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장편소설 고등어(2021.6.27.)
한때 넉넉한 바다를 익명으로 떠돌 적에 아직 그것은 등이 푸른 자유였다.
웅진출판 1995년(초판 39쇄 발행)
1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그 전화가 걸려온 날 오후 명우는 부천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딸아이 명지와 하루를 놀아 주고 오는 길이었다.
2 가을비 내리는 저녁의 해후
처음 그 카페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은림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제일 처음에 든 생각은 그가 방 창가에 서서 우물거리며 떨고 있는 사이에 은림이 가 버린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3 그 여자의 남편, 그의 연인
비는 그날 밤 내내 추적거리며 내렸고 다음 날 오후가 다 되어서야 그쳤다. 명우는 술에 취해 잠이 든 그 밤 내내, 창을 덜컹이는 바람소리와 작은 손으로 애타게 창을 두드리는 듯한 빗소리를 들었다. 잠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인 가수면 상태가 새벽까지 계속된 것 같았다. 그리고 회색빛으로 희뿌옇게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그는 그 비가 그칠 무렵 깨어났다.
4 노은림이라는 여자를 아십니까?
그는 편의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잔뜩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매장 안은 훈훈했지만 피곤한 그는 그 따뜻함에는 눈꺼풀이 아파왔다., 어젯밤에서야 겨우 원고를 맞추어 주느라 거의 밤을 샜기 때문이었다.
5 안개, 자욱한 안개의 거리
우린 교통사고를 당한 줄만 알았어요. 길거리에서 발견한 택시 운전사가 경찰서로 데리고 갔고 경찰서에서 이리로 왔으니 말이에요. 외상은 없기에 머리를 다쳤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호주머니에서 약이 나왔어요. 보니까 결핵약이더군요. 피라지나마이드 들은 거 보니까 상태가 좋은 건 아닌 거 같구.
6 황량한 추억의 시간들
그는 커피 전용 스푼으로 가득가득 커피를 붓고 물을 부었다. 언제나 아침이면 우선 음악을 틀고 그리고 갈아 놓은 커피를 끓이는 게 그의 일과였다. 책으로 빽빽한 오피스텔에 퍼지는 커피 향기를 맡으며 그는 담배를 피워물었고 그러면 출근이 따로 없는 그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7 세 여자
무슨 말을 꺼냈는지 은림이 오랜만에 활짝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런 은림의 눈이 명우의 깊은 눈길과 마주쳤다. 명우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경의 목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연숙은 명우 대신 은림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세 여자 중에서 가장 당황한 은림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들이마시는 은림의 숨소리가 훅, 하고 풍길 정도였다.
8 기억 속에서 무너지는 나날들
싸늘한 바람이 더운 뺨에 와서 부딪칠 때마다 코끝이 싸아했다. 벌써 한기가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그는 귤을 쌓아 놓은 리어카 앞에 서 있었다. 아직 귤이 나오기는 이른 계절이라서였을가, 노란 귤 껍질에는 군데군데 푸른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9 지금의 나는 생각하지, 한때 나는 왜 인간이었을까
호랑이?
그래 임마, 호랑이... 이렇게 말했어. 내가 하도 엉뚱해서 외워 두었는데 말이야. 그래, 뭐 예전엔 호랑이가 왜 됐나 그랬는데 요즘은 내가 왜 인간이었나 한다나 어쩐다나? 그것도 밤 세시에. 내가 처음에 웬 미친놈인가 해서 끊어 버리려고 했는게 가만히 들어 보니까 이게 어디서 들어보던 목소리야. 명우 네놈일 줄 생각이나 했었겠냐? 기가 막혀서, 네놈 전화번호 알아내는 데 장장 보름이나 걸렸다. 자 받아라.
10 잃어버린 세대
남자는 아직 자고 있다. 남자는 출판사의 기획일을 하고 있으므로 꼭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할 필요는 없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부인은 이미 출근을 하고 남자가 잠든 방 밖, 봄볕 내리쬐는 시멘트 마당에 늦은 봄날의 햇빛이 하얗게 튀어오른다. 그 마당 한켠에서 그의 다섯 살 된 딸아이가 소꿉을 살고 있다. 딸아이 또래쯤 되는 주인집 아이가 그 옆에서 아이와 함께 놀고 있다.
11 또 다른 이별의 시작
우리 엄마는 좀철이 없어요. 명우 씨도 알지요? 여진이 걘 더 하구요. 승명이는 어차피 막내기까 그냥 당구치는 얘기나 뭐 그런 이야기나 하면 좋아할 거구, 그래요 절대로 굳을 거 없다구요. 그냥 묻는 말에 대답만 하구 엄마가 차린 식사 맛있는 듯이 먹구 그러면 돼요. 그리고 엄마하구 여진이한테 명우씨가 자유기고가라고 말했어요. 지금은 여러 군데 기고를 하고 있다구, 하지만 곧, 소설을 쓸 거라구.
12 가을이 떠난 자리엔 바람이 밀려오고
은림은 아까부터 창 밖으로 시선을 빼앗긴 채였다. 이미 추수가 끝나고 나뭇잎은 다 져 버려서 온 산과 들은 황량했다. 어디선가 짚을 태우는 연기가 훠이훠이 하늘로 오르고 건너편 방죽에 매어 놓은 검은 아기 염소들이 풀을 뜯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고 매에에, 울었다. 가을이 갔지만 겨울이 아직 오지 않은 들판은 고요했고 가끔씩 마른 옥수숫대를 흔들며 바람만 훼에엥 지나가고 있었다.
13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
하늘은 낮게 내려와 있었다. 그 낮은 하늘 아래로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아마도 성모상 앞을 지나는 이들이 신심 깊은 두 손을 모아 경건하게 삼종기도를 바칠지도 모른다. 명우는 병실 비상구 계단 한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이리로 걸어 내려오고 있다.
작가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