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18. 5. 30.
이른 새벽에 잠이 깼다.
문학카페에 들어와 '세상사는 이야기' 방(제1280번)에서 '호미'라는 시를 읽었고, 이에 대한 네티즌의 댓글도 많이 떴기에 문인들의 댓글을 읽는 것도 유익했다.
맨손으로 풀을 뽑고, 호미로 흙을 파면 손톱이 닳아서 길게 자라지 못한다는 댓글도 있었다.
맞다. 사실이다.
예전에는 목장갑이 없어서 알손으로 일했다. 손바닥과 손가락이 무척이나 거칠고 투박하고, 잘못하면 쉽게 다치곤했지만 요즘에는 목장갑, 고무장갑을 끼고 일한다.
나는 퇴직한 다음날부터 시골로 내려가 텃밭농사를 지었다.
늘 목장갑을 끼어야 했다. 손이 다치지 않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풀속과 나무뿌리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뱀과 왕탱이(맹독성 벌)에 물릴까 싶어서 꼈다.
나는 일을 할 때에는 손톱을 길게 길렀다. 손톱이 길면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가고, 덜 다치기에.
손톱에는 시꺼먼 때가 늘 끼었고, 손톱을 다듬을 새도 없이 바쁘게 일했다.
나는 이따금 손바닥과 손가락, 손들을 긁히고 다쳤다. 텃밭 세 자리에는 나무와 풀이 가득 차 있기에 늘 날카롭고 억센 가시에 찔리고 긁히기에 더욱 그랬다.
장갑을 벗겨낸 뒤 내 손을 보면 도시인의 매끄러운 손이 아니다. 흙물, 풀물이 잔뜩 묻고 밴 손이다.
다행인 것은 내 손가락이 모두 휘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가고 없는 내 어머니의 손가락들은 모두 새끼손가락 쪽으로 휘었다.
호미를 들고 밭을 매면 손가락이 휘어져서 변형되었다.
나는 이따금 시골 장터에서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 장사꾼을 본다. 이분들도 손가락이 내 어머니의 손가락처럼 휘어졌고, 고생 많이 한 흔적인 휘어진 손가락을 보면 나는 마음이 저려온다.
내가 아무리 시골에서 텃밭 일을 한다 해도, 삽으로 땅을 파고, 호미로 풀을 맨다고 해도 손가락이 휘어질 정도는 아니다. 또 손톱이 자라지 못할 정도도 아니다.
위 '호미' 시 제목이 주는 느낌은 누구나 공감한다.
시골에서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던 아버지,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던 어머니를 누구나가 다 떠올린다.
맨손, 알손으로 일하거나 특히나 호미로 흙을 긁고 풀을 뽑으면 손톱이 길게 자라지 못한다는 네티즌의 댓글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골 할머니들의 손톱은 반쯤 닳아진 것을 슬쩍 내려다보기에.
내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층남 보령시 남포면 용머리(갯마을)에서 아버지(나한테는 외할아버지)의 등에 엎혀서 이사 왔고, 열여섯 살에 동네 결혼했고, 한 곳(한 집)에서만 평생을 살면서 텃밭을 가꾸던 어머니는 죽어서 산속에 묻혔다. 시골집은 이제는 텅 비었다. 아들이 하나뿐인 나도 서울로 되돌아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추운 겨울철에는 아예 서울에서만 머문다.
올해도 두어 차례 시골에 잠깐씩 다녀오기에 시골집은 이제는 대부분 텅 비었다.
섣달그믐이 생인인 어머니는 아흔일곱 살의 설을 보낸 뒤 며칠 뒤에 저너머의 세상으로 여행 떠났다. 2월 말 추운 날에 어머니를 흙속에 묻고는 나는 그참 서울로 올라왔다. 처자식이 있는 서울 생활기간이 자꾸만 길어지는 요즘이다.
서해안 갯바람이 산능선을 넘어오는 텃밭 세 자리에는 나무와 풀만이 가득 찼다.
내가 시골에 내려가 삽 들고, 호미 들고 밭일을 해도 잠깐씩이기에 손톱이 닳아서 짧아질 이유도 없고, 손가락이 휘어질 리도 없다. 손톱이 닳도록 일하지 않고, 손가락이 휠 정도로 일하지 않았다는 증거인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제는 2018. 5. 29.
오후에 성남시 모란시장에 나가서 전국 최대 규모인 5일장 재래시장을 구경했다.
고생 많이 한 사람들이 농사 지은 푸성귀를 판다. 허름한 장사꾼도 많고, 등이 굽고 어리버리한 노인네도 많았다.
그렇고 그런 물건(농작물, 농기구 등등)을 팔고 사고 있었다.
나는 농기구의 하나인 꽃삽을 샀다. 내가 사는 잠실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화분 속의 식물을 키울 때 흙을 퍼담고 퍼낼 때 필요한 작은 삽이다. 베란다 수돗가에 꽃삽 하나가 있기는 하나 너무나 낡고 삵아서 반쯤이 없다. 일 많이 한 시골 사람의 손가락처럼 부서지고 닳아서 없어졌기에 이런 삽으로 흙을 퍼담으려면 흙이 줄줄 샌다.
헌 꽃삽은 시골로 가져가서 다른 용도로나 재활용해야겠다.
시골로 내려가 또 텃밭 농사를 짓고 싶다. 관리기로 땅을 파며, 예초기로 풀을 깎으며, 삽과 쇠스랑으로 땅을 파며, 낫으로 풀을 깎고, 호미로 텃밭 속의 잡초를 살살 뽑고 싶다.
나도 어느새 날과 끝이 닳아서 없어지고 몽당거리는 그런 못난이 호미로 변하고 있다. 등허리 굽고, 근력이 쇠진해도 일을 더 하고 싶다. 예전의 내 어머니(아버지도 포함)가 그랬던 것처럼.
경기도 오산시에 사는 박민순 시인의 '호미'가 정말로 빼어났다.
시사하는 바가 무척이나 크다.
호미 속에는 고생 많이 한 어머니(아버지도 포함)이 들어 있고, 지금은 가고 없는 그들이기에 마음속으로나 그리워 한다.
정말로 가슴에 와닿는다.
그리고 많은 문인들의 댓글도 그들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다.
덕분에 나도 이런 글 하나를 남긴다.
추가 :
아래는 박민순 시인의 '호미' 전문이다.
호 미
박 민 순
감자 캐며
눈물 젖도록 이랑 파던 어머니
앞산만큼 근심도 높아
이랑 무너져 내린 만큼
닳아진 호미 끝
이지러진 달
콩싹처럼 자그만 아이 여럿
황소처럼 먹성 좋던 그 배고픔 달래주랴
자갈에 손톱 긁혀 빠진 줄도 모르고
평생 흘린 땀방울
별빛 총총 흐를 때
흰 옷깃 쑥물 벗고
찔레처럼 가신 어머니
이제야 찾아보는
들꽃마저 외면한 따비밭*
악보 음보 없어도 애절한 풀무치 울음
가만히 귀 기울여
옮겨 듣는
어머니 닮아가는 내 발자국
위 시를 거듭 거듭 읽으면서 나는 2015년 2월 말에 먼 세상으로 떠난 어머니를 떠올린다.
차 멀미로 차 타고 외지에 나가지 못한 채, 일곱 살 때 이사와서 살기 시작한 그 집에서 아흔일곱 살까지 살았던 엄니는
평생을 텃밭 세 자리에서 호미 들고 살았다. 스물여섯 살에 서방 빼았기고, 자식들 공부시킨다고 객지로 내보낸 뒤 혼자서 그 큰 농사채를 감당했다. 머슴(일꾼아저씨)이 없어진 뒤에는 논을 소작인이 지었고, 텃밭 세 자리는 어머니가 농사 지었다. 혼자서 외롭게 사는 한을 달래려고 호미 들고 밭에서만 살았다.
내 시골 창고(안창고, 바깥창고)에는 닳아서 날이 없어진 몽당호미가 잔뜩 있다. 수십 년 전의 낡은 호미라도 나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창고 안에 두었다. 어머니의 채취를 읽는 것처럼.
위 '호미' 시는 정말로 내 어머니의 모습이다. 아니 고향을 시골로 둔 모든 사람의 어머니를 상징한다.
2018. 5. 30. 수요일.
초안이다.
이제서야 졸립다.
아침잠 더 자야겠다.
오늘 오후에는 치과병원에 들러서 닳고 낡아버린 이빨(어금니)을 덧씌워야 한다.
낡아서 삵아서 닳아지는 것이라도 조금은 고쳐서 더 오래 쓰고 싶다.
첫댓글 저는 방학때 잠깐 시골 집에 내려 갔다가
엄마 일을 돕는 다고 햇볕에서 일을 하다가
뜨거운 햇살에 일사병이 생겨 죽다 살아 났네요
나중에 할머니가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 하셨지요
허약한 체질인지
금방 지치고 몸이 안좋았지요
지금 생각하니
조금은 무모 했던 것 같아요
댓글 고맙습니다.
시골사람들은 새벽부터 일하고, 아침나절에도 일하지요.
하지만 뜨거운 한낮에는 일 안 합니다. 해가 어설프게 서산으로 기우는 오후 늦게서야 다시 일을 하지요.
슬기롭게 한낮의 땡볕을 피하지요. 그래도 이른 새벽부터 일을 했기에 작업시간은 무척이 많고 깁니다.
제 시 '호미'를 읽고
시골장터에서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들의 굽고 휜 손가락에서
몇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신 최선생님의 위 글을 읽고
제 어머니가 생각나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마를만도 한 눈물이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산골의 가난한 집에서 흙수저로, 그것도 심장질환과 기관지확장증을 달고 태어나
힘들게 헤쳐온 63년 내 인생,
지병이 있어서 정규직 직장 한 번 못 갖고 살아온 내 인생,
구비구비 마디마디가 서럽기도 하지만
열 명이 넘는 자식 낳았지만 호강 한 번 못하고 자식 뒷바라지에
고생만 하다 가신
내 어머니의 일생이 더 서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막내 아들인 제가 결혼해서 낳은 아들(어머니에겐 손자지요) 1년 정도
업어주시면서 행복해 하시던 어머니였는데.......
건강하지도 못한 나를 항상 걱정하시며 아들 딸 사위들이 주신 용돈을
쓰시지도 않고 손수건에 몇 번이고
싸서는 우리집에 오시면 내놓던 어머니.
형님댁에 사시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집에 오셔서 우리 아들 업어주시는 것이
낙이라시던 어머니는 우리 아들 2살 때, 저 세상 가셨지요.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못 쓰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최 선생님 !
글 정말로 좋네요.
하도 좋아서 제가 임의로 여기에도 퍼서 올렸습니다.
그래야만 왜 제가 이런 글을 썼는지를 제3자가 이해하기 쉽도록요.
임의로 퍼왔기에 죄송합니다. 문제가 되면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최윤환 지난 토요일 아들을 결혼 시킨 청주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민주(예전 이름은 옥순)에 따르면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에 내가 누나 등에 업혀서 학교(집에서 학교까지는 4Km)에
갔다는 이야기인데 저는 기억도 없습니다.
그만큼 약하게 자랐습니다. 수많은 잔병치레 하면서.
지금도 약골로 골골대지만
그래도 이렇게 63년째 살고 있으니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