은 마치 조카나 손주를 데리고 무엇을 시작하는 듯한, 가볍고 허심탄회한 태도로 키 작은 사나이를 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전까지도 권총을 손에 들고 그를 위협하던 키 큰 사나이는 그 방에 침입한 강도가 아니라 새벽 장기판의 일개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눈 아래서 먼저 청의 졸이 쓸렸다. 이어 노인은 반대편의 병을 쓸었다. 청마가 나오고 홍마가 나오고 청포가 가운데로 넘어오자 홍포가 한쪽으로 몰렸다. 키 큰 사나이는 장기판보다도 그들의 얼굴을 더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복면으로 가리운 키 작은 사나이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툭 털어놓은 태도였다. 그것은 다만 장기 한 판을 지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어이가 없었다. 사태가 이렇게 바꾸어질 수가 있는가. 그러나 면전의 사실을 그로선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도 도리없이 금고 강도의 복면을 한 채 장기판 위에 시선을 던졌다.
청은 면포를 했고 홍은 면상을 했다. 각기 계통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판 위에서 치밀한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홍이 졸 하나를 쓸어놓음으로써 정군(整軍)은 끝이 났다. 청이 선수를 쓸 차례였다. 차가 내달렸다. 홍의 포가 뛰며 졸(卒) 하나를 먹어버렸다. 차를 갖다대고 포가 또 뛰고 상이 병과 바뀌고…… 그러다가 먼저 청의 마와 차가 먼저 희생 되면서 또 하나의 차가 홍의 궁(宮)에 육박해 들어갔다. 장군을 피해 궁이 돌아다니는 동안 양사(士)가 날아가고 마와 상등 친위대가 풍지박산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으로서 청의 승리는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다음 전세를 갖추기 위하여 차는 놓아두고 포가 출진하였는데 노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장군 받자!”
장기판이 땅 울리면서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살펴보니 만사휴의였다. 절대절명. 아니, 이미 끝이 나 있었다. 다른 말로 막을 길도 없고 도리없이 궁이 일보 물러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또 홍의 오른편 차가 내달아 외통 장군을 부를 것이었다. 그러면 갈 곳이 없었다.
그때 노인이 말했다.
“어때? 이렇게 되면 승부는 결정되었지?”
키 작은 사나이는 옴짝달싹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노인은 두 손으로 장기말을 딸각거리고 앉아 있다가 탁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이봐요, 젊은이. 이젠 도리없이 최후의 두 가지 길이야. 첫째는 내가 몇 수 물러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네가 손을 드는 일이야. 어떤 쪽을 택하겠나. 마음대로 하게.”
키 작은 사나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커다란 두 눈만이 무섭게 판 위를 쏘아보고 있었다.
“물러줄까?”
젊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르긴 뭘 물러! 인제 그만 집어치우고 가세.”
키 큰 사나이가 말하고 키 작은 사나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가로었다.
“가다니. 구경꾼은 잠자코 구경이나 하라구. 장기는 인제부터가 중요한 거야, 자 어떤 쪽을 택하겠나? 물러줄까?”
노인은 사나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복면에 가리운 사나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두 개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은 채 판 위에 못박혀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설사 젊은이가 나보고 물러달라고 한대도 사실 나는 물러줄 수가 없어. 왜냐하면 내가 지고 마니까. 그렇게 되면 전국(全局)을 다 물러야지. 아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지.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거고…… 무슨 딴 방법이라도 있나?”
사나이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마지막 자리로 궁을 내리게. 최후까지 해야 되는 거야, 바라지는 않아도 기적은 일어날 수가 있으니까.”
사나이는 기어코 궁을 한발 끌어내렸다. 거기가 장기판 땐 가장자리였다.
“좋아. 바로 그거야. 장기란 절대로 물러서는 안 되는 거야. 이것도 사람사는 것처럼 고치며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게 모두 무슨 짓인지 키 큰 사나이는 알 수가 없었다. 키 작은 사나이가 무엇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건지를 우선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또 노인이 말을 꺼냈다.
“인젠 내 차례지. 그러나 나도 한 가지밖엔 둘 것이 없어. 이 차를 갖다가 외통장군을 부블 수밖엔. 그렇지 않으면 단 한 수에 내 궁이 대신 외통수에 걸리고 만단 말이야. 그런데 내 차가 가서 장군을 부르면 자넨 어떻게 하겠나. 자네의 궁은 장기판 밖으로 나가 바다에 빠져죽을 수도 없지? 기껏해야, 저쪽 차로 장군을 한 번 불러나 보는 수밖엔……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통하지 않는 헛소리고…….”
키 작은 사나이는 말이 없었다.
“안 그런가?”
키 작은 사나이는 장기판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게 실전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자네의 궁은 절대로 자살하지도 않고 허풍도 떨지 못하겠지. 궁한 쥐가 고양이를 부는 식으로 달려들겠지. 그래서 목숨이 다하도록 물고 뜯고 덤비겠지?”
“자, 그러니 어서 최후의 사병을 제하십시오.”
키 작은 사나이가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내어 말하였다. 노인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차를 집었다. 그리고 그것을 장기판 밖으로 떨어뜨려버렸다. 사나이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난 이미 말을 버렸어. 난 자네에게 외통장군을 부르지 않겠어. 그 이유는 자네가 잘 알겠지?”
“그럼 인제 내가 두어도 됩니까?”
“두어도 되지. 자, 부를 수 있으면 들어와서 자네도 외통장군을 부르지.”
“불러라, 불러. 무슨 시시한 짓이야, 이게?”
그러나 키 작은 사나이는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대신 노인의 얼굴을 이윽이 쳐다보다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곁에 놓았던 줄과 수건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고 구부러진 두 다리에 입혀진 겨울 내복 가랑이가 쿠렁쿠렁했다. 노인은 침대 아래로 내려와 신을 신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시로군. 내 빌딩 정문까지 데려다주지.”
두 사나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키 큰 사나이만이 노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배군은 여기서 밀려나간 후로 몹시 곤궁해진 게로군. 그러나 나도 살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꼭 이길 장기를 다시 시작해 보게.”
말을 마치고 노인은 앞장을 서서 문간으로 걸어나갔다.
-끝-
2016년 11월 1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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