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왕국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한 결과는 매우 처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유다 백성의 처참한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11절부터 18절은 구구절절이 유다 백성이 겪는 고통과 아픔과 처절한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패전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여자들이 겪는 고통과 수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11절).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과 장로들도 바벨론에 의해 손이 묶여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수치와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12절). 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진다는 13절의 표현은 청년들과 아이들도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노인들은 성문에 앉아 마을의 대소사(大小事)를 나누었고, 청년들은 그 젊은 시절에 노래를 부르며 즐거움을 누렸는데, 이젠 그런 것조차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14절). 이제는 기쁨이 슬픔으로 변하였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은 떨어져내렸고, 심신(心身)은 피곤하여 눈앞이 캄캄해졌으며, 영광스러워야 할 시온에는 여우들이 득실거리는 황량한 곳이 되었다고 토로(吐露)합니다(15절~18절). 사무엘상 4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이 패배하면서 언약궤를 빼앗기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고, 엘리 제사장까지 죽은 후에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하며 비느하스의 아내가 자기의 아들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던 것이 생각합니다. 이가봇은 이카봇( אִֽי־ כָבוֹד֙, Ichabod)이란 말인데, 영광(카보드, כָבוֹד֙)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남왕국 유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처참하고 참혹한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좌절하며 한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미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다는 것을 고백하였었는데(렘 3:22),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히 영광의 보좌에 계실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19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히 잊지 않고 구원의 기회를 달라고 간구합니다(20절, 21절). 유다(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21절). 하나님께서 섭리(攝理)하셔서 유다(이스라엘) 백성이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의지하며 이스라엘(유다)의 회복을 간구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라는 22절의 말씀은 새번역 성경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습니까? 우리에게서 진노를 풀지 않으시렵니까?”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이스라엘) 백성을 버렸다는 단정(斷定)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하나님께 “우리를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시지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계속 품고 있으실 것은 아니지요?”라고 여쭙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고, 언젠가 그 진노를 푸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다”라는 예레미야의 마음을 담은 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긴 세월이 지난 이후에 이스라엘(유다) 백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고, 이러한 은혜는 이스라엘(유다) 백성의 애씀과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 섭리하셔서 이루신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처참한 결말밖에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 처참함 속에서 눈물과 함께 울부짖기 전에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님의 인자와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말씀 안에 살아가는 성실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힘주시옵소서. (안창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