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질문 감사드립니다.
먼저 불살생계를 빨리어로 살펴보겠습니다.
pāṇatipāt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먼저 빠나띠빠따(pāṇatipātā)는 pāṇa + atipātā로 분해됩니다. 빠나(pāṇa)는 생명(living being), 목숨(life), 유정(being)을 가리킵니다. 출입식념(出入息念)으로 번역되는 아나빠나사띠(ānāpāṇa-sati)에서 보듯이 빠나(pāṇa)의 원래 의미는 숨(breath)인데 이것이 숨을 쉬는 생명체 전체를 지칭하게 된것입니다. 그러면 식물도 숨을 쉬는데 식물도 불살생계에서 말하는 생명의 범주의 경우에 들어가느냐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상좌부 불교의 관점에서 식물은 물질(rūpa)인 생명기능(jīvitindriya)만 있고 식(viññaṇa)이 없기 때문에 윤회하는 중생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기능만 있다고 해서 풀, 나무등을 한 가지 기능만을 가진 생명, 즉 에낀드리야 지와(ekindriya-jīva)라고 합니다. 재가자가 초목을 해치는 것은 계율을 범하는 것이 아니지만 비구의 경우는 「율장(Vinaya)」(IV.34.5)에서 땅을 파헤치거나 씨앗과 초목을 훼손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띠빠따(ātipāta)는 동사 atipāteti(to kill, to destroy)에서 파생된 중성명사로 죽임, 파괴의 뜻입니다. 동사 atipāteti는 또 ati(up to; over) + √pat(to fall)로 분해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빠나띠빠따(pāṇatipātā)는 살생(殺生)의 뜻이 됩니다.
여기서의 식까빠담(sikkhhāpadaṃ)은 식까빠다(sikkhhā-pada)의 목적격(Ac)으로 쓰였습니다. 식까빠다(sikkhhā-pada)는 sikkhhā(공부, 학습) + pada(발걸음)으로 분해되며 불자들이 지녀야할 학습계목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웨라마니(veramaṇī)는 동사 viramati(to abstrain; to refrain; to cease)에서 온 여성명사로 멀리함, 삼감의 뜻입니다.
삼마디야미(samādiyāmi)는 samādāti(to take; to accept)의 사역형 samādiyāti의 일인칭 시제입니다. 그래서“pāṇatipāt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나는 살생을 삼가는 학습계목을 수지하겠습니다.’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영어로는 보통 “I undertake the rule of conduct to abstrain from killing.”이라고 합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불살생계가 성립이 되려면 먼저 다음 네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야 한다고 합니다.
1. 그 생명체가 살아있음을 사전에 인지 하고 있음
2. 그 생명체를 죽이려는 의도(cetanā)
3. 그 생명체를 죽이는 행동
4.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 생명체가 죽음.
만약 이 네 가지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이 안되면 불살생계는 성립이 되지 않으며 당연히 업의 과보도 낳지 않습니다. 즉 고의적이 아닌 실수로 생명체를 죽게 하는 경우는 불살생계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불살생계와 다른 점입니다. 또한 살생은 비단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남이 살생을 하도록 부추키거나, 교사하거나, 그 살생행위를 기뻐하거나 칭찬하는 말만으로도 똑같은 죄가 성립됩니다. 마하시 사야도께서는 심지어 가정주부가 시장에 가서 살아있는 물고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상인에게 잡아달라고 해도 살생의 죄가 성립된다고 하셨습니다.(Mahāsi Sayadaw. Translated by U Aye Maung. Sallekha Sutta: Yangon. Buddha Sāsana Nuggaha Organization. 1981 p.25)
살생으로 인한 과보는「앙구따라 니까야」(A.3:40)에 "살생하고 잔인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거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단명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괴롭힌 자는 병에 시달릴 것이다. 남을 미워한 자는 추악한 몰골을 얻게 되고, 남을 시샘하는 자는 신망이 없을 것이며, 고집센 자는 비천하게 될 것이고, 게으른 자는 무식하게 태어날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자따까」에도 살생의 과보로 고통을 받는 무수한 예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인 생명체의 영적성숙도에 따라 받는 업의 과보도 각기 다르다고 주석서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물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몸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그 죄업의 과보도 커집니다. 그래서 곤충이나 어류등의 수중생물을 죽이는 것보다 개, 소, 코끼리와 같은 육상 고등동물을 죽이는 것이 살생의 죄업이 더 큽니다. 그러한 면에서 부모나 아라한을 죽이는 것은 무간업으로 죽어서 곧바로 지옥에 떨어지는 대죄입니다.
그러면 불살생계와 육식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사실 자기가 죽이지 않은 고기를 먹는게 무슨 죄가 되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대승불교에서는 육식은 간접적인 살생이자 보살도를 실천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보아왔고 특히 중국불교에서는 육식을 엄격히 금해왔습니다만 요즘은 한국스님들도 공공연히 그러한 청규를 지키지 않는 것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의도(cetanā)를 중시하는 불살생계의 이러한 정신을 볼때 육식은 일종의 간접살생이며 불자의 바람직한 식생활은 채식위주의 섭식이 되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상좌부불교에서는 승속을 막론하고 고기를 자유롭게 섭취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요즘 상좌부 불교내에서도 갈수록 육식을 줄이고 있으며 채식만 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말이 조금 다른데로 빠졌는데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자신의 언행으로 본의 아니게 남에게 정신적 상처를 주는 경우는 살생이 성립되는 위의 네 가지 조건에 어느 하나도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불살생계가 되지 않습니다. 계(sila)라는 것은 밖으로 강하게 표출되는 증오, 성냄, 악의등의 거친 번뇌를 조복하려는 데 있습니다. 물론 계만 잘지켜서는 마음속에 잠복한 중간단계와 미세한 번뇌는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아 각각 중간 단계의 번뇌와 미세한 번뇌를 제거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애, 연민, 더불어 기뻐함, 평온의 사무량심을 닦아서 성냄, 악의, 증오와 같은 불선법을 제거할수 있습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성인의 세 번째 단계인 아나함과를 얻어서야 비로소 적의(patigha)와 감각적 욕망(kama-raga), 그리고 성냄(dosa)에 뿌리박은 두 가지 마음을 완전히 제거할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해탈을 실현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불선법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남의 마음에 못을 박은 것에 대해 너무 자책이나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계(戒)를 잘 지켜서 이를 기반으로 정(定)을 얻고 궁극에는 혜(慧)를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이며 재가자의 경우는 생활속에서 오계만 엄격히 준수해나간다면 절대로 도에서 퇴보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제대로 답변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첫댓글 수카또야 <Q & A> 게시판에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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