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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목요일. - 사랑에 머물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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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부활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에 머물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당신 사랑 안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또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물지 않을까 염려하시기에 하시는 말씀일까요?
그런 뜻이 다분히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랑을 찾아 돌아다니느라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는 그런 경우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바람나지 말고 주님 사랑 안에 안착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뜻이 맞을 텐데 오늘 제게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당신 사랑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으로
그리고 당신에게 가면 “내가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칠 때 자연을 찾아가고 숲에 머물곤 하는데,
자연을 찾아가지만, 실은 일상을 떠나는 것이고,
그것은 일상 가운데서 우리가 매우 힘들고 지쳤다는, 반증이며,
우리의 일상이 사랑이 아닌 힘겨운 일의 연속이었다는, 반증이지요.
사실 무엇이든 일로 하면 힘들고 지칩니다.
반대로 사랑으로 하면 힘들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사실 부모 곁을 떠나는 순간 고생이듯 사랑에서 벗어난 순간 고생이고,
반대로 사랑 안에 머무는 순간 휴식이고 안식이며 생기 충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머물 사랑은 어딥니까?
어느 사랑 안에 머물러야 휴식과 안식과 생기 충만이 있습니까?
우선 다른 사랑을 찾아가기 전에 내 사랑 안에 잠겨도 좋을 것입니다.
일과를 끝내고 오늘 수고했다며 내 손과 발을 보듬어주는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오늘도 사랑하자며 스스로
일 지향이 아니라 사랑 지향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 사랑 안에는 머물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인간 사랑 안에 머물려 하기보다는 사랑을 할 것이고,
수영하다 보면 저절로 물에 잠기듯
사랑하다 보면 저절로 사랑에 잠기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뜻입니다.
사랑할 때 사랑에 머물고 잠기는 법입니다.
미워할 때 미움에 머물고 잠기지 않습니까?
미워하면 미움이 내게서 떠나 미워하는 그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면 내가 미움에 머물고 미움에 잠기듯 사랑의 이치도 똑같습니다.
주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주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면 우린 사랑에 잠기고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단, 내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
아니, 내 사랑만으로 사랑하는 것은 금물이고,
꼭, 주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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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오늘 <복음>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선포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이는 우리가 이미 사랑받았다는 선포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 호의와 자애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당신의 그 사랑의 원천이 당신께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셨다고 밝히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그러니 먼저, 당신께서는 아버지의 사랑받은 존재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받은 당신의 그 사랑에 머무름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됨에 동참하기를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주십니다.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이미 당신께 선사받은 그 사랑을 지키는 것이 곧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 어떤 사랑이 아니라, 선사받은 그 사랑을 간직하고 준수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은 말이나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랑하기를 실행할 때 그 실행 안에 머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밝히시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그렇다면, 지금 우리 안에 진정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기쁨”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쁨은 두 가지입니다. 이중의 기쁨입니다. 곧 “내 기쁨”과 “너희 기쁨”, 곧 ‘예수님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 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선사되는 ‘예수님의 기쁨’과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얻는 ‘우리의 기쁨’ 입니다.
그 <첫 번째> 기쁨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라고 하실 때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선사받은 기쁨입니다. 당신께서 아버지 안에 머물며 그분께 순종적 사랑을 바치면서 누리는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하신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사>의 뒷부분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3)
그러기에, 이 기쁨은 예수님께서 선사하는 신적인 기쁨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뒤에 말씀하시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7,22)
<두 번째> 기쁨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실 때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면서 얻어지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는 우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당신과 아버지와 나누는 ‘사랑의 기쁨’에 동참하는 기쁨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더 커지고 더 충만해져가는 기쁨입니다. 성령과 함께 성장시켜가는 열매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은 결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입니다. 곧 선사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우리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십니다. 당신께서 아버지 안에 머무르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의 기쁨도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지금 진정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은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이미 하늘나라를 사는 종말론적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 제1항에서 말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주님!
제 안에는 당신의 숨결이 흐릅니다.
제 안에 새겨진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 안에 굴을 파고들어 와 빈 무덤으로 모습을 숨긴
그지없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결코 빼앗길 수도, 빼앗겨지지도 않는 기쁨입니다.
주님! 당신의 기쁨의 숨결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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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분의 명을 지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실제적으로도 이웃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열매는 나뭇가지에 달립니다. 그러나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나무 자체가 튼실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뿌리가 튼튼하고 그 뿌리를 통해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농부의 손에 의해 가지치기며 적과를 하고 다듬어져 더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햇빛과 비가 적기에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나무가 심겨진 땅은 이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한 알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 머물러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요한13,35).
우리 옛 속담에 “부모가 온 효자가 되어야 자식이 반 효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내리사랑 안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격언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 안에서 상대방의 바람을 헤아리고 그의 뜻에 공감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랑보다 강한 동기는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기쁘게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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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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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흥미로운 연구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공연을 관람하고 나온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입니다. 먼저 공연을 보고 나서 만족도가 높은 사람은 평균 3명에게 좋았다고 이야기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평균 10명 내지 11명에게 불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긍정적 감정보다 부정적 감정이 더 강하고 길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실제로 타인에 대한 칭찬은 그 수명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반면 타인에 대한 불만은 그 수명이 오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는 부정적 감정이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이 이 세상 안에 가득해야 살기 좋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긍정적 감정이 많아야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기쁨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 감정을 확대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긍정적 감정이 확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도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각자가 긍정적 감정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과 행동에는 침묵으로 더 이상 확대하지 않도록 하고, 긍정적인 말과 행동에는 계속해서 확대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정적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라는 긍정적 감정을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이 기쁜 소식을 어떻게 확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침묵과 무관심으로 아예 기쁜 소식이 없는 척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계명이 세상 끝까지 펼쳐질 수 있는 역할을 우리 모두 수행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주님 사랑에 푹 머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만이 세상에 그 사랑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이렇게 사랑 안에 머물러야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고 하십니다(요한 15,11 참조). 그런데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 안에 휩싸여서 사랑 안에 제대로 머무르지 못합니다. 칭찬보다는 비판하는데 익숙하고, 용서하기보다는 단죄하는데 익숙합니다. 지지하기보다는 반대하는 편에 속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면서 점점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많은 이가 원하는 방향은 기쁨, 행복, 사랑의 삶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그분의 뜻을 실천할 때 어느 순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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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만심을 누르는 것은 사자를 이기는 것보다 어려우며, 분노를 다스리는 것은 장사를 이기는 것보다 어렵다(칭기스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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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부활 제5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사랑안에 머물러라”
-지상천국의 삶, 사랑은 분별의 잣대-
일기쓰듯하는 요즘 제 강론입니다. 제가 이젠 많이 참 자유로워졌습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기 때문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강론 제목도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똑같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행복도 선택이자 발견입니다. 선택의 은총, 발견의 은총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살기를 선택하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말그대로 지상천국의 삶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 때 주님을 만나고 바로 거기가 구원의 치유 자리가 됩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니 저절로 분별의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을 때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는 이들이 진정 주님의 관상가. 주님의 신비가, 주님의 영성가입니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하느님의 나라요,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도록 모두가 초대 받고 있습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클뤼니 수도원의 성인 아빠스들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10세기에서 12세기까지 200년동안 참으로 혜성같이 나타나 수도원은 물론 가톨릭 교회와 전 유럽을 개혁으로 이끌었던 클뤼니 수도원의 기라성 같은 성 오도, 성 마욜로, 성 오딜로, 성 후고 아빠스들에 이어 복자 베드로 베네라빌리스 아빠스입니다. 이 거룩한 아빠스들 역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았기에 수도원과 교회는 물론 유럽을 개혁하고 부흥시켰음을 봅니다.
기도와 필사에 치중하여 기도와 노동의 균형을 잃어 200년 후에 사라져 가고 대신 수많은 탁발수도회들과 시토회, 그리고 은수생활이 번성하니 이 또한 자연스런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되니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짧지만 강력하고 어제처럼 멋지고 마음을 환히 밝힙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사랑의 이중계명을, 바로 하느님을 온마음으로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충만한 기쁨의 삶이 펼쳐집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새삼 충만한 기쁨 역시 주님 사랑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저절로 선사되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어제는 정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던 충만한 기쁨의 하루였습니다. 여러 일화를 나눕니다.
“지금은 휴가중”이란 수도형제의 방문앞에 표지를 보고 웃었습니다. 휴가 나온 휴가인생인데 새삼 무슨 휴가인가? 인생휴가 끝나면 아버지의 집에서 또 영원한 안식의 휴가인데.., 그리하여 휴가를 잊고 산지 수십년입니다. 청담동 성모치과에 갔다가 극단의 신문기사를 보며 정말 분별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비정상의 정상화”
현 정부의 1년 평가가 1면 톱기사 제목으로 나왔는가 하면,
“정상의 비정상화”
로 정반대의 평가가 뒤따르니, 똑같은 사실에도 어떻게 이렇게 평가가 다를까? 정말 국민들의 분별의 지혜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두루 뉴스들을 살펴 볼 때 올바른, 지혜로운 분별이겠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1독서 예수살렘 사도회의의 결정이 이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베드로에 이은 야고보 사도가 “분별의 대가”답습니다. 베드로의 다음 설교는 얼마나 멋지고 통쾌한지요!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참으로 명쾌한 진단에 명쾌한 해법이니,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기에 이런 분별의 지혜입니다. 이래서 사랑은 분별의 잣대라 하는 것입니다. 온 회중이 공감하여 묵묵부답 잠잠해 있을 때 야고보가 등장하여, 베드로보다는 후퇴한 느낌이지만 적절한 중용의 지혜를 발휘하여 지켜야 할 사항을 최소화함으로 해결을 봅니다. 할례의식은 빠졌고 다만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 그리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는 것만 지키면 된다 합니다. 어제는 정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던 하루였었고 이런 분들을 만났고 이렇게 사는 분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시 한복판 청담동 오아시스를 다녀간 기분입니다. 기쁘고 경쾌하게, 신바람나게 일하시는 모습도,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솜씨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으시고 늘 행복하세요!”
주님 사랑 안에서 머물며 최선을 다해 치료에 전념하는 치과의사 형제에게 치료후 메시지로 전한 덕담입니다. 남편을 극진히 간호하는 다음 자매님의 고백도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잡은 손, 남편 잡은 손, 놓지 않고 무른 마음 단단히 먹고 하루하루 잘 버티겠습니다.”
강론쓰는 중에도 자매님과 장부에게 주님의 자비를 청하게 됩니다. 어제는 작심하고 수많은 분들에게 꽃길 사진도 선물하며 주님 사랑을 나눴습니다. 제 집무실옆 주님 친히 마련해 주신 “꽃길”입니다.
“내 집무실
꽃자리, 주님이 계시는 곳
천국에 이르는
꽃길
저절로 난
꽃길
샛노란 애기똥풀꽃들 사이
꽃길
주님 마련해 주신 사랑의
꽃길”
현재 수도공동체는 전부 18명입니다. 수도형제 12명, 손님 6명, 그러니 무려 손님이 1/3입니다. 수도원 환대의 품이 그대로 주님 사랑의 품을 닮았습니다. 주님의 집 수도원에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고 있는 수도형제들입니다. 불가의 스님들에게 삼소(三笑)가 유명합니다.
떡이 나올 때 웃고, 국수가 나올 때 웃고, 두부가 나올 때 웃는다 합니다. 셋 모두 흰 색깔입니다. 엊저녁 식사때 주님 사랑 안에서 국수를 맛있게 먹는 수도형제들을 보며 문득 떠오른 불승들의 삼소입니다.
교황님이 강조하는 하느님의 스타일입니다. 헝가리 방문중 예수회 회원들과의 격의없는 대화도 감동자체였습니다. 교황님의 충고가 너무 적절해 이해를 깊이하기 위해 괄호안에 영어를 넣습니다.
“젊은이들은 ‘한결같은 모범(consistent example)’을, 삶의 증명(testimony)과 증언(witness)을 보고 싶어 합니다. 나에게는 분명한 것은 젊은이들은 진실치 못한 ‘중언부언(double-speak)’에는 관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이 공격적임을 뜻하지 않습니다. 분명함은 언제나 상냥함(amiability), 형제애(fraternity), 아버지다움(fatherhood)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쇠말은 성실성(authenticity)입니다.
하느님 열쇠말 중의 하나가 부드러움입니다.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그리고 부드러움(tenderness)이 바로 ‘하느님의 스타일(God’s style)’입니다. 이대로 살면 결코 잘못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기에 이런 통찰의 지혜입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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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1.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탈무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머리가 두 개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서로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한사람입니까? 아니면 두 사람입니까?’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때려보아라, 둘 다 아프다고 소리치면 한 사람일 것이고 둘 중 하나만 소리치면 두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 이야기를 들려드린 이유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서로의 아픔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외모나 조건을 사랑하는 것. 물론 이것도 사랑의 시작입니다. 처음부터 깊은 속까지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여기까지만 사랑하고 여기까지만 보고 이것이 사랑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반쪽짜리 사랑입니다. 하루를 살아간다는 말이 낮을 산다는 것뿐만 아니라 밤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점, 나와 잘 맞는 점뿐만 아니라 나쁜 점, 나와 잘 맞지 않는 점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내 안에 머물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고 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용서하고 이전에 먼저 사랑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도 둘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나, 아파하는 나와 그것을 숨기고 웃는 나, 그래도 힘겹게 살아가는 나입니다. 나는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 둘이야말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사랑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내가 나의 아픔을 바라보고 감싸 안아주고, 내가 나를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주님과 함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아픔을 볼 수 있고 그 상처를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하게 되면 우리는 더욱 나를 아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소유격의 중요성
성 토마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옆구리를 만져보고
구멍난 손에
손가락을 넣어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다른 이들이 하느님이 아닌
나의 하느님! 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미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다른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너의 하느님이라고요.
저의 하느님이시며, 그대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대를 안아주시는 분, 그대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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