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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그림과 읽을거리 스크랩 보티첼리..영원한 비너스, 시모네타
카페여행 추천 0 조회 278 18.03.11 08: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나오는 여성의 긴 목과 슬픈듯이 애잔한 표정..


 화가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44~1510)는 플리니우스가 쓴 옛 기록을 읽고 당시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한다는 피렌체 최고으 미인 '시모네타 베스푸치'를 모델로 하여 고금의 명작 위 그림 '비너스의 탄생'을 그렸다.

보티첼리는 그의 그림의 핵심적인 모델인 그녀을 지근에서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프리마베라(1481), 팔라스와 켄타우로스(1482), 비너서의 탄생(1485), 마르스와 비너스(1485) 등 보티첼리의 대표작의 모델은 다 그녀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대작들이 그녀의 사후에 그려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모네타 베스푸치


시모네타는 22살이라는 매우 이른 나이에 죽었다. 미인박명의 대표적인 모델이기도 하지 않나 한다.

라파엘전파의 열광적인 호응 받아 밀레이의 '오필리아'의 탄생의 원천이기도 한 그녀.. 시모네타 베스푸치 Simonetta Vespucci (1453-1476)는 제노바의 유력한 카타네오 집안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녀의 원래 이름은 시모네타 카타네오 로서 1453년에 태어 났다.


시모네타 15살이 되자 시모네타의 부모는 피렌체의 경제력 있는 베스푸치 가문인 마르코 베스푸치와 결혼시켰다.

시모네타가 피렌체로 온 시기의 피렌체는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가 다스리는 르네상스의 선두을 달리는 예술의 도시였고 뛰어난 외모의 시모네타는 곧 피렌체 남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시모네타 라 벨라" 라고 불렀다. 이때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중요한 두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중 한사람은 위대한 로렌초의 동생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 였고 또 한 사람은 메데치 가문의 후원을 받고 있는 '보티첼리'였다.

 

줄리아노 데 메디치

 

보티첼리는 시모네타를 보자마자 그녀를 사모하게 되였다. 하지만 당시 피렌체 전체의 남자의 찬미를 받고 있던 그녀.. 공국의 지배자인 로렌초 까지도 시모네타의 찬미자였다.

1475년에 열린 마상 창시합에서 이긴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시모네타에게 우승을 바쳤고 시모네타는 그 경기 에서 "아름다움의 여왕"로 뽑혔다. 그들은 곧 연인이 되였다.

 

코시모 Cosimo (샹티 시모네타, 1485~90)

클레오파트라 로서의 시모네타

 

그림 하단의 시모네타 베스푸치라는 로고는 사실 100년 뒤 누군가가 그려넣은 것이다.

이 그림은 클레오파트라를 그린 것인지 시네모타를 그린 것인지에 대한 말이 많다. 그래서 제목을 "클레오파트라로 분한 시모네타"라고 하면 적절하지 않을까..

 

비너스와 마르스

 

"무장 해제된 마르스"와 "그를 바라보는 비너스"의 그림은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격언을 주제로 한 그림이다. 오른쪽 상단의 벌집모양은 베스푸치 가문의 문장이다.

 

BOTTICELLI, Sandro,

Pallas and the Centaur

1482, Tempera on canvas, 205 x 147,5 cm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시모네타가 아테나(미네르바)로 그려져 있다.

아테나의 옷에 서로 연결된 세개의 고리는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고 있다.

 

프리마베라(봄) 

 

"당신-보티첼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너스가 되어 드릴께요"라며 시모네타는 화가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림은 메디치가의 한 침실에 걸려있는데 당시 신혼부부의 결혼선물로 그려진 그림이다.

시모네타의 이른 죽음에 대한 화가의 애도와 함께 숨길수 없는 애정이 표현되어 있다.

시모네타는 4월에 죽었다. 그러다 보니 봄축제로 한참 즐거워야 할 이 그림의 비너스는 표정이 없고 다소 쓸쓸해 보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 봄..화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피렌체의 막강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사랑고백까지 받은 그녀의 죽음의 원인은 결핵이다.

이 명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밀레이의 오필리아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시달'도 결핵이 원인이 되어 결국 죽었다.

그래서 인지 한국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여주인공의 죽음의 원인도 결핵과 백혈병이 많다. 미인박명의 원형을 결핵에 걸린 창백한 여인의 아름다움에서 찾는 것인지.. 슬프게도 줄리아노의 연인이 된지 1년 후 1476년 시모네타는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야말로 미인박명)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시모네타가 죽은지 2년이 되는 1478년 파치가의 습격으로 시노네타의 뒤를 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모네타는 죽은 후 예술로 다시 살아났다.

보티첼리는 그의 모든 그림에 그녀를 그렸기 때문이다.

 

보티첼리

 

시모네타가 죽은지 34년 후 보타첼리는 침대에 누어 죽어가며 시모네타의 발 끝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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