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자 수필 문득.729 ---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
최영 장군(1316~1388)은 홍성 홍북면 노은의 닭제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닭의 벼슬은 문(文), 발톱은 무(武), 용감히 싸우는 것은 용(勇), ‘꼭꼭’ 거리며 병아리를 부르는 것은 인(仁), 규칙적으로 새벽을 알려주는 것은 신(信)이라고 하여, 다섯 가지의 덕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최영 장군은 고려 사람이요, 성삼문 선생은 조선 사람이지만 불과 102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동네 앞뒷집에서 태어나 관심을 끄는 화제의 마을로 길지라고 할 만하다. 굳이 풍수지리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도 최근에는 산 너머 이웃에 내포신도시가 생겨나 충남도청까지 옮겨왔으니 이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최영 장군은 위화도회군 때부터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고려의 역적인 이성계에게 밀리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성삼문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단종의 역적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같은 홍성 출신인 김좌진 장군은 국가 간의 철천지원수인 일본을 상대로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맹활약을 하였으며, 한용운 선생은 같은 시기에 스님으로 3.1독립운동을 주도한 분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혁명으로 그 당위성을 인정받았으며, 최영 장군은 장군대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수양대군은 세조로서 나름대로 후대에 논란 속에도 인정받은 셈이고, 성삼문의 절의 또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산 너머에 용봉산이 있다. 최영은 장군봉에서 활 쏘고 말달리며 무예를 단련하였다. 자신이 쏜 화살보다 말이 느리다고 애마를 단숨에 칼로 내쳐 묻었다는 말무덤까지 전해온다. 돌밭에서 훈련한 탓인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남겼다. 검은 유혹에 빠져들었다가 본인은 물론 패가망신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지나친 욕심이 부른 화근이라 할 것이다. 내 것이 아니면 돈 보기를 종잇장처럼 해야 한다. 은행원이 눈앞의 돈에 현혹되면 어찌 될까? 수백 년이 흘렀어도 최영 장군의 그 한마디는 영원불변의 진리로 번뜩인다. 그분의 손녀사위가 세종 때 청백리인 아산 출신의 고불 맹사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