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침을 받은 38년 된 병자의 믿음
요한복음 5 : 1 – 1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공관복음에는 없고 요한복음서에 볼 수 있는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경고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행각 다섯이 있고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베데스다 못은 지상교회를 상징합니다(3-4).
베데스다 못은 진리와 비진리가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진리도 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에서 이 말씀을 가르쳐서 비진리의 허상을 깨닫고 진리를 따르게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행각이 다섯이 있는 베데스다 못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의 신음과 고통의 소리로 차 있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병자들은 물이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흐르는 지하수에 공기 방울이 올라올 때 물이 솟구치며 빙 도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끔 물이 솟구지며 빙 도는 것을 보고 천사가 내려와 그렇게 했다고 하며 그때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만든 속설입니다.
사람들이 그 속설을 신앙적으로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미신을 많이 믿습니다. 미신은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이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경쟁입니다. 미신의 핵심은 경쟁입니다. 병자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마치 달리기를 하기 위해 출발선에 신호를 기다리는 선수들과 같습니다.
상대방을 밀어내고 넘어지게 해서라도 먼저 가려고 하는 그들에게는 양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비의 집이라고 하는 베데스다 못에는 자비를 볼 수 없습니다.
누워있는 병자는 앉을 수도 없는 고칠 수도 없는 병자들은 죄인을 상징합니다. 죄인들은 스스로 고침을 받을 수가 없어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죄인들은 자신을 구원해 줄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병자들 중에 가장 오래된 병자인 것 같습니다. 그도 물이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려고 했지만 자기보다 오래되지 않은 병자들에게서 밀려났습니다. 그는 던져 줄 사람도 없습니다.
경쟁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워 물이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비의 집이란 베데스다에 자비가 있었다면 그를 먼저 들어가게 해주어야 했지만 아무도 그를 먼저 들어가도록 해 주지 않았습니다. 자비의 집에 자비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의 우리 교회안에는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조용기 목사의 치유 은사집회가 있다고 해서 가 보았습니다.
체육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조목사에게 안수받으려고 안달이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조목사가 지나가는 문에는 많은 사람이 밀치고 가서 차에 타려고 하는 조목사의 손을 잡고 자기 머리에 올리는 것을 경호원들이 뿌리치고 막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기도 포천에 할렐루야 기도원에 신비의 우물물로 암환자를 비롯해서 병원에서 고칠 수 없는 병자들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병자가 모여들었습니다.
탱크로리로 그 물을 전국에 배달해서 그 물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물며 미국을 비롯한 외국까지도 그 물을 가져갔습니다.
신비의 우물을 중심으로 많은 환자가 자리를 잡고 누워있었습니다. 서로 우물을 가까이 자리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집회시간에 원장이 환자들을 안수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이 원장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아픈 곳에 같다 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병자들의 경쟁은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한국교회의 현대판 미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고침을 받는다’는 경쟁은 신학이 없는 미신입니다. 미신은 비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에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나 비진리에 빠진 병자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경쟁에서 밀려난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물에 넣어 주기를 바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린 딸은 그의 어머니의 믿음을 보시고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38년 된 병자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가 병들어 부정해서 성전에 올라올 수 없었습니다. 고침을 받고 성전에 올라온 그는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고 거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고침을 받고 성전에 올라가서 다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고쳐 준 예수님에게 감사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람이 많아 예수님께서 이미 피하셨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했다면 성전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났을 때라도 감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을 감사하지 않음으로 해서 어떻게 되는가를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감사할 줄 모르면 어떻게 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14-16).
이 말씀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에게 자신의 병을 완전히 고쳐 주셨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은 감사할 줄 모르는 그에게 경고로 하신 말씀입니다.
38년 동안 고생한 것보다 더 심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38년 동안은 세상적인 육체적인 고통이라면 더 심한 것은 영원한 영적인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가 병고침을 받았다고 그의 영혼까지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 당한 자들도 많습니다.
나병 환자 열 명이 고침을 받았음에도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눅17:17). 그 아홉은 나병은 고침을 받았으나 구원은 받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 하였느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시고 떡 한 조각을 적셔 가룟 유다에게 주어 먹여 주셨습니다(마26:24).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테니 얼마를 주겠느냐고 하며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예수님으로부터 경고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이는 예수라’(15)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가서 ‘나를 고치신 이는 예수라’고 말한 것을 그의 신앙고백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 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16)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38년 병자가 고침을 받았음에도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를 고발함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16,18).
38년 된 병자가 유대인들에게 가서 고발한 것은 제2의 가룟 유다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지 않게 되면 사탄의 이끌림을 당하여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제2, 제3, 4, 5의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말씀하지 않아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같이 매우 불행하게 살다가 죽어 음부의 던져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38년 된 병자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와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속죄함을 받고 교회에 올라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오늘도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든 크든 범사에 감사합시다. 무한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은혜로 알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자입니다. 마땅히 감사할 일을 감사하지 않으면 더욱 악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고 성전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만나고 경고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하옵는 것은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은 그러한 자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맙시다. 범사에 감사하며 살다가 주님 부르시는 그날 주님의 손 잡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합시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움켜쥔 행복은 씨앗이지만 나누는 행복은 꽃이고 열매라고 합니다.
오늘도 꽃피고 열매 맺는 행복한 하루 힘차게 만들어 가시길 기원 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