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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명승 지정 별서정원에 대한 역사성 검토를 마쳤다. 지난해 예천 선몽대 일원을 비롯한 11개소에 이어 올해에는 담양 명옥헌 원림 등 9개소 정원의 만든 이와 소유자, 정원의 변화과정, 정원 명칭의 유래 등을 고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원의 지정가치와 역사성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새롭게 밝혀냈다.
먼저,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 광주 환벽당 원림 3개소에 대해 정원이 만들어진 시기와 초기 형태를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은 중종 21년(1526)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이 바위 위에 지은 청암정(靑巖亭)과 그의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 1518~1592)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석천계곡에 지은 석천정(石泉亭)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 위치한 유곡(酉谷)마을은 1380년 권벌의 선조가 처음 개척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권벌이 중종 15년(1520) 터를 잡은 곳임을 확인하였다. ▲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은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은거하며 억새로 만든 정자를 1872년 재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전시서가 은거했던 곳 서쪽에 그의 후손인 전재택(全在澤) 등이 고종 9년(1872) 새로 세운 정자임을 밝혀냈다. ▲ 광주 환벽당 원림 일원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노년에 후학양성을 위해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 환벽당은 그의 부친 김후(金珝)의 정자를 김윤제가 중수하여 건립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원은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화재나 목부재의 부식 등으로 중수나 중건 등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정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형태뿐만 아니라 이후 정원의 형태나 위치가 변경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정원의 역사성 측면에서 중요하다.
이번에 정원의 초기형태뿐만 아니라 중수나 중건이 새롭게 확인된 사례는 담양 명옥헌 원림과 안동 만휴정 원림, 밀양 월연대 일원, 화순 임대정 원림 4개소다.
▲ 담양 명옥헌 원림을 만든 이는 조선 중기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3~1623)와 그의 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으로 혼용되어 알려져 왔다. 이번 역사성 검토를 통해 오희도가 은거했던 망재(忘齋)라는 이름의 서재 인근에 오이정이 조성한 별서임을 확인하였으며, 이후 영조 25년(1748) 오이정의 손자 오대경(吳大經, 1689∼1761)이 현감 재직 시절 퇴락한 명옥헌을 중수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 안동 만휴정 원림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은거하며 경영한 쌍청헌(雙淸軒) 터에 위치한 정자로, 영조 46년(1770) 동도(東道) 김덕일(金德一, 1734∼1794)이 중수한 사실을 밝혀냈다. ▲ 밀양 월연대 일원은 조선 중종 때 문신 월연(月淵) 이태(李迨, 1483∼1536)가 관직에서 물러나 쌍경당(雙鏡堂)과 월연대(月淵臺)를 조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쌍경당을 숙종 23년(1697)에 중수하고 고종 3년(1866) 이태의 11대손 이종술(李鍾述)이 월연대를 중수했음을 확인하였다. ▲ 화순 임대정 원림은 16세기 후반 고반(考槃) 남언기(南彦紀)가 조성한 고반원(考槃園)의 수륜대(垂綸臺) 옛 터에 철종 13년(1862) 사애(沙厓) 민주현(閔胄顯, 1808∼1882)이 건립한 정자이다. 임대정은 본래 풀이나 갈대 따위로 지붕을 인 정자인 한 칸의 초정(草亭)으로 지어졌으나 시간이 지나 허물어졌고, 민주현의 손자 민대호(閔大鎬, 1860~1932) 등이 1922년 정자를 중수하면서 2칸을 더 짓고 기와를 올려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 현감: 조선 때, 작은 현(縣)의 으뜸 벼슬
한편, 거창 용암정 일원은 중수사실 외에도 별서정원의 명승적 가치를 담은 기록을 추가 확인했다. 용암정(龍巖亭)은 순조 원년(1801) 용암(龍巖)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조부와 부친을 따라 노닐던 용암 위에 세운 정자로, 고종 원년(1864) 증손 임수학(林秀學)이 중수하였다.
* 안의삼동(安義三洞): 조선후기 안의현 일대 화림동(花林洞), 심진동(尋眞洞), 원학동(猿鶴洞)을 아우르는 곳으로 당대 문인들에게 영남 지방 최고의 명승으로 꼽혔음
이외에 강진 백운동 원림은 이담로(李聃老, 1627~?)가 정원을 만든 시기가 명확하지 않았으나,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의 고시(古詩)를 통해 1678년 이전 만들어진 정원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이담로의 6대손인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이 정약용, 초의선사와 교류하며 차(茶)를 만들고 즐긴 기록 등을 통해 국내 차 문화 산실로서의 가치를 추가하였다.
문화재청은 이번 명승 별서정원의 지정가치와 역사성 검토 결과에 따라 고시문과 국가문화유산포털에 게재한 내용을 정정할 계획이다. 또한, 향후 지정되는 명승 및 별서정원에 대해서도 고문헌 고증 등 역사성 검토를 실시하여, 명승으로 지정된 모든 별서정원의 진정성 확립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연번 | 지정명칭 | 기존 지정사유 | 변경 지정사유 | 비고 |
1 | 담양 명옥헌 원림 | ‧ 조선 중기 명곡(明谷) 오희도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아들 오이정이 선친의 뒤를 이어 이곳에 은둔하면서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에 정자를 짓고,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파서 주변에 적송, 배롱나무 등을 심어 가꾼 정원임 ‧ 시냇물이 흘러 한 연못을 채우고 다시 그 물이 아래의 연못으로 흘러가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옥이 부딪히는 것만 같다고 하여 연못 앞에 세워진 정자 이름을 명옥헌(鳴玉軒)이라고 함 ‧ 주위의 산수 경관이 연못에 비치는 모습을 명옥헌에서 내려다보며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하여 자연에 순응한 조상들의 지혜를 잘 반영한 전통원림으로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임 | ‧ 명옥헌(鳴玉軒)은 조선 중기 명곡(明谷) 오희도(吳希道, 1583∼1623)가 은거했던 망재(忘齋) 인근에 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조성한 별서임 ‧ 정자 뒤에 있는 샘물이 울타리를 따라 졸졸 흐르는 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부딪히고 흩어지는 소리와 같다고 하여 명옥헌(鳴玉軒)이라 명명함 ‧ 이후 영조 25년(1748) 오이정의 손자 오대경(吳大經, 1689∼1761)이 현감 재직 시절 퇴락한 명옥헌을 중수하였음 ‧ 담양 명옥헌 원림은 주위의 산수가 연못에 비치는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한 곳으로, 자연을 향유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잘 반영된 원림이자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임 | 조영사실 구체화 중수사실 확인 |
2 |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 | ‧ 거북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청암정(靑巖亭)과 마을 앞을 흐르는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石泉亭)은 유곡마을의 대표경관으로, 주변의 울창한 송림(松林), 계류(溪流), 아름다운 수석(水石) 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명승지임 ‧ 유곡(酉谷)마을은 1380년 충재 권벌의 선조가 처음 개척한 곳으로 마을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 닭실마을이라 부르게 된 곳으로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이 지역을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경승지로 지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문화경승지임 | ‧ 청암정(靑巖亭)은 중종 21년(1526)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이 바위 위에 지은 정자로, 주변에 물을 두르고 돌다리를 놓아 섬과 같은 모습으로 조성하였음 ‧ 석천정(石泉亭)은 권벌의 아들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 1518∼1592)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유곡(酉谷)마을 주변 경관이 빼어난 석천계곡에 지은 것임 ‧ 유곡마을은 권벌이 중종 15년(1520) 터를 잡은 곳으로 마을모양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 닭실마을로 불렸다고 전해짐 ‧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 청암정과 그 일대의 유곡마을을 시냇가의 대표적 주거지로 평가한 바 있음 ‧ 청암정과 석천계곡 일대는 마을의 대표경관으로, 주변의 울창한 송림, 계류, 아름다운 수석 등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뛰어난 명승지임 | 최초 조영자 입향시기 및 주요구성요소 조영시기 확인 |
3 | 안동 만휴정 원림 | ‧ 만휴정은 조선시대의 문신 김계행(金係行)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위해 지은 별서로 ‧ 폭포, 호소, 계류, 산림경관 등이 조화를 이루는 명승지임 | ‧ 만휴정(晩休亭)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이 은거하며 경영한 쌍청헌(雙淸軒) 터에 위치한 정자로, 영조 46년(1770) 동도(東道) 김덕일(金德一, 1734∼1794)이 중수함 ‧ 안동 만휴정 원림은 만휴정과 정자 주변 계곡, 폭포 등의 산림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명승임 | 초기 조영형태 및 중수사실 확인 |
4 |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 | ‧ 거연정(居然亭, 시도유형문화재 제433호)은 조선 중기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이곳에 은거하여 지내면서 억새로 만든 정자를 그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1872년 재건한 것으로, 거연(居然)은 주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 12수 중에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딴 것으로 물과 돌이 어울린 자연에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임 ‧ 거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이 주변의 기묘한 모양의 화강암 반석, 폭이 넓은 골짜기, 흐르는 계곡 물 등과 조화를 이루는 등 동천경관을 대표할 만한 명승지임 ‧ 임헌회(任憲晦, 1811∼1876)는 “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삼동(安義三洞)이 가장 빼어나고, 그중에서도 화림동(花林洞)이 최고이고, 화림동의 명승 중에서 거연정(居然亭)이 단연 으뜸”이라고 거연정 기문에 적고 있음 | ‧ 거연정(居然亭)은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은거했던 곳 서쪽에 그의 후손인 전재택(全在澤) 등이 고종 9년(1872)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임 ‧ 거연(居然)은 주자(朱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 12수」 중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취한 말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정사를 짓고 거처하여 주변의 명승을 소유하였음을 의미함 ‧ 임헌회(任憲晦, 1811∼1876)는 「거연정기(居然亭記)」에서 “대개 영남의 승경 가운데 삼동(三洞: 안의삼동)이 최고이고, 삼동의 승경 가운데 화림동(花林洞)이 최고이며, 화림동의 승경 가운데 이 정자가 최고이다.”라고 하여 거연정의 경관을 높이 평가하였음 ‧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은 주변의 기묘한 화강암 반석, 폭이 넓은 골짜기, 흐르는 계곡물과 조화를 이루는 등 동천경관을 대표할 만한 명승지임 | 최초 건립형태 확인 |
5 | 밀양 월연대 일원 | ‧ 월연정(경남 지방 문화재자료 제243호)은 조선조 중종 때 지조와 청명(淸名)으로 빛나는 월연(月淵) 이태(李迨) 선생이 만년에 관직을 물러나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자연으로 귀의하려는 의지로 조성한 별서임 ‧ 밀양강과 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월연정에서 조망되는 강변 풍경과 보름달이 떴을 때의 월주경(月柱景)이 매우 아름다우며, 바위에 새겨진 암각글씨와 월연대 12경 등 다양한 문화 경관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명승지임 | ‧ 밀양 월연대(月淵臺) 일원은 조선 중종 때 문신 월연(月淵) 이태(李迨, 1483∼1536)가 관직에서 물러나 쌍경당(雙鏡堂)과 월연대(月淵臺)를 조성한 데서 유래함 ‧ 창건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숙종 23년(1697) 쌍경당(雙鏡堂)을 중수하고, 고종 3년(1866) 이태의 11대손 이종술(李鍾述)이 월연대를 중수하였음 ‧ 밀양 월연대 일원은 월연정에서 바라 본 강변의 풍경이 빼어나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월연대 12경 등 다양한 문화경관적 요소를 지닌 명승지임 | 초기 조영형태 및 중수사실 확인 |
6 | 거창 용암정 일원 | ‧ ‘용암정’은 조선 후기 용암(龍巖) 임석형(林碩馨)이 경남 거창군 월성계곡 위천변의 자연경관이 뛰어난 큰 바위에 지은 정자와 위천의 계류, 소, 암반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전통격식을 갖추고 있는 별서이며, 주변 자연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배치된 전통경관과 역사문화 환경이 복합된 자연유산으로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임 | ‧ 용암정(龍巖亭)은 순조 원년(1801) 용암(龍巖) 임석형(林碩馨, 1751∼1816)이 조부와 부친을 따라 노닐던 용암 위에 세운 정자로, 고종 원년(1864) 증손 임수학(林秀學)이 중수함 ‧ 지금의 월성계곡에 해당하는 위천을 따라 독특한 형상의 바위들을 정원 요소로 삼고, 주변의 수려한 경치를 한데 모은 명승임 ‧ 이를 노래한 임석형의 용암팔경 시가 전하고, 이휘준(李彙濬, 1806∼1867)은 안의삼동(安義三洞)의 원학동(猿鶴洞) 가운데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수승대와 함께 용암정 일원을 꼽았음 | 중수사실 및 명승적 가치 기록 확인 |
7 | 화순 임대정 원림 | ‧ 임대정은 조선후기에 민주현(閔胄顯)이 지은 것으로 학 형국의 주변지형을 배경으로 정자를 짓고 그 주변에 인공적 연못을 조성한 대표적인 호남별서의 하나임 ‧ 호남 지방의 평지를 이용한 특성과 함께 자연환경과 인공적 조경이 조화된 별서로서 고유성을 가지고 있고, 원림의 요소가 갖추어진 명승지로 가치가 있음 | ‧ 임대정(臨對亭)은 16세기 후반 고반(考槃) 남언기(南彦紀)가 조성한 고반원(考槃園)의 수륜대(垂綸臺) 옛 터에 철종 13년(1862) 사애(沙厓) 민주현(閔胄顯, 1808∼1882)이 건립한 정자임 ‧ ‘임대(臨對)’라는 명칭은 송나라 시인 증극(曾極, 1019∼1083)이 지은 시 「염계(濂溪)」의 ‘새벽 물가에서 여산을 마주하네(終朝臨水對廬山)’라는 구절에서 취하였음 ‧ 임대정은 본래 한 칸의 초정(草亭)으로 지어졌으나 시간이 지나 허물어졌고, 민주현의 손자 민대호(閔大鎬, 1860~1932) 등이 1922년 정자를 중수하면서 2칸을 더 짓고 기와를 올려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었음 ‧ 화순 임대정 원림은 암반 위에 지은 정자와 상지(上池), 하지(下池), 방지(方池) 3개의 연못 등 원림 요소가 주변의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진 명승지임 | 초기 조영형태 및 중수사실 확인 |
8 | 광주 환벽당 일원 | ‧ 환벽당은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가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有室形) 정자로 가까이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계류가 흐르며 계곡 아래 증암천(甑巖川)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뤄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으며, 특히 이곳은 무등산을 비롯한 원효계곡의 줄기를 따라 자연 풍광이 수려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자주 드나드는 명승지였음 ‧ 환벽당 북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는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증암천 너머에는 송강 정철이 살았던 지실마을이 있으며 환벽당 아래에는 송강과 사촌이 처음 만난 곳이라는 전설이 깃든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쌍송(雙松)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뛰어난 곳임 ‧ 면앙정 송순은 서하당 김성원이 식영정을 건립하여 3년이 지난 뒤 1563년 식영정의 시를 차운하며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고 하면서,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동(증암천) 안에 세 명승 즉, 一洞之三勝이라 말함 ‧ 환벽당은 환벽(環璧)이란 뜻 그대로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시가문학과 관련된 국문학사적인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며, 별서원림으로서 가치가 우수한 호남의 대표적인 누정문화를 보여주는 곳임 ‧ 환벽당이 위치한 곳은 무등산 북능의 능선으로 북봉을 거쳐 꼬막재로 이어지는 여러가지 지맥 중의 하나이며, 사촌 김윤제(1501-1572)가 태어난 충효마을 북쪽 200m지점에 있음. 또한 광주와 담양을 경계로 흐르는 증암천(별칭 : 자미탄)을 사이에 두고 남쪽 무등산에서 북쪽 성산에 이르기까지 산들이 고르게 파노라마 경관을 보여주는 선경을 이루고 있음 ‧ 환벽당 주변에는 사촌 김윤제가 살았던 충효마을과 송강 정철이 살았던 지실마을, 소쇄공 양산보가 살았던 창암촌이 있으며, 이 마을들 주변으로 식영정(息影亭)과 면앙정(俛仰亭), 송강정(松江亭), 은거를 위한 독수정(獨守亭)과 소쇄원(瀟灑園), 환벽당(環碧堂) 등 10여개 정자가 소재해 있어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 문화의 중심지역으로서 가치가 뛰어남 ‧ 환벽당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인후, 김성원, 기대승, 고경명 등이 드나들던 곳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시문과 가사를 지으며 풍류 문화의 극치를 이룬 조선시대 사림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문화적 가치가 뛰어남 ‧ 환벽당의 초기모습은 소세양(1486~1562)이 지은 “환벽당“ 시를 통해서 알 수 있으며,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 1653∼1722)의 『南遊日記』를 통해 그 당시의 원림의 식물상과 조경수종을 짐작할 수 있고, 김성원(1525~1597)의 “서하당유고“ 에 ”성산계류탁열도”등의 그림이 남아있어 인문적 가치가 있음 ‧ 환벽당 관련 시․문은 당대의 일류 문인들로서 임억령, 기대승, 송순, 김인후, 소세양, 정철, 백광훈, 고경명, 권필도, 정홍명, 목장흠, 이은상, 이하곤, 이명한, 김창흡, 조상건, 양경지, 정민하, 서봉령 등 시인묵객의 시가가 전해져 인문학적 가치가 있음. | ‧ 광주 환벽당(環碧堂)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부친 김후(金珝)의 정자를 중수하여 건립한 정자임 ‧ 정자 주변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계류가 흐르고, 계곡 아래 증암천(甑巖川)은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어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렸음 ‧ 증암천 주변에는 송강 정철과 사촌 김윤제가 처음 만난 곳이라 전해지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쌍송(雙松)이 위치함 ‧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은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식영정(息影亭)을 건립하고 3년이 지난 명종 18년(1563) 식영정 시에 차운(次韻)하며 ‘식영정과 환벽당’은 형제의 정자라 하였고,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계곡에 세 곳의 명승(一洞之三勝)으로 꼽았음 ‧ 환벽당은 푸름이 둥근 고리처럼 정자를 둘러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고, 당대 명사들이 드나들며 자연경관을 찬미하며 풍류를 즐긴 시문과 가사 작품이 전하고 있어 사림 문화의 중심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정자임 | 최초 건립형태 확인 |
9 | 강진 백운동 원림 | ‧ 백운동 원림은 이담로(李聃老, 1627∼1701)가 조영한 후 지금껏 보존되어온 전통 원림으로 수많은 선비와 문인들이 조영과 경치에 관하여 예찬한 옛 시와 그림들이 현재까지 잘 남아있음. ‧ 특히 <백운첩>에는 다산 정약용의 <백운동12승사>의 시가 있고 초의선사의 <백운동도>가 그려져 있어 유명함. ‧ 또한, 김창흡, 김창집, 신명규, 임영 등이 원림의 경치를 향유한 기록과 조영자 이담로의 후손들이 경영하여온 기록이 남아있는 등 조경사적(造景史的) 가치가 탁월함 ‧ 월출산을 배경으로 원림을 조영한 유래 및 의도가 명확하게 확인되며, 내원에 화계를 만들어 지형을 자연스럽게 보전하고 계곡물을 상・하 연지에 끌어오는 등 경관처리기법이 우수함. ‧ 식생 등 경관요소를 통하여 선비의 덕목을 높이는 상징성이 돋보이며, 특히 수려한 옥판봉의 지세와 아름다움을 빌려온(借景) 정선대의 경관 등 정약용이 제시한 12곳의 경치가 온전히 남아있는 한국 전통원림의 백미로서 부족함이 없음 ‧ 이곳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문화를 교류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며, 또한 정약용, 초의선사, 이시헌 등이 차를 만들고(製茶) 전해주며 즐겨온 기록이 있는 등 우리나라 차 문화의 산실이 되어온 가치까지 더하고 있음 | ‧ 강진 백운동 원림은 예로부터 이름난 경승지로 1678년 이전 이담로(李聃老, 1627~?)가 조성한 별서임 ‧ 백운동 원림은 후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특히 『백운첩(白雲帖)』에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백운동 12경’ 시와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그린 「백운동도(白雲洞圖)」가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음 ‧ 월출산을 배경으로 원림을 조영한 문헌자료가 다수 확인되고, 유상곡수 시설 도입과 수목 식재 등 경관처리기법이 우수하며, 백운동 12경의 구성요소가 잘 남아 있음 ‧ 많은 선비와 문인들이 원림의 경관을 예찬한 옛 시문과 그림들이 현재까지 잘 남아 있어 조경사적(造景史的) 가치가 탁월함 ‧ 이담로의 6대손인 이시헌(李時憲, 1803∼1860)이 정약용, 초의선사와 교류하며 차를 만들고 즐긴 기록 등이 남아 있어 국내 차 문화의 산실로서 가치를 더하고 있음 | 최초 조영시기 비정 및 주요인물간 교류사실 확인 |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