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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정신
남사학
이 글은 수곡동 한들이 고향이신 녹야(綠野) 류중영 선생님께서
교직에서 퇴임하시고 퇴임교원들의 유대 모임인 교육삼락회
기고 논문 <안동과 안동정신>에서 안동정신 부분을 발취한 것입니다.
류중영 선생님은 저의 은사님으로 임동초등학교에서도
오래 근무하셨고 복주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2003년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안동정신-
안동사람은 왜 위험한 전쟁터에 의병을 자원했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생명과 재산을 버리는 용단을 내릴 수 있었으며,
자유 평등주의, 사회주의, 진보주의를 표방하고 나섰을까?
우리 안동사람에게는 이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첫째, 변방정신, 야당정신이다.
안동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역이었다.
국경지역의 지도자는 백성을 포용하지 않으면 이들의 협조가 어렵고
백성의 협조 없이는 국경수비가 이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고, 그들의 심중을 읽었으며,
백성의 생각에 동조했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국가권력의 중심에 서지 못하였고,
영남이라는 변방(邊方)에 살면서 야당(野黨)생활을 하자니
신분의 보전을 위하여 과거를 보기도 했으나 급제자의 수에 비하여
관료의 지위에 오르는 데는 극히 제한되었다.
벼슬길에 올라도 철두철미하게 원칙에 충실하지 않고는
기득권 세력의 공격을 받아서 그 자리를 유지하거나
승진을 생각할 수가 없었으며 승진에 많은 제약이 따랐기 때문에
높은 직위에 오르기는 매우 어려웠다.
당시의 정치체제인 군주국가의 양반 지배구조와 신분의 차별은
유교의 仁(인)이나, 맹자의 민본주의, 불교의 자비정신에서 추구하는
인도주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비판의식이 발달했다.
그리하여,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민본주의, 자유 평등
평화가 꽃피는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꿈꿔왔으며,
간혹 정권의 중심에 서서 이상적인 정치개혁을 획책했으나
기득권 세력에 밀려 실패하고 참변을 당하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충무공 이순신,
다산 정약용, 미수 허목, 갈암 이현일 등>
안동에서 알려진 예를 들어보자.
안동 출신 西厓(서애) 류성룡 대감은 영의정 겸 도체찰사라는
군정(軍政)의 최고 중책을 맡아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어 오신
정치가, 시정가, 군략가 이었지만 전쟁이 끝나고는 서인세력에 밀려
1598년 10월에는 부원군으로 밀려나서 11월에는 그나마 그만두고
안동으로 내려오는데 뒤를 따르는 子弟(자제)를 걸어서 따라 오게 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보름 만에 안동에 도착하여 12월에는 삭탈관직을 당한다.
1599년 6월에 왕은 서애의 직첩을 환급하였으나
반대파들이 좌절시켰으며 1600년 11월에 직첩이 환급되었다.
1602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봉해졌다.
당시 1등 공신에 봉하여 진분들을 살펴보면
바르게 평가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도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여
후세의 국정수행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1607년 서후면 태장리 초라한 삼간두옥에서 세상을 마쳤다.
안동 출신의 선비 가운데 서애 만큼의 높은 직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갈암 이현일 선생은 이조판서를 지냈으나, 반대세력에 의하여
삭탈관직 당하고 함경도 등지로 유배되었다.
산천초목이 벌벌 떤다는 암행어사를 현직 부사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사 수행원의 처신이 바르지 못함을 어사를 불러서 확인 후에
어사를 관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해해야할 어사가
자신의 수행원 하나를 바르게 다스리지 못해서~”라고
꾸지람을 내렸다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선생의 이야기는
조선역사의 특종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
당시 정치의 실세인 모모는 매관매직을 하면서
“자네가 비록 교지를 돈을 내고 사서 가지고 가더라도
벼슬살이하는 태도는 류 치명처럼 하라”고 했다하니
귀감이었음이 분명하지 않는가?
퇴직하여 낙향할 때 조그만 궤짝 하나를 가져왔는데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하여 열어보니
보시던 책 몇 권과 덮던 이부자리가 전부였다고 가세영언에 기록되어있다.
둘째, 안동에는 ‘퇴계선생의 가르침’즉 ‘퇴계정신’이 있었다.
퇴계는 유학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해석하고
인(仁)의 최종 목적은 독행(篤行)에 있음을 강조하였으며,
몸소 실행하면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조정에서, 지방 수령으로서도, 서원이나 향리에서나 가정에서도
실천을 통하여 가르쳤기에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그들의 제자와 후손들에게 철저히 실천하도록 가르쳐서
대대로 학맥을 이어왔으니 이를 ‘퇴계학맥’이라 한다.
그 중심 철학(사상)은 유학의 원전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며,
인(仁)이라고 생각된다.
仁이란? 사랑과 인정을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어질고
착한 품성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요 인도주의요
평등이며, 인간존중을 의미한다.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박애도 같은 덕목으로 서로가 도와가면서
다같이 더불어 잘살자는 덕목이다.
인도주의, 인간존중 정신은 정치학이나 종교이념으로는
옛날부터 있었으나 군주주의 제국주의 체제에서의 통치자는
이를 실천하지 않았으며 신분상의 차별이 존재했다.
그러나, 퇴계 선생께서는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배점이라는 천민 출신의 사람을
소수서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야기,
일찍이 혼자된 자부를 개가하게 하신 이야기,
젖이 모자라는 당신의 증손자에게 유모를 보내달라는 청을
유모의 딸이 먹어야 할 젖을 증손자에게 먹이면 어떻게 되느냐고 하시면서
증손자에게는 죽을 먹이게 한 이야기,
도산서당에 찾아오는 어린이, 노비, 아전, 관리, 노인의 신분에
차이를 두지 않고 꼭 일어나서 맞절을 하고 만났다.
떠날 때는 반드시 밖에 나가서 전송하셨다.
선생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제자가
“신분에 차이가 없습니까?”라고 묻자
퇴계는 “주자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으나
오늘날 어른보다는 아이가,
배운 사람보다는 안 배운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는 낮은 사람이
오히려 예절이 바르고 착하니,
나는 착한 사람을 기준으로 모든 사람을 공경한다.”고 답하였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만인의 평등을 실천하신
독행유학(篤行儒學)으로 안동 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퇴계는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높은 벼슬자리에 승진되었을 때 사직 소를 올렸다.
임금님께서는 더 높은 벼슬자리를 내리고 선생께서는
또 사직 소를 올리니 사직 소가 무려 70여 회에 이른다.
퇴계의 이런 행적의 영향을 받은 안동사람은
권력을 탐내거나,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자신이 당당하고 떳떳하여 권력에 아부하는 일이
없음을 크게 자랑으로 여겼으니,
그 증거로 안동에는 선정비, 송덕비, 물망비 등의 비석이 하나도 없다.
셋째, 안동은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선비의 고장이다.
1. 안동 사람은 돈을 탐내지 않았다.
단양에서 보낸 삼(대마의 껍질, 삼베의 원료) 한 다발,
봉화에서 보낸 감 한 접을 돌려보낸 퇴계 이황선생 이야기,
영의정을 지내고 낙향하여 삼간두옥에서 세상을 마치신 서애 류성룡 대감 이야기,
초산 부사로 재직하면서 암행어사를 꾸짖은 정재 류치명 선생 이야기,
청백리에 등재되었거나 버금가는 행적을 남긴 많은 분들의 이야기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 안동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학봉선생의 아버지 청계 김 진(金璡)선생의 행장에는 평일에 자녀들에게
“너희들이 군자답게 살다가 죽으면 나는 살아있는 것으로 볼 것이고,
소인이 되어 산다면 나는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
또 “나의 자손은 정 삼품 이상의 벼슬에 오르지 말 것이며,
삼백 석 이상의 추수를 하지마라” 라고 가르침을 남겼다.
그런 연유로 만석꾼이라는 큰 부자가 안동에는 하나도 없었다.
안동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산악지대인 영양, 청송, 군위 등지에도
만석꾼이 있었다.
2. 안동의 선비들은 높은 벼슬을 하는 것 보다는 학문하기를 원했다.
안동 사람에게는 벼슬을 높이하고 권력을 휘두르며 의리에 반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큰 부자가 되고자하는 사람은 비난과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학문을 깊고 밝게 하여 仁(인)을 실천하는 선비를 존경했다.
그런 선비가 되고 싶어 노력하였고 우수한 저술을 남긴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벼슬을 하더라도 선비의 정신으로 오직 백성을 위하여 연구하고
헌신 노력하였으며 국란이 생기면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서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 국란극복에 앞장서는
훌륭한 선비가 된 사례를 남겨서 다른 정치인의 귀감이 되었다.
학봉 김성일 선생은 초유문(招諭文)에서
‘선비는 성패(成敗)에 뜻을 바꾸지 않고 강약으로 기가 꺾이지 않았다.
마땅히 할 바 의(義)라면 비록 백전백패(百戰百敗)라도 오히려 빈주먹으로
시퍼런 칼날과 맞서 만 번 죽어도 후회(後悔)하지 않는다.’고
선비정신의 참 모습을 강조하였다.
3.‘하회별신굿 탈놀이’를 통하여 상류계층의 올바른 정신을 강화했다.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탈선하는 승려, 조상의 벼슬 자랑이나 하는 못난 양반,
실력과 행실은 따르지 못하면서 허풍을 치는 엉터리 선비를 욕하는 내용을
가면극을 통하여 보여주면서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승여, 선비, 양반)이
그 품위를 올바르게 행하지 못하면 백성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경계하기 위하여 많은 경비를 지출하면서
별신굿 행사를 매년 하도록 지원했다.
4. 목민심서에는 안동출신 목민관의 우수사례가 담겨있다.
목민심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목민관의 바른 자세를 가르치기 위하여
역대의 모범 목민관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 안동출신 인물의 우수사례가 여러 편 실려 있다.
5. 적선지가(積善之家))엔 필유여경(必有餘慶)
<적선을 많이 베푼 집에 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넘친다>을 인생철학으로 삼았다.
입춘 날이 되면 한지에다 좋은 글귀를 써서 집안의 요소요소에 붙여 놓고
실천을 다짐했다.
안동에는 어려움에 처한 장애인이나 허기진 행여 자나
길가에 쓰러진 임산부를 도와주고, 벼슬살이를 하면서 돈을 탐내지 않고
백성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며, 국란 극복에 앞장선 조상의 미담사례를
기록한 가세영언(家世永言)이나 세덕가(世德歌) 등의 기록을 남겨서
자손의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집이 많다.
안동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분은 많지만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은 의외로 적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힘써서 훌륭한 저술을 남긴 분이 많다.
처음에 언급한 구국운동의 선구자나 뛰어난 학자,
미담사례 주인공의 후손뿐만 아니라 안동에서 대대로 살았던 집들은
퇴계정신과 선비정신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집이 없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안동문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차전놀이 정신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가 어려울 때마다
안동사람은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그 정신은 차전놀이에 담겨 있었다.
차전놀이는 안동 삼태사가 고려태조를 도와 후백제군을
물리친 병산대첩을 기념하여 만든 전쟁놀이로써
고려시대부터 전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 퇴계 선생의 제자였던 한강 정구는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안동의 각지에서 이루어지는 차전놀이에 관심을 갖고,
안동 부내의 옥야들에서 많은 주민을 참여시켜 단결을 도모하며,
전쟁 수행 능력을 기르고, 집단의 승리를 위하여 자기의 위치에서
전력을 다하는 정신을 기르고자 이 놀이를 보급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지역별로 조금씩 다른 놀이형식이나
규칙이 정비되었을 가능성이 유추된다.
이 전쟁놀이는 매년 농한기(정월)에 민속놀이로 전승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안동차전놀이' 다.
이상에서 살펴본 몇 가지는 현대를 살고 있는 안동사람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으나 구체적인 사례나 준거인물에 대해서는
뒷날에 가서 자료를 수집하여 밝혀야 할 사항이라 생각하며,
권력이나 금력을 남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권력과 금력을 키우고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남을 위하여 쓸 줄 모르는 고소득 층,
정치적 사회적으로 고위층에 있으면서
백성을 위하여 헌신할 줄 모르는 소인배와는 확연히 다른,
우리가 자랑하고 본받아서 더 좋은 사례를 많이 만들어
꽃피워야 할 거룩한 안동정신이다.
우리는 안동정신을 깊이 생각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길이며, 무엇이 값진 삶인가를
재어보는 규범으로 활용한다면,
우리 안동은 전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고,
인간미가 넘치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고장이 되리라 확신하는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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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아제님 고맙습니다 좋은아침 맞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