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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체험담
프라 아짠1) 차는 1918년 1월 17일, 태국 북동부의 시골마을인 우본 라
자다니의 유복한 대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사미계를 받은 그는 20세가 되던 해(1939년 4월 26일)에
비구계를 받고 정식 비구가 되어 기본적인 경·율·논을 공부했다.
그러나 비구가 된 지 5년 뒤 부친이 중환으로 별세하자 삶의 무상을
절감하게 되었고, 경전공부만으로는 생사해탈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는 선원을 떠나 숲 속 두타행(하루 한끼로 눕지않고 수행하는 고행 苦
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지역 숲 속의 여러 스승들(숲 속에서
은둔하며 두타행의 전통을 따르는)을 찾아가 사사한 후, 수년간 두타
승으로 떠돌면서 숲이나 동굴, 화장터 등에서 용맹정진하던 스님은 급
기야 아짠 문(Ajahn Mun) 선사(금세기 태국에서 가장 탁월한 선지식들
중 한 분으로 추앙받는)의 문하에서 지도받기에 이르렀다. 비록 그 기
간은 짧았지만 많은 깨달음을 얻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 후 스님은 다시 만행길에 올라,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결코
수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정글이나 공동묘지에서
죽음을 관하며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장마철 폭우에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용맹정진을 이어나갔다. 때로는 몸이 아프기도 하고 갖가지
1) 譯註 : 프라(phra)는 태국어로 ‘큰스님’을 뜻하며, 아짠(ajahn)은 스승을 의미 하는
빨리어 아짜리야(ācariya)에서 온 태국어이다.
회의에 시달리며 몇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기도 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
으로 수행의 강도를 더해 갔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았고, 오직 불법을 위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던졌다. 이같은 강인한
정신력과 대담한 용기에 힘입어 이윽고 지혜와 활력이 생겨났고 남을
도울 수 있는 무한한 능력도 체득하게 되었다.
1954년, 스님은 여러 해에 걸친 기나긴 행각(行脚)과 수행 끝에 고향
으로 돌아와 근처 울창한 숲 속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숲은 사람이
살지 않고 코브라나 호랑이, 유령이 나타난다고 소문난 곳이어서 숲 속
운둔수행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아짠 차 스님이 그 곳에 자리를
잡자,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문하에 머물며 수행하기를 원하는 승려
들과 일반 신도들이 계속 몰려 들게 되어 사원이 형성되었고 대가람
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처럼 초창기에는 단지 초가 몇 채로 시작된 왓 빠 뽕(Wat Pah
Pong:‘왓’은 ‘사원’을 뜻하는 태국어 - 옮긴이)은 오늘날 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운영도 잘되는 사원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짠 차 스님의 법력과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방문객과 귀의자들이
나날이 늘어났고, 특히 스님의 단순 명료하면서도 심오한 가르침에 매료
된 서구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세
워진 분원이 태국 전역과 서구에 걸쳐 50여 개에 이르게 되었고, 스
님에게 수학한 제자들이 원장을 맡아 가르침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분원들 중 하나인 왓 빠 나나짜뜨(Wat Pah Nanachat)는 왓 빠 뽕 가
까이에 세워져 스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서구인들과 그 밖의 외
국인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아짠 차 스님의 서구인 제자들이 많이 배출됨에 따라 스님의 가르침은
서구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중 스님의 상수제자인 수메도
(Sumedho) 스님(서구의 분원 중 가장 큰, 영국 치터스트의 분원장)은
많은 서구인 승려들을 배출해 냈다.
왓 빠 뽕 같은 숲속사원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수행의 기운에 휩싸이게
된다. 나무들이 살랑대는 소리가 유독 도드라질 만큼 고요하고 정결한
경내에는 경행이나 울력을 하는 수행자들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
이고 있다. 경내 넓이는 백 에이커가 넘고 비구 구역과 비구니 구역으
로 나누어져 있다. 사원의 중앙에는 대강당과 공양처, 수계식을 베푸는
법당이 있고, 숲 속 공터에는 승려들의 거처인, 아무 장식도 없는 검소
한 막사(원두막 같은 집으로 작은 방 하나에 샤워가 가능한 조그만 화장실
이 딸려 있는데, 승려들에게 한 채씩 배정된다 - 옮긴이)들이 자리잡
고 있다. 막사들 사이 나무 밑으로는 한적한 오솔길들이 나 있는 등, 사
원 전체에서 간소하고 절제된 분위기가 느껴진다. 입구에 들어서면 우
물에서 물을 긷는 승려들과 마주치게 되며 다음과 같은 푯말이 눈에 띈
다. “드디어 찾아오셨군요. 조용히 해 주십시오! 지금 수행중입니다.”
이 사원에서 살고 있는 승려들은 두타행(dhutanga)이라는 지극히 간
소하고 엄격한 수행법에 따라 살기로 작심한 이들이다. 이 수행법은 붓
다 재세 시 숲속수행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붓다께서는 수행승들의 의
식주에 제한을 두는 13가지 계율을 제정하여 엄수토록 하셨다. 이러한
생활방식의 핵심은, 적게 소유하고 많이 수행하고 하루 한 차례 탁발
하는 것이다.
왓 빠 뽕의 하루 일과는, 그룹명상과 하루 두 차례의 대중정진(독송),
아짠 차 스님의 저녁 설법 등으로 이어지며, 아짠 차 스님과의 면담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정작 수행의 정수는 생활 속에서 체득된다.
승려들은 손수 가사를 기우거나 염색하고 대부분의 생필품들을 직접
만들며 사원 청소도 도맡아 한다. 또한 식사는 하루 한 끼, 탁발 공양
으로 해결하고 소지품과 가사, 거주지를 제한하는 엄격한 계율을 준수
해야 한다. 그들은 숲 속에 분산되어 있는 각자의 막사에 홀로 머물며
명상수행을 하고, 나무들 사이로 난 깨끗이 청소된 오솔길을 따라 경행을
하며 스스로를 정화시켜 나간다. 이처럼 공동체를 조화롭게 유지시키는
계율들을 엄수하게 되면, 이러한 생활방식이 각자가 지닌 욕망이나
망상과 어떻게 상충(相衝)하는지를 명백히 감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엄격한 훈련을 통해 개인의 이기적 욕구를 제거해 나갈 수 있다. 따라서
사원 내의 일상생활도 정규수행 못지 않게 중요시 되는 것이다.
아짠 차 스님은 어떤 특별한 수행 테크닉을 강조하지 않는다. 깨달음과
지혜를 빨리 달성할 수 있는 어떤 충격적 방법도 장려하지 않는다. 단지
정규적인 좌선수행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호흡을 주시하고
몸과 마음의 현상을 관찰해 나가도록 한다.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살라. 그리고 마음을 관찰하라.” 이것이 스님
의 수행법의 키워드(key word)인 셈이다. 때문에 스님은 깊은 지혜나
깨달음의 경험에도 집착하지 말고 단지 순간순간 집착을 제거해 나가
고(苦)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것을 늘 강조한다. “모든 수행은 단지
마음의 균형과 무집착, 비이기성을 계발하는 일일 뿐이므로, 명상수행
이든 일상생활이든 모든 것이 수행이다. 따라서 무엇을 하든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끈기있게 관찰해 나가면 저절로 지혜와 평화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같이 단도직입적이고 소탈한 스님의 가르침은 맑고 쾌활하며 솔직한
스님의 성품과 어우러져, 사람들에게 영감과 탐구심, 깊은 평화로움과 경
탄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이같은 독특한 스타일이 오해를 낳기도 하지
만, 거듭 스님의 가르침을 접하다 보면 마음이 보다 원숙해짐을감지하게
되어 마음 깊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된다. 특히 때와 장소, 그리고 청중
들의 이해력과 감성에 맞춰 자유자재로 구사되는 스님의 노련한 설법기
술은 감탄을 자아낸다. 이로 인해 스님의 가르침이 얼핏 논리적으로 일
관성이 없고 모순되게 느껴질 때도 있으나, 그 또한 깊고 풍부한 삶의 연
륜에서 우러나오는 가르침이 지닌 특성임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마찬
가지로, 스님의 단순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인 가르침들이 간혹 불교의 전
통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보일지라도, 실수행을 이야기할 뿐, 이론을 논
하지 않는 스님 특유의 심오한 수행철학과 풍부한 수행체험에서 기인하
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아짠 차 스님은, 만물의 세 가지 특성[三法印]인 무상·고·무아를 간
파하여 버림[捨]과 인내와 올바른 지혜로써 번뇌를 제거하고 단련시켜 마
음과 세계의 참다운 본성을 깨우치라고 촉구한다. 지금 바로 시작하라고!
이처럼 생애 자체가 하나의 고결한 설법이었던 대선사 아짠 차 스님은
1991년, 많은 이들의 깊은 애도 속에 적멸에 들었다.
아짠차의 깨달음, 세차례의 대(大)폭발
출가한 지 3년 정도 지나자 삼매와 깨달음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났다.
기필코 깨닫고자 하는 일념으로 쉬지 않고 정진했다.
그러나 조급함으로 마음이 한없이 산란스러워져 발버둥치던 끝에 삼매도
호흡과 같은 이치임을 터득하게 되었다. 자연스런 호흡을 통해서만
이 삼매로 나아갈 수 있다. 억지로 애쓰면 단지 집착만 더할 뿐이다.
정견(正見)2)에 의지해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자 수행이 점점 더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감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들이야말로 수행의 장애물임을 분명히 간파하게 되자, 좀더
진솔하게 마음의 현상들이 일어나는 대로 그 요소들을 관찰해 나가기
시작했다. 앉고 들여다보고, 앉고 들여다보기를 한없이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 고대하던 순간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날
나는 하루의 수행을 끝내고 밤 11시도 넘은 시간에 홀로 경행을 하고
있었다. 내겐 거의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머물던 곳은
숲 속의 한 사원이었는데, 때마침 마을에서 열리고 있던 축제의 소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2)譯註 : 정견은 괴로움[苦], 괴로움의 원인[集], 괴로움의 소멸[滅], 깨달음에 이르는
길[道]을 아는 것으로, 오온(형상·감각·인식·의지작용·의식)이 생멸하는 원인,
인과의 연기를 아는 것이다. 오온과 아는 마음인 지혜를 구분하는 것이 견의 시작이
고, 오온에서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제거한 열반의 마음을 실현하는 것이 정견의
완성이다. 이것의 실천이 위빠싸나이다.
경행으로 다소 피곤을 느낀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좌선 자리에
앉으려 하자 왠지 여느 때처럼 결가부좌를 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깊은 선정에 들기를 원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좌선에 들자 참으로 평온해졌다. 마을에서 소음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마음을 조절하면 그 소리를 듣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시켜 소리 쪽으로 돌리면 소리가 들렸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가 다가오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주체를 알아
보았고, 그 주체는 소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니면 무엇
이겠는가?
여기 있는 발우와 주전자가 별개이듯이, 나의 마음과 마음의 대상도
전혀 별개임을 알 수 있었다. 마음과 소리는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관찰해 나갔고, 결국 나는 깨달았다! 무엇이 주관과 객관을
함께 부여잡고 있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관계가 끊어져
버리자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드러났다.
그때 내 마음은 다른 어떤 쪽으로도 분산되지 않았다. 좌선을 마치고자
했다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마칠 때면 자신이
게으름을 피우는 게 아닌가, 피곤한가, 마음이 산란한가 등을 점검해
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때 나의 마음에는 게으름이나 싫증, 산란함
이라곤 없었고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충족된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다.
휴식하기 위해 좌선을 중단했을 때, 가부좌를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여전히 부동상태였다. 자리에 눕는 순간에도 마음은 눕기
전과 마찬가지로 평온했다.
그런데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돌연 마음이 안쪽으로 향하는 ‘전환’이
일어났다. 어디쯤에서 그런 전환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마치
스위치가 켜져 전기가 들어올 때처럼 내부에서 놀라운 전환이 일어났고
동시에 나의 몸은 굉음을 내며 폭발해 버렸다. 알아차림은 최대한도로
성성했다.
그 전환의 지점을 지나 마음은 계속 나아갔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혀 없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고, 닿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알아차림은 안에서 잠시 중단되었다. 이윽고 마음은 다시 밖으로 빠져
나왔다. 내가 의도적으로 나오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관찰자,
즉 ‘아는 자’에 불과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자 다시 평상의 상태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스스로 의문이 솟구쳤다.
그러자 ‘단지 일어난 그대로일 뿐,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자답이 떠
올랐다. 단지 그게 전부였고, 나의 마음은 그 모든 것을 일어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잠시 멈춘 후에 마음은 다시 안으로 향했다.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움직여졌다.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전환이 일어났다. 나의
몸은 다시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었고 마음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려 이윽고 고요해졌다 ….
그렇게 원하는 만큼 안에서 머문 다음, 밖으로 빠져 나오자 다시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그 과정 내내 마음은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결코 나 자신이 마음을 의도적으로 오고 가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알아차리고 관찰했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여전히 좌선을 이어 가면서 관찰해 나갔다.
세 번째로 마음이 안으로 들어가자, 급기야 온 세상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땅이며 풀, 나무, 산, 사람 등 일체가 허공이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상태 속에서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문 후, 마음은 밖으로 빠져 나와
다시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마음이 안에서 어떻게 머물고 있었는지를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이러한 체험은 눈으로 보거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이같은 체험과는 비교될 수 없다. 이 세 차례의
경이로운 체험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어느 누가 감히 설명
할 수 있겠는가? 대체 이런 현상을 무엇이라고 명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같은 체험을 통해 알아차린 ‘마음의 본성’이란 것은 본디 언어로 표현
되기 어려운 것인 만큼, 그것에 관해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마음의
요소[心所]나 의식[心]의 범주에 관해 반드시 말로 옮겨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확고부동한 불퇴전의 신심을 지니고 수행했고, 목숨까지 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지식과 이해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누군가 그런 나를 보았다면 미친 사람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마음챙김을 강력하게 단련시키지 못했다면 미쳐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천지에 전과 다름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작 변해 버린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형적
으로는) 나는 여전히 동일 인물이었다.
그 후로는 모든 사람들이 한 쪽으로 의견을 몰아간다 해도, 나만의
견해를 견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미 남들과는 다른 궤도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내 마음이 절정의 위력을 발휘했을 때, 그 원동력이 되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정신에너지, 즉 선정에서 얻어진 에너지였다. 다시 말해, 그날의
나의 체험은 삼매력이 받쳐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삼매[定]가 그 정도의 수준에 달하면 위빠싸나[慧]는 저절로 흘러나
온다.
이와 같이 수련한다면 그대들 역시 오래지 않아 ‘도달하게’될 것이다.
벗들이여, 왜 한번 시도해 보지 않는가?
저쪽 기슭으로 타고 갈 배가 당도해 있는데, 왜 뛰어들지 않는가? 어찌
하여 오염된 진창구덩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가?
그대들이 원하기만 하면 나는 언제든 노를 저어 줄 수 있다.
오늘도 나는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다 ….
수행법문 ‘ 붓도 ’ 염송과 호흡관찰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주시하십시오. 설사 다른 이들이
물구나무를 서더라도 그것은 그들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직
.........책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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