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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월이(月伊) 둘레길" 걷기 행사
2018년 10월 13일 오전 10시, 고성 향토문화선양회(회장:박 서영)와 고성읍 및 마암면 주민 자치위원회가 주최하고, 고성 군청,고성 교육지원청,고성 문화원이 후원하는 제 5회 청소년 학생들과 함께하는 "월이(月伊)둘레길" 걷기 행사가 실시되었다.
본 행사를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서 고성 향토 문화 선양회와 한국 시 사랑 문학회(회장:서 병진)회원등은 오전 6시 30분 서울 양재역에서 출발하여 고성 박물관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이 조금 지나는 시간이었다.
이미 행사는 진행되고 있었고,잠시 박물관에 들어가 행사 진행에 대한 설명과 박물관을 잠시 돌아본후, 곧장 차량으로 걷기 행사 현장의 마암면 간사지 갈대숲길 '월이' 둘레길로 이동해 갔다.
이날 행사는 지역 주민 자치위원회와 군청,교육지원청,문화원등에서 나온 분들과, 초 중고생들의 학생들이 걷기에 참여를 하여 "월이(月伊)"라는 의기(義妓) 정신을 다시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월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591년 가을 어느날, 경남 지역 해안선을 정탐하러 고성지역에 잠입한 일본 밀정이 무학리에 있는 술집 무기정(舞妓停)에 투숙하게 되었는데,이때 월이는 승려복 차림의 간자를 수상히 여기고 그에게 많은 술을 권하여 잠들게 한후, 그의 벼랑속을 뒤져 여러겹에 싸인 비단보자기를 발견하였다.
보자기 속에는 해상공략도(海上 攻略圖)라는 지도가 있었는데,그 지도에 자신이 붓으로 당항만이 다른 바다로 이어진 것처럼 거짓 해로를 그려넣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간자는 그대로 일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듬해 1592년 조선을 침공한 왜군은 조작한 지도를 그대로 사용하여 충무공 이 순신장군에게 대패를 당했던 것이 유명한 당항포해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랜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왔으나,고성군은 그 구전을 토대로 실제 '월이'라는 기생의 삶을 오늘날에 재조명시키려는 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온 가운데, 여기에 고성 향토문화 선양회와 지역 주민자치위원회가 앞장서 대대적인 홍보와 다양한 행사들을 전개하여 나왔으며, 금번 행사도 그런 차원의 연장선에서 실시된 하나의 이벤트였다고 보아진다.
박물관 뒤켠에는 소가야 시대의 고분군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다.
고성군에서는 앞으로 이곳 소가야 고성 송학동 고분군을 유네스코에 등재할수 있도록 적극 추진할 모양이다.
고성군에도 공룡 발자취를 비롯하여 돌아볼만한 여러 관광코스가 있음을 새삼 알수 있었다.
이곳 고성은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와 옛 소가야 도읍지이기도 하며,조선시대에는 서부 경남 해안의 중심도시였단다.
'월이' 둘레길 걷기 행사에 대해서 설명을 하여주시고....
간단한 설명회를 마치고, 박물관 이곳 저곳을 잠시 둘러 보았다.
월이 둘레길 걷기 행사장에 도착하여....
지금 보이는 현장이 월이가 왜군을 속였다는 속싯개라는 곳이다.
걷기 행사가 드디어 시작되어지고......
기생 월이(月伊)
고성사회에는 오래전부터, 구전(口傳)으로 전해져 온 이야기가 하나가 있다.
바로 기생 월이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구전이란 구록에 비해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나 그렇지가 않다.
구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이기 때문에, 잡초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이 있기도 하다.
거기에는 꾸밈이나 거짓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반면에, 때론 기록은 기록하는 자의 의도에 따라서 첨삭하여 왜곡되기도 하고, 거짓이 진실이 되거나 진실이 거짓이 되기도 하는 것이 기록문화의 결함이기도 하다.
세계의 고전 중에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딧세이아》는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을 기록한 것이며, 그리스가 낳은 세계 3대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퀼로스의 작품도 구전에 의해 전해져 온 것이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은 구전을 소재로 한 전령적인 구전문학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탈무드》나 아랍의 경전인 《코란》도 구전으로 설파하는 전담 지도자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활약한 대표적인 기생으로 진주의 논개와 평양의 계월향이 있어 그녀들의 활약상은 기록해 둔 야사(野史)라도 있는 반면 고성의 월이는 야사마저 없어 그동한 고성의 물정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진정성에 의구심을 품어왔는데, 향토시인이자 작가인 정해룡이 그의 역사소설 《조선의 잔다르크 월이》를 통해 역사 뒤안길에 묻혀 있던 월이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 냈다.
진주의 논개는 적장 하나만 안고 죽었으나, 고성의 월이는 왜적 함대 26척과 약 3,000여명의 적 수군을 대파하는데 일등 공신이었다. 일찍이 우리나라에 이런 기생 있었던가. 없었다. 논개도 휼륭한 기생이지만 월이의 활약은 논개와 단순 비교할 수 없다.
정해룡의 문학작품 속에 묘사된 월이의 자취를 더듬어 보자.
고성읍성에서 북으로 2리 가량 떨어진 곳에 무기산舞妓山이라는 곳이 있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낮은 야트막한 동산 위에 둥근 밥그릇을 뒤집어 놓은 큰 무덤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 산을 흔히 똥메산(독뫼산)이라 불렀다.
무기산은 이름 그대로 기생과 관련이 있는 산이다.
고려시대 고성 수령인 고주지사가 기생을 데리고 이곳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무기산 아래 물맛 좋은 무기정이란 우물이 있는 무기정이란 술집이 있었고, 그곳에 월이라는 현명하고 아리따운 기생이 있었다.
-정해룡《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에서 32∼33쪽
“선조가 집권한 조선은 건국한 지 200년을 지나는 동한 전쟁다운 전쟁이라곤 겪지 않은 평화로운 시대였잖아.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수년에 걸쳐 수례 정보를 주었어도 아무런 준비 없이 큰 전쟁을 맞았으니 그 결과는 뻔했지 뭐. 무능한 임금은 자기만 살고자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고 날이면 날마다 정쟁만 일삼던 관료들도 제 한 몸 살리기에 급급했으니 민초들의 삶은 그야말로 깨어진 날카로운 유리병 위로 맨발로 갇는 격이었다는 표현이 딱 걸맞을 거야.”
영대는 향토사를 연구한 탓에 그 방면에 박식했다.
그는 숨이 가쁜지 잠시 물 한 모금을 청해 마신다.
“한번 생각을 해 봐. 그 당시 여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엄혹했고 더욱이 기생이라면 최하위 계층의 신분인데도 기생의 몸으로 적장을 한고 장렬히 죽어갔음을 처음에 조정에서는 인정하여 하지 않았겠지. 왜냐하면 그걸 인정할 자신들의 체면은 얼굴에 똥칠을 한 셈이 되거든, 일개 하찮은 기생도 자신의 몸을 초개같이 버렸는데 임금과 자신들은 도망만 갔으니 어떻게 인정을 하겠노. 훗날 오두인, 박태무, 민백순 등이 자꾸 논개를 크게 부각시킴은 무능한 임금과 신하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이었고 그 알량한 양반과 선비사회에 대한 통렬한 질책이 아니었겠어? 결국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인정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논개를 존선의 잔 다르크라 불러도 되겠네!”
“조선의 잔 다르크?”
영대는 미자를 빤히 쳐다보며 웃는다. 모두들 웃었다.
“그 이름에는 논개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 딱 한 사람 있어!”
“그게 누군데?”
미자는 궁금해 한다. 모두 다 영대를 쳐다본다.
“논개에 가려 이제껏 빛을 보지 못한 월이라는 기생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야.”
“월이가 누군데?”
태상은 처음 들어보는 월이라는 이름에 의아해 하는 모습이다.
“고성의 월이 말제?”
고성 출신인 부녕은 월이 말이 나오자 그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그래. 맞아. 고성의 기생 월이.”
“월이는 임진왜란 때 고성 당항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었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간첩이 고성의 지도를 그려갔는데, 그때 월이는 몰래 그 지도 위에 선을 그어 길이 없는데 길이 있는 것처럼 변조를 했거든. 왜놈들은 그 지도를 믿고 당항포에 들어왔다가 몰살을 당했다 카더라.”
“그런 일이 있었어? 있었다면 무슨 기록이라도 남아 있었을 텐데?”
태상은 못 믿어 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다들 못 믿어 할 만도 하지. 논개는 어우야담에 단 몇 줄이라도 기록이 남아 있었으니 살아남아서 오늘날 추앙을 받고 기려지고 있는데 반해 월이는 그런 기록은 없고 다만 고성 땅에서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 온 이야기뿐이었으니까/”
“정말 구미가 당기는 애기구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라.”
태상은 영대가 한 말에 더욱 알고 싶어 한다.
“너희들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어사 유몽인이 진주에 들려 순시하다가 그곳에 떠돌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책에 기록을 해 놓았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논개가 고성의 월이와 무엇이 다르겠나? 논개도 오늘날까지 다만 입에서 입으로면 전해 져 온 고성의 월이처럼 똑같이 설화 속의 인물 신세가 아니었겠어?”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수긍하는 태상은 영대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계속하라는 눈빛이다.
“유몽인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성안의 사람들이 몰살을 당해 순안어사로서 진주백성을 위무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어. 그때 만약 유몽인이 고성 땅에 왔었더라면 고성의 민초들 사이에서 떠돌던 월이의 활약상을 듣고 분명 어우 야담에 기록해 두었겠지. 안타깝게도 진주는 오늘날로 치자면 도청 소재지였고, 고성은 일개 변방에 불과했으니 고성으로 온다는 것은 안중에 없었다고 봐야겠지.”
“그럼. 월이가 논개보다 뛰어난 점이 무엇인데?”
영대에게 거듭 질문하는 태상은 점점 진지해졌다.
“논개는 임진왜란 때 일개 적장 하나만 안고 죽었을 뿐이지만, 월이는 아까 부녕이가 한 말대로 당항포해전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 그렇다고 한갓 기생인 아녀자의 몸으로 칼을 차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것은 아니고.”
목이 마른지 영대는 물을 마신 뒤 하던 말을 이어간다.
“당항포해전의 격전지인 그 바다는 사실 적들이 들어가서는 안 될 지형이거든. 소위 퇴로가 없는 사지인 셈이지. 그곳 지형을 그린 지도를 펼쳐놓고 관찰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어. 퇴로가 없는 그 길을 일본의 수군이 대 함대를 이끌고 왜 갔을까 하는 것이야.”
“왜 갔는데?”
“왜적의 함대가 소소강(召所江) 서쪽에 있었다고 한 이순신의 장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 서쪽은 바로 고성읍 쪽이야. 그것은 바로 왜적의 간자가 만든 지도에 월이가 길이 있는 것처럼 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이었지. 소소강(지금의 율천리에서 흘러내리는 고성천을 소소강이라 했음)에서 고성만 바다까지 뱃길이 있는 양 지도 위에 굵은 선으로 그어져 있으므로, 왜장은 그 지도를 따라 소소강으로 거슬러 올라갔겠지. 가다가 길이 없음을 알고 후퇴를 하고 있을 즈음에, 이순신 함대가 들이닥치자 적들은 물러서자니 퇴로는 없고 나아가자니 이순신의 막상한 함대가 버티고 있으니 우왕좌왕하다가 전멸되었거든. 26척이나 되는 왜적의 대 함대를 깨뜨리는 숨은 주역은 월이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어찌 월이를 논개와 단순비교를 하겠는가 말일세.”
“야! 이거 처음 듣는 소린데. 당항포해전이 그렇게 시작된 전투였다니!”
태상은 아연 놀랍다는 표정이다.
“논개는 제2차 진주성 전투 때인 1593년 6월에 죽었지만, 월이는 그보다 이른 1592년 6월 당항포해전 직후에 적장의 칼에 무참히 베어졌다. 논개보다 앞서 죽었고 그 죽음 자체도 비참했지 결론적으로 논개보다 더 거룩하고 더 충절하다고 볼 수밖에 없어.”
- 정해룡《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에서 19∼23쪽
이것이 고성 사회에서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의기 월이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가. 고성인들이여! 이 야야기를 듣고 그냥 흘릴 것인가. 묻어들 것인가.
아니면 이제다고 월이를 기리는 ‘월이기념관’이라도 짓고 ‘월이축제’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월이 둘레길....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각광받는 길이 둘레길이나 올레길이다.
둘레길은 주로 산의 둘레를 따라 일주하는 여행길이고, 올레길은 제주도의 걷기 여행 코스다.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좁은 골목이란 뜻인데, 통상 큰길에서 집의 대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을 말함이다.
둘 다 도보로 여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리산, 북한산 등에는 둘레길이 조성돼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고성에도 이런 둘레길 하나 조성할 멋진 코스가 있다. 그곳은 거류산이나 벽방산이 아닌 ‘월이’와 관련된 ‘속싯개’ 일대다.
고성천에서 흘러든 물이 바다와 만나는 곳, 그 일대가 바로 임진왜란 때 월이가 그린 지도에 속아 일본군이 대패한 속싯개다.
그곳 바다를 막아 간척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을 막아 간척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 당시 왜장이 고성만 바다로 빠지기 위해 거슬러 올랐던 '소소강’ 그대로의 지형이었을지도 모른다.
간사지에는 우포늪처럼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란다.
그중에서 갈대는 군락을 이루어 철새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 준다.
이곳을 나고 드는 새나 식물을 조사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
갈대가 무성한 강변을 따라 연인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데이트 공간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변산반도에 있는 채석강처럼, 강변 산은 비바람에 깎여 층층이 쌓인 돌이 마치 책을 쌓아 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 정해룡《조선의 잔다르크 월이》에서, 273쪽
억새와 갈대가 무성히 우거진 곳이어 보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억새 뒤편으로 보이는 산은 거류산(해발 571m)이란다.
그 산 너머에는 산악인으로 유명한 엄 홍길의 출생지이자,그의 기념 박물관이 있다고 한다.
점심 김밥을 나누어 주는 장면
꿀맛 같은 점심시간.....
월이 둘레길 주변에는 용산천이란 큰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월이 둘레길" 걷기 행사는 이곳 생태학습관 앞에서 끝났다.
고성 향토 문화 선양회는 '월이' 설화를 바탕으로 고성 출신 문인들에 의한 시,소설,수필,희곡등 많은 문학적 작품들이 출판되었다며, 향후 이들 문학작품외에도 음악과 춤,연극 ,드라마,오페라등 다양한 분야의 문화컨텐츠가 기대된다고 보고있다.
동시에 고성의 자랑스러운 문화 브렌드로 자리메김하기 위한 다양한 구상과 계획을 실천하여, '월이'를 고성의 미래 상징적 아이콘으로 꽃피어 나갈 계획이란다