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근 예약판매가 시작된 로보트 태권브이의‘풀 액션 피규어’. 키 20㎝ 의 이 모형은 팔, 다리, 관절의 위치를 모두 바 꿀 수 있어 120도 발차 기를 하는 태권도 동작 을 구현할 수 있다./네오스톰엔터테인먼트 제공
출현한 지 33년이 지난 태권브이가 새 장난감으로 출시된 이유는 뭘까? 미국 영화 '트랜스포머'를 연상케 하는 새로운 실사(實寫) 영화 '로보트 태권브이'(가제)가 내년 여름 개봉을 앞두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은행나무 침대' '엽기적인 그녀' 등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히트작들을 만들었던 신철 ㈜로보트태권브이 대표가 제작을 맡고 '세븐 데이즈'의 원신연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제작비 150억원이 투입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세월이 흘러 이제 중년 가장이 된 옛 태권브이의 조종사 '훈이'다.
1976년 7월 24일 개봉한 뒤 어린이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김청기 감독의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브이'는 21세기에 들어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걸어 왔다. 2002년에는 김형배 화백이 그렸던 당시의 출판만화가 복간됐고, 2003년에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극장용 필름이 영화진흥위원회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돼 많은 사람들을 흥분시켰다.
이후 2년 동안의 디지털 복원 작업을 거친 옛 만화영화가 2007년 재개봉됐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0여년 전 태권브이에 열광했던 30~40대의 관객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시 극장을 찾았던 것이다. 관객 수는 75만명. 한국 애니메이션 역대 흥행 순위 1위였다.
왜 옛 로봇 캐릭터가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브랜드 파워를 획득한 애니메이션 캐릭터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장원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당시 TV를 휩쓸던 아톰·마징가제트 같은 만화 캐릭터들이 일본산이라는 사실을 어린이들도 은연중에 알고 있었는데 드디어 '국산 로봇'이 나왔다는 소식은 정말 감격적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태권브이의 외형은 결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장르 자체가 일본의 대형 전투 로봇물을 흉내낸 것이었고, 제작 초기 태권브이의 모습도 그레이트마징가를 본뜬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태권브이가 ▲마징가제트의 각진 뿔을 곡선으로 ▲사각형의 눈을 삼각형으로 ▲빗살 모양의 입 부분을 원형으로 바꾸는 등 약간의 변형을 거친 캐릭터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태권브이가 차별화에 성공한 것은 바로 '태권도'라는 요소 때문이었다. 유단자들의 실제 대련 동작을 그림으로 옮긴 태권브이의 동작은 당시로선 상당히 정교한 것이었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은 태권브이의 동작이 '태권도 3단의 실력'인 것으로 감정하기도 했다. 장 교수는 "태권브이는 마징가제트와는 달리 두드러진 무기 없이 주로 격투기로 싸웠다는 점에서 무척 새로웠고 이것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태권브이와 마징가가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는 민족주의적인 논쟁이 붙은 원인이 됐다"고 말했다.
1970년대로서는 무척 공격적이었던 마케팅 전략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초등학생 시절인 1974년 어린이 잡지 '소년세계'에 독자투고를 보내 '마징가제트' 연재 개시에 영향을 미쳤다는 만화평론가 C씨는 "어느 날 TV에서 방영하는 '마징가제트'를 보고 있는데 '마징가보다 재미있고 유익한 만화영화가 나왔다'는 '태권브이' 광고 자막이 화면 아래에 흘러 놀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어깨동무' 같은 잡지에서는 개봉 몇 달 전부터 제작 현장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는 것이다. 영화에 참여한 인력들도 매우 우수했다. 음향은 '소리의 달인'이라 불리는 김벌래씨가, 지금까지도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주제가(달려라 달려 로보트야…)는 작곡가 최창권씨가 맡았다.
그때까지 만화영화에서 보기 드물었던 복합적인 캐릭터가 관객의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태권브이'의 악당인 '카프 박사'는 신체적 조건 때문에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인물이었는데, 이는 악하기만 했던 '마징가제트'의 '헬 박사'와는 확연히 달랐다.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인조인간 '메리'도 무척 특이한 존재였다. 신철 대표는 "암울한 미래 세계를 그린 1982년의 할리우드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올법한 캐릭터가 이미 '태권브이'에 등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로보트태권브이의 2006년 자체 조사에서는 우리나라 성인의 95%, 어린이의 81%가 '태권브이를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신 대표는 "태권브이는 이제 단순한 추억의 아이콘이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의 영웅 캐릭터이자 문화적 DNA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