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박 3일 독도 둘러보기 길 열려~”
전국 어느 곳에서나 독도 둘러보기 ‘무박 3일의 길’이 열렸다.
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밤 11시 40분 울릉도 배편이 출발한다. 이 배는 이튿날 새벽 6시쯤 울릉도 도동항에 닿는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둘러보고 오는 배편은 하루 두 번. 독도를 오전에 다녀오든 오후에 다녀오든 간에 그 사이에 울릉도 일주 관광을 하고 당일 포항으로 나오는 배를 탈 수 있다. 이 배는 밤 11시 40분 도동항에서 출발해 그 이튿날 오전 6시쯤 포항항에 도착한다.
(포항여객선 터미널 전경. 이곳에서 울릉도 가는 뱃편 '나리호'와 '선 플라워호'가 있다.)
전국 어느 곳이든 밤 11시까지 포항에 도착할 수 있고, 또 돌아오는 날도 새벽에 포항을 출발하면 당일 전국 어느 곳이든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逆)으로 울릉도 주민들도 무박 3일로 전국 어느 곳이던 볼일을 보고 돌아올 수 있는 길이 트여 이 뱃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단 이틀 밤은 배 안에서 자게 된다. 조금은 무리한 일정이지만 대신 경비를 상당히 줄일 수 있고,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을 아울러 갖추었다.
나는 지난 10월 12일 오후 8시 30분 동대구역에서 포항 발 야간통근열차(경로우대 1.400원)를 탔다. 일행 8명과 함께. 옛 같은 직종 일터에서 머리를 맞댔던 노병(?)들이다.
‘울릉도’, 이번이 세 번째다. 그러나 독도는 처음이다. 마음이 설레긴 젊은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울릉도’라면 ‘나리꽃’이 떠오른다. 도종환의 ‘나리꽃’이란 시가 절로 중얼거려진다.
"세월의 어느 물가에 나란히 앉아/
나리꽃만 한나절 무심히 바라보았으면 싶습니다./
흐르는 물에 머리 감아 바람에 말리고/
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나이가 들었으면 싶습니다./
살다보면 어느 날 큰물 지는 날/
서로 손을 잡고 견디다가도/
목숨의 이파리 끝까지 물은 차올라/
물줄기에 쓸려가는 날 있겠지요./
삼천 굽이 물줄기 두 발짝도 못 가서 손을 잃고/
영영 헤어지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또다시 태어나는 세상의 남은 생애를/
세월의 어느 물가에서 따로따로 그리워하며 살겠지요./
그리워하다 그리워하다 목이 길어진 나리꽃 한 송이씩 되어/
바위틈에서고 잡풀 속에서고 살아가겠지요.//”.
나리꽃, 울릉도의 대명사다. 화산암으로 이뤄진 5각형의 섬. 해발 984m의 성인봉을 중심축으로 해 여러 갈래 분수령을 이룬다. 따라서 ‘나리분지’라는 곳을 제외하곤 험준한 경사지를 이룬 곳이다.
이 성인봉의 숲 속엔 6 ~7월이면 ‘섬말나리꽃’이 가득 핀다. 이 ‘섬말나리꽃’은 동해의 먼 섬까지 삼천 굽이 물줄기 타고 떠돌다가 영영 헤어지면서 각자 뿌리를 내렸을까? 세월의 어느 물가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다 그리워하다 목이 길어지면서 열매도 맺을 수 없는 슬픈 꽃 한 송이씩을 피워냈겠지.
우린 아직도 <주> 독도관광해운(홈페이지: www.dokdotour.com)이라는 회사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 옛 동료인 한 노병(?)의 초청을 받았다. 포항역엔 밤 10시 30분 도착. 택시 두 대에 분승해 포항여객선 터미널로 향했다. 윤성근 대표이사가 환영했다. 부두엔 위 도종환 의 시 제목과 같은 ‘나리’호란 큰 배가 떠있었다.
열매도 열지 못하는 꽃, ‘나리’란 이름만 들어도 코 끝까지 싸해졌다. ‘나리’호는 울릉도 성인봉 숲 속에 피고 지는 ‘섬말나리꽃’의 이름을 따와 지었단다. 꽃말이 ‘순결’ 또는 ‘깨끗한 마음’인 나리꽃에도 물론 전설이 있다.
('나리'란 말만 들어도 코 끝이 싸아 해진다. 하물며 배 이름이 '나리호'라니!!!!!!)
(도동항에 정박 중인 '나리호' 전경.)
“옛날 한 마을에 아리따운 처녀가 살았다. 이 고을 원의 망나니 아들이 이 처녀를 보고 반해 버렸다. 이 처녀에겐 마음에 둔 연인이 있어 치근덕대는 그를 처다 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망나니 아들은 그 처녀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했으나 너무 냉랭한 반응을 보이자 그만 왈칵하는 마음으로 죽여 버렸다. 그리고 제정신이 든 그는 양지바른 곳에 처녀를 묻어주었다. 뒷날 그 무덤에 꽃 한 송이가 피었다. 원의 아들은 그녀를 잊을 수 없어 그 예쁜 꽃에 다가가니 그 꽃은 역겨운 냄새를 풍기면서 접근을 막았다. 죽어서 꽃이 된 그 녀의 혼은 그렇게 끝까지 순결을 지켰다”. ‘순결을 지키는 꽃’, ‘깨끗한 마음을 지키는 꽃’이 바로 나리꽃이란다. 그래서 이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린 윤 사장의 안내로 바로 ‘나리’호에 올라 이 배의 구석구석 다니면서 설명을 들었다. 결국 무임승선 한 셈이다. 포항에서 울릉도까지의 뱃길은 217km. 동해안의 묵호항에선 161km, 후포 항에선 159km다. 그러나 울릉도민들의 주 생활권이 그 중 먼 포항이다. 궁금해 뱃삯을 봤다. 포항에서 울릉도 도동항까지 편도요금이 일반 46.500원이다.(▷ 중 ․ 고생 42.000원, ▷ 경로우대 37.500원). 울릉도에서 포항으로 나오는 뱃삯은 1.500원이 헐했다.
물론 낮 시간 동안 세 시간 만에 포항과 울릉도를 오가는 ‘선 플라워’호 보담 조금 헐했다. ‘선 플라워 호’는 l일 왕복배편이 있다. 오전 10시 포항항을 출발해 오후 1시 울릉도 도동항에 닿으며, 오후 4시 울릉도를 출발해 오후 7시 포항항에 닿는다. 뱃삯은 포항 발 울릉 행 편도가 일반이 59.800원, 학생은 54.000원이다. 이 배를 타고는 무박으로 독도를 다녀올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나리’호는 좌석과 좌석 사이도 넓어 다리를 쭉 뻗칠 수 있는데다, 의자를 뒤로 제처질 수 있어 앉은 자리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제작했다. 승선인원은 625명. 921톤으로 화물차 36대와 그 외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다.
우리 일행에겐 3층 조그마한 룸(VIP 실)이 배정됐다. 배가 포항부두를 떠나기도 전 벌써 무임승객(?)들은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곧 술자리가 벌어졌다. 몇 달 또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료도 있다. 술잔이 오갔다. 배 멀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다. 가끔 창밖을 내다봤으나 이미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오직 작은 방엔 술기운만이 가득 맴돌았다. 배의 흔들림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곤 몇 시쯤인지도 모르게 술이 약한 사람부터 차례로 머리와 등짝을 바닥에 뉘였다.
잠결 어느 순간 배 흔들림이 좀 심하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실내등만이 밝았다. 방 이곳저곳엔 어제 밤 벌인 술자리 흔적이 어지럽게 널려있을 뿐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30분이다. 털고 일어나 창문에 붙어 섰다. 바다 저 멀리 섬을 밝힌 불빛이 어른거린다. 거의 울릉도에 다다른 모양이다. 한 분 깨웠더니 “도동항이다!”라면서 환호성을 지른다. 노병(?)들 한 분 한 분 웅성거림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울릉도 새벽 바람은 거셌다. 도동항과 저동항을 밝힌 불빛이 너울에 따라 일렁이며 춤춘다.)
서둘러 잠긴 문 열고 갑판으로 나갔다. 카메라 가지고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두 사람. 갑판으로 나가니 바람이 거셌다. 모자를 날릴 풍속이다. 이 바람으로 울릉도 도동항과 저동 항을 밝힌 새벽 불빛은 너울에 편승해 더욱 요란하게 춤춘다. 아니 배가 출렁인 것이다. 몇 커트 잡으려고 셔터를 눌렀으나 자꾸만 ‘떨림이 심하다’는 글이 카메라 화면에 떠오른다. 뱃전에 붙어 섰으나 흔들림으로 도저히 제대로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나리’호는 서서히 도동항에 접안했다. 성인봉은 구름에 감싸여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착장 주위에 삐죽 삐죽 솟은 높은 바위틈에 자라는 향나무 몇 그루가 아침 안개 속에서도 그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줘 그나마 나그네에게 위안을 줬다. 배가 접안한 후 승객은 높은 사다리를 타고내리고, 마중 나온 섬사람들과 부딪치며 웅성댔다.
(새벽 먼동이 틀 때 '나리호'가 도동항에 접안하고 있다. 멀리 성인봉은 구름에 가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도동항 전경. 아직 건물 창엔 불빛이 내비친다.)
일행은 <주> 독도해운 직원의 안내로 식당을 찾았다. 물 회(1인당 10.000원)로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오전에 나리분지를 왕복하는 관광버스로 울릉도 관광을, 오후에 독도를 다녀오는 일정을 잡았다. 일행 중 한 동료는 나리분지에서 성인봉을 올라 도동으로 내려와 독도를 다녀올 일행과 합류하기로 했다.
1973년 울릉도를 다녀온 후 근 30여 년만의 걸음이다. “많이 변했구나. 하긴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세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 흘렀으니깐~”. 울릉도 관광버스는 중형이다. 도로사정으로 대형 통행이 불가능하다. 일주도로가 개통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2001년 울릉도에 갔을 땐 중형버스도 없었고, 지프 형 택시가 나리분지까지 겨우 오갔을 뿐이다. 만 5년만의 방문임에도 너무 큰 변화의 물결이 온 섬을 휘감았던 것이다. 이젠 이 섬에도 자동차가 넘쳐났다. 비좁은 도동에 주차 빌딩이 등장했을 정도다.
(도동항 주변 삐죽삐죽한 암봉엔 자생 향나무가 늠름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동항 주변에서 오징어를 말리는 장면. 그 뒷편으론 오징어 잡이 배의 집어등이 보인다. 먼 바위산에도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관광버스엔 우리 일행 아홉과 포항에서 온 아주머니 여덟 분, 그리고 부산서 온 아가씨 두 명 등 열아홉 명이 탔다. 이 섬의 농민후계자로 농사철이 아닌 이 시기엔 관광버스 운전을 한다는 40대 중반의 운전기사는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승객을 쥐락펴락 마음대로 주물렀다. 그는 참 멋진 희극배우(?)였다. 농을 섞어가면서 울릉도의 갖가지 풍물과 지세 등등을 줄줄 꾀는데, 그저 뱃살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동을 벗어나면서 도로변 산기슭엔 가득 핀 해국이 바닷바람을 맞아 일렁거렸다. 운전기사 왈 “이 해국은 울릉도 자생으로 ‘왕 해국’이라고 부릅니데이~”라고. 해송 사이사이론 노랑 털 머위 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도 깊어가는 가을이 아쉬운 듯 관광객들에게 손짓했다.
(사동 바닷가 산기슭에 자라는 울릉도 왕 해국. 보통 해국보담 꽃이 큰 것이 특징이다.)
(산 기슭에도 노랑 국화과 야생초가 가득이 피어있다.)
가을이라 특히 국화과 식물이 많이 꽃을 피워냈다. 산기슭엔 뚱딴지와 산 씀바귀, 울릉도 미역취, 그리고 왕고들빼기가 노랑 또는 황색 꽃을 선보였다. 자색의 서덜취, 털진득찰 등도 수줍은 듯 잡초와 어울려 꽃을 피웠다.
울릉도 일주도로는 해안 따라 시멘트로 포장됐다. 아스팔트 포장은 눈이 많이 내리는 이곳에선 견뎌낼 수 없단다. 자동차 타이어가 철사가 많이 들어간 제품이라 아스팔트 포장길은 한해 겨울도 지탱할 수 없다고 했다.
모래가 많아 사동(沙洞)이라는 이름을 붙인 바닷가를 달린다. 그 모래는 말이 모래일 뿐 육지 해안의 백사장을 연상시키다가는 실망하고 만다. 화산에서 분출한 화석이 바닷물에 잘게 부서진 그런 모래일 뿐이다. 옛날엔 이 동네를 ‘와록사동’이라고 불렀단다. 마을 뒷산이 마치 사슴이 누워있는 모습을 했기 때문이다.
(통구미의 거북 바위 모습. 거북이가 머리를 치켜 들고 마을로 들어가는 듯 하다.)
이렇게 울릉읍을 벗어나면 서면에 이른다. 포구에 솟은 바위 위엔 마치 거북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한 광경이 펼쳐진다. 이 포구가 통구미(桶龜尾)다. 돌 거북이 마을로 기어들어가는 통(桶)과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버스를 잠시 이 거북바위 앞에 세운다. 관광객들은 너네 없이 그 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검은 조약돌로 이뤄진 남양몽돌해수욕장을 거쳐 우산국 우해왕이 신라의 이사부에게 항복하기 위해 벗어던진 투구가 바위로 변했다는 투구봉, 이 때 신라군이 뱃머리에 싣고 와 우산국을 위협했던 나무로 만든 사자가 돌사자로 변했다는 사자바위를 거친다.
해변 길을 달리던 운전기사 왈 “손님들! 저가 여러분에게 칼국수 한 그릇씩을 대접하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능청스런 멘트를 했다. 남양마을이란 곳을 앞두고 말이다. 우린 그 마을에 들려 정말 음식점에서 국수를 사주는 줄로만 알았다. 이 마을 뒷산이 바로 국수를 말리는 모양을 한 산이다. 주상절리현상으로 암석 한 면이 칼국수를 뽑아내 말리는 모습과 흡사했다. 이 산을 ‘국수산’이라고도 불렀다. 그 산을 가리키면서 “맛있게 드세요.”라고 했다.
또 이 산은 ‘비파산’이라고도 불린다. 우산국의 왕녀 ‘풍미녀’가 딸 하나를 낳고 저 세상으로 가버리자 우해왕이 그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데리고 온 열두 시녀에게 그 산에 병풍을 치고 백일 동안 비파를 치며 제사를 지내 이렇게 불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태하에서 바라본 성인봉 쪽. 구름 사이로 햇볕이 쏟아지기도 한다.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어있다.)
(여뀌와 강아지 풀과 메꽃. 여뀌 잎이 붉게 물들어 간다. 이곳엔 여뀌의 종류도 많았다. 이삭여뀌, 흰여뀌, 개여뀌, 산여뀌 등등으로 말이다.)
태화와 성하신당을 거쳐 북면으로 들어간다. 산간도로를 버스는 잘도 달린다. 성인봉을 중심으로 해변 길 따라 섬을 도는데, 현포까지는 가파른 산길을 탄다. 현포를 지나면 다시 바닷가를 달린다. 추산(錐山) 바닷가에 이른다.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마을이 펼쳐진다. 이곳엔 해발 270m에서 솟아나는 용출수를 이용해 발전하는 수력발전소도 있다.
(현포 가는 길은 높은 구릉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멀리 성인봉 주변의 여러 봉우리가 어울려 있다.)
건너 바다에는 코끼리바위(공암)가 떠있다. 코를 물속에 담그고 물을 마시는 그런 형상이다. 물에 담근 코 부분엔 직경 10m의 구멍이 뚫려있어 더욱 신비롭다. 이 구멍엔 소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다. 추산. ‘송곳산’이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해발 430m. 성인봉의 한 줄기이다. 생김새가 꼭 송곳처럼 생겨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옆에서 바라본 추산. 일명 송곳바위라고 부른다. 마치 송곳을 닮은 모양이다.)
(송곳바위도 처다보면 이렇게 크다란 구멍이 뚫려있다. 참 기이하다.)
(바로 아래쪽에서 처다본 송곳산. 구멍이 뻥 뚫려있다. 왼쪽 암봉엔 담쟁이덩굴이 한참 물들어가고 있다.)
천부를 돌아 나리분지로 오른다. 천부 항을 두고 옛 선창 또는 왜선창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선창이던 곳, 또 왜놈들이 드나들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들이리라. 운전기사는 차를 몰면서도 마이크로 쉼 없이 가이드를 한다. “울릉도 3무(無)를 아는 분에겐 사탕 한 알 드리겠습니다.”라고 하기도 했고, “울릉도 5다(多)를 아시는 분에겐 나리분지에서 조 껍데기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라고. 3무는 도둑 ․ 공해 ․ 뱀. 5다는 향나무 ․ 바람 ․ 물 ․ 돌 ․ 미인을 이른다.
(천부항 도로변에선 아낙들의 오징어 말리는 손길이 한창 분주하다.)
나리분지는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지다. 동서 약 1.5km 남북 약 2km로 약 60만 5천 평에 달한다. 옛 우산국 때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곳이다. 조선조 들어서 공도(空島)정책으로 수백 년 동안 비워졌다. 고종 때 개척령에 따라 개척민이 들어와 다시 마을을 형성했다. 옛날 정주민들이 섬말나리 뿌리를 캐먹고 살았다고 해서 나리 골이라 불렸다.
(나리분지 전경. 성인봉 쪽은 구름에 덮혀있다.)
분지 안에는 투막집이라고 불리는 옛 원주민들의 주거지 4채가 아직도 남아 전한다. 또 너와집 한 채도 볼 수 있다. 투막집은 섬에서 자라는 솔송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우물정자(井) 모양으로 쌓고, 흙으로 틈을 메운 집이다. 이곳엔 ‘조 껍데기 술’이라는 전통 막걸리를 파는 식당이 있다. ‘조 껍데기 술’이란 발음을 빨리할 땐 웃음이 절로 날수밖에 없다.
(나리분지를 오르는 산기슭에 핀 노랑 국화과 야생초.)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주> 독도관광해운 고문으로 있는 동료가 아침 먹을 때 어느 곳에다 전화를 했다. “나리분지 도착이 오전 10시 30분쯤이다.”라고. 어느 부인께서 정성스레 칼질한 싱싱한 회감을 두 소쿠리에 나눠 담아오셨다. 술과 함께. 울릉도에서 건설업을 하는 친구의 부인이라고 소개했다. “마침 손님이 오셔서 남편은 못 오고 제가 대신 왔습니다.”라면서 정갈한 음식을 차려냈다. 일행은 출출하던 김이라 더욱 맛있게 먹었다.
나리분지 구경을 끝내자 일행 중 성인봉을 오르려는 분이 두 분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먼저 출발해버렸다. 버스는 다시 도동항으로 돌아간다. 점심 먹고 독도 행 삼봉호를 타야했다. 현포 부근에 이르렀을 때 휴대폰을 받은 운전기사가 “오늘 오후 배는 뜨지 못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라고 방송했다. 모두들 웅성 인다. “차라리 성인봉이나 오를 건데~~~”라는 분, “뭣 땜에 배가 못 뜬답니까?”라고 운전사에 다잡아 묻는 분, “독도와는 정말 인연이 없는 것 같다.”라고 탄식하는 분 등등.
삼봉호를 띄울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다. 고문인들 일기가 좋지 않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는가. 독도를 가지 못한다니 차선의 방법을 찾을 수밖엔 없다. 남은 일행은 점심 먹고 도동에서 성인봉을 오르기로 했다. 오징어 내장 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참 시원했다. 술국으론 일품이었다.
독도 밟으려고 온 걸음이었지만 하늘이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시인 이생진의 ‘독도, 혼자인 걸’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누구랑 정사하고 싶다/
아니면 눈 꼭 감고 동반 자살이라도/
혼자인 걸/
조약돌을 주울까/
머리를 흔든다./
소녀처럼 노래 부를까/
또 머리를 흔든다./
그저 뛰어낼 수밖에/
검은 물빛 그 속에 박힌 별 하나 보고/
뛰어 내릴 수밖에/
그 이전에 누구와 정사하고 싶다//”.
독도. 그 땅 밟을 수 없으니깐 검은 물빛 그 속에 박힌 별 하나 보고 뛰어내릴 수도, 조약돌을 주울 수도, 또 누구와 정사할 수도 없다. 참 안타까웠다.
시인 오정방은 나그네 안타까운 그 마음 어찌 그렇게 잘 헤집었을까? 그는 “첫 입도 36년 주년을 맞으면서!”라는 부제를 붙인 “지금 독도가 궁금하다.”라는 시에서 나그네의 심사를 너무도 잘 묘사해냈다.
“수평선 너머에서/
지금 막 멱을 감던 태양이/
서서히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신선하고 찬란한 모습/
우아하고 황홀한 모습/
그 장관을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서 보는 섬이 있으니/
그 섬의 이름은 독도/
지금 그 독도가 궁금하다/
괭이갈매기들 시원하게 날고 있을까?/
바다제비, 섬새들도 평화로이 노닐고 있을까?/
구절초, 기린 초 꽃도 바닷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을까?/
돌돔, 파랑 돔도 섬 주위를 자유로이 유영하고 있을까?/
지금 그 독도가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 입도의 문이 열린 뒤/
여기가 대한민국 땅이다 하고 단숨에 달려와/
두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머리로 깨달은/
우리 땅 독도의 그 중요성을/
잊지 않고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까?/
요즘은 좀 조용하다/
조용한 독도가 궁금하다/
조용해서 더욱 독도가 궁금하다/
조용한 것이야 말로 지극히 정상인/
그 독도가 오늘따라 몹시도 궁금하다.//”
<2005년 9월 2일>
독도, 자꾸 궁금해진 그 독도, 떠올린들 마음만 아릴뿐이다. 일행은 성인봉 등정 길 택해 바삐 움직인다. 그 길 몹시 붐볐다. 낮 시간 선 플라워 호를 타고 온 분들이 우리와 뒤섞였다. 서울 둔촌성당에서 왔다고 했다. 신부님을 위시해 수녀님의 모습도 보였다. 대부분 부녀신자들이고, 남성 신자는 극소수다.
(도동에서 성인봉을 오르는 산기슭에서 내려다본 도동항 전경.)
(성인봉을 오르다 보면 있는 마지막 인가. 마당에 씨앗으로 말리는 옥수수 묶음이 가을임을 알려준다.)
(이곳에도 노랑 꽃을 피워내는 국화과 야생초가 흐드러졌다.)
이들은 성인봉 등정하곤 일박 후 내일 독도를 밟을 예정이란다. 그들은 여정이 우리에 비해 여유로웠다. 물론 여행 경비는 많이 들겠지만 말이다. 패키지여행일 경우 1박 3식에 독도 뱃삯 포함 일인당 20만원 내외다. 우린 성인봉 1.6km를 앞둔 지점에서 되돌아와야 했다. 나리분지에서 성인봉을 올라 도동으로 내려온 일행 두 분이 기다리는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서다. 또 성인봉 정상을 밟고 돌아오면 어두울 시간이었다.
오후 다섯 시쯤 도동에 닿아 목욕 마치고, 일행이 다함께 합류했다. 이젠 저녁 겸 반주자리만 남은 셈이다. 부두에 인접한 한 횟집에 들었다. 손님으로 북적댔다. 떠날 사람, 들어온 사람들이 그곳에서 모두 저녁을 먹나보았다. 양주 폭탄이 돌아갔다. 산 탄 후 목욕까지 마쳤기에 목이 껄껄한데다 싱싱한 회감에 폭탄주라 여간 맛나지 않았다.
(울릉도 호박. 호박 추수를 끝내고 운반하기전 밭둑에 쌓여있다. 이 호박으로 울릉도 호박엿을 만든다.)
(구절초 닮은 흰색의 국화과 야생초.)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우리 방을 노크하면서 한 분이 찾아왔다. 대구에서 이날 오후에 도착한 분들로 우리 목소릴 듣고 반갑다면서 합석이 됐다. 또 한 분이 합석했다. 대부분 다 서로 안면이 있거나 친한 사이다. “우린 오늘 들어왔으니 아직 경비가 넉넉합니다. 저녁은 우리가 쏘겠습니다.”고 제의했다. 만류해 보았으나 기어이 계산하고 갔다. 우린 조금 남은 밤 시간을 그냥 보낼 수 없어 노래방까지 섭렵했다. 독도를 밟지 못한 한을 이렇게 푼 셈이다.
밤 배편 시간 맞춰 선착장엘 닿으니 정윤열 울릉군수가 나와 있었다. 그와 우리 일행 중 몇몇 분은 잘 아는 사이다.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하려고 했으나 찾아온 외래객들 때문에 시간이 나지 않더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는 울릉도 마른 오징어 한 축과 호박 엿 한 봉지가 든 선물박스를 일행 모두에게 들려주었다.
일행은 밤 11시 40분 포항행 나리호를 탔다. 그리곤 배 안에서 술자리를 이었다. 몇 시 인진 알 수 없으나 제 주량대로 마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자리에 눕는다. 나리호는 이튿날 새벽 6시 포항항에 댔다. 윤성근 사장을 비롯한 회사관계자에게 “신세 많이 졌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나눴다.
(포항항 여객선 터미널 앞 선창에서 찍은 동해 일출광경.)
선착장 부근 식당에서 매운탕으로 아침 먹곤 포항시외터미널로 옮겼다. 시외버스 타고 대구 와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이렇게 무박 3일의 울릉도 여행을 마쳤다. 독도를 밟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 글, 그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제야 겨우 쓰게 됐다. 다녀 온 시간이 너무 흘러 흥미가 반감됐다는 건 잘 안다. 물론 올린 사진들도 2주가 지났기에 빛바랜 것이 돼버렸다. 그러나 어쩌라. 사진이 아까워 이렇게 올리게 됨을 이해해 주시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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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암의 울릉도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난 울릉도 3번 독도 학술조사단에 끼어 한 자례등 몇차례 다녀왔지만 와암처럼 세밀히 보지 못하고 그저 수박 겉핥기로 다녀 온 느낌입니다. 많이 배워야 겠군요.
와암 잘 다녀 왔습니다. 32회원들 희망자 모아 한번 다녀 옵시다요. 이몸은 독도에 입도한지도 꽤오래 되었소, 변화된 독도의 요즘 모습보고 싶내요 -- 위에 본문 내용중 아래쪽에 필요 없는 분분이 많이 들어있네요 수정해 보세요
와암 지는 엊그저께 갔다왔는데 또가겠냐 우선 기행문으로 대신하고 훗날 울릉 군수가 동문 후배(졸업기준) 박경진 전 회장과 친분이 두텁다니 함께 여행 해보자고 애기가 오간적이 있었으니 머잖아 실행이 되면 그때 소집 할걸세 한번 가 보자구.
너무나 실감나게 잘 읽었습니다.그리고 울릉도 여행 정보 상세하게 기록해 주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